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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쩜오디의 오프레=현실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극 중 이름이 본명이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현실의 배우와 다른 캐릭터라고 생각해주세요.)

 

 

 

 

 

 

 

-

 

 

 드라마 세 번째 시즌이 무사히 끝나고, 제작팀과 배우들이 모여 작은 파티를 가졌다. 다음 시즌이 시작되기 까지는 반 년 정도가 남았고, 이미 오더도 받고 구체적인 계획도 짜여 있어서, 다들 이 휴가의 시작을 마음 놓고 즐기는 분위기였다. 시즌 3을 찍으며 배우들 사이가 꽤 좋아져서 뒤풀이 분위기는 한층 더 즐겁고 왁자지껄했다. 시즌2까지만 해도 사이가 서먹서먹했던 루트-그로브스와 쇼도 제법 친해졌고, 아예 사이가 좋지 않았던 리스와 쇼의 관계도 상당히 호전되어 지금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리스와 쇼가 각각 들고 있는 독한 알콜도 두 사람의 이 친밀한 분위기에 큰 기여를 하고 있기는 했다.

 


 “하, 하하, 그래서 그때 해리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큭크크크 헛소리 좀 그만 해.”
 “헛소리라니. 쇼 너는 그 때 없었잖아. 사만다가 얼마나 배역에 몰입했던지, 진짜 무서웠다고. 해리가 진지하게 연기하는 척해서 ‘루트’를 달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그래, 그래. 여기 있는 전부가 루-트- 손에 황천길로 가 있겠지.”

 


 음.. 어쩌면 리스와 쇼의 사이는 그다지 호전되지 않은 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리스의 허풍에 쇼가 빈정댔고, 평소처럼 쇼의 빈정댐에 리스의 표정이 험상궂어졌다.

 


 “이봐 쇼, 니가 나중에 들어와서 잘 모르나본데.”
 “이봐 리스, 니가 내 인생에 나중에 끼어들어서 잘 모르나본데, 내가 너보다 사만다랑 친하거든? 사만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장난 좀 친 건데 니가- 아마도 너만- 눈치를 못 챈 거겠지.”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아예 병을 앞으로 끌어와 마시는 쇼를 보며 리스가 잠시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쇼가 많이 취했군. 취한 애 붙잡고 싸워봐야 내 꼴만 우스워지지. 리스가 콧김을 뿜으며 쇼가 마시는 술병과 비슷한 술병을 끌어와 아직 다 비우지 않은 잔에 따랐다.

 


 “어쨌거나 그때 해리는 정말 믿음직스럽고 멋있었어. 너도 해롤드가 멋있다는 건 부정 못하겠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리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아까 이야기에 말을 보탰다. 쇼가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으며 턱에 흘러내린 술을 아무렇게나 손으로 닦으며 대꾸했다.

 


 “아, 그래. 그건 부정 못하지. 핀치는... 조금 고지식하긴 하지만 괜찮은 사람이야.”
 “해롤드가 고지식하다고?”
 “응. 너도 그건 아니라고 못하겠지?”
 “무슨 소리야. 해리만큼 융통성 있고 순발력 있고 사고가 유연한 할ㅇ, 음....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는데.”
 “그래 어쨌거나 할아버지긴 하잖아. 나이가.”

 


 리스가 말하려다 삼킨 단어를 굳이 다시 꺼내 얘기하는 쇼 때문에 리스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둘 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 의미 없는 말싸움이 여기서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스는 대화를 끊지 않았다.

 


 “하지만 나나 사만다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사만다랑은 내가 더 친하다니까.”
 “너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 사만다 불러올까?”
 “나 참, 부르나 마나지. 사만다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뭐? 니가 모르나 본데 나 사만다랑 같은 동네 살아.”
 “나는 같은 동네 안 살아도 매주 쉬는 날마다 만나서 같이 젤라또 사먹는다구.”
 “나는 사만다가 먹어보라면서 맛있는 빵도 직접 갖다 준 적 있어.”
 “아 그러셔? 나는...”

 

 

 

 

 

 

 

 잠시 뒤 독한 술은 다 떨어지고, 똑같이 맥주병을 놓고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티격태격하는 쇼와 리스 뒤에서 핀치와 그로브스가 그들을 근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핀치, 저기 둘 다 너무 많이 마시는 거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제가 가서 말려볼까요?”
 “아뇨, 제가 가볼게요. 이제 여기도 거의 파장 같으니 사민을 아예 데리고 가는 게 좋겠어요.”
 “그래요 그럼. 좋은 밤 보내요, 미스 그로브스.”
 “당신이 그렇게 부를 때면 꼭 ‘루트라고 불러줘요.’라고 하고 싶어진다니까요.”

 


 말없이 부드럽게 웃는 핀치에게 그로브스도 마주 웃으며 “핀치도 좋은 밤.”이라고 덧붙였다. 그로브스는 자신과 쇼의 겉옷을 챙겨 아직도 누가 그로브스와-또는 핀치와 더 친한지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사만다는 날 좋-아-한다고.”
 “그거 1급기밀인데 어떻게 알았어, 사민?”

 

 리스에게 한 음절씩 강조해가며 그로브스 얘기를 하고 있던 쇼의 어깨가, 그로브스의 목소리에 눈에 띄게 움찔했다. 리스와 쇼가 동시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색한 웃음으로 그로브스를 맞이했다. 둘 다 본인들이 얼마나 유치한 말다툼 중이었는지 자각은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기밀사항을 남들 다 듣게 떠들면 어떻게 해.”
 “...들렸어?”
 “반대쪽 바에까지.”
 “난... 별 말 안 했어. ....아마도. 먼저 가 봐도 되겠지? 굿나잇, 사만다.”

 


 창피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쇼를 두고 리스가 재빠르게 자리를 떠나며 그로브스의 뺨에 굿나잇 키스를 했다. 그걸 본 쇼가 황급히 고개를 쳐들며 그로브스와 리스를 번갈아 쳐다봤다.

 


 “방금 무슨?!? 리스 말대로 둘이 그렇게 친해?”
 “우리 벌써 3시즌 째 같은 드라마를 찍었는데, 이정도야.”
 “정말...? 맙소사... 진짜.....?”
 “뭐가 그렇게 충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샘, 내가 널 약간 더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야.”

 


 그로브스가 쇼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그로브스의 말에 쇼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입을 삐죽 내밀고 불퉁하게 대꾸했다.

 


 “약가안?”
 “여기서는.”

 


 그로브스가 단호하게 말하며 쇼 앞에 가방과 겉옷을 내밀었다. 쇼가 푸푸 소리 내며 바 스툴에서 내려섰다. 내려섰다기보단 스툴에서 그로브스의 품으로 옮겨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쇼가 넘어지지 않게 그녀를 끌어 안은 그로브스의 품에서 쇼가 해맑게 활짝 웃었다.

 


 “그럼 빨리 많이 좋아하는 곳으로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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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 |

 

 구강 청결은 중요하다. 치아는 한 번 상하면 절대 재생되지 않고, 충치는 초기에 감지하는 것이 어려워 잇몸염까지 유발하기 쉽다. 심지어 심한 충치는 소화불량도 유발할 수 있다. 이와 잇몸이 아파 음식물을 제대로 씹지 않은 채로 삼키면 위에 부담이 가 소화불량, 혹은 위염을 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쇼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쇼는 충치가 주로 입 안에 사는 혐기성 세균에 의해 생긴다는 것도, 이 세균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타인과 키스를 하거나 같은 칫솔로 입을 쑤셔대지 않아도, 단지 칫솔모끼리 맞닿게 두는 것만으로도 타인과 구강 세균을 공유하게 되며, 이것이 구강 청결에 엄청나게 해가 되는 일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구강 청결은 중요하며 타인과 칫솔을 공유하는 것은 아주아주아주 극악무도하고 더러운 행동이라는 소리다.

 

 

 “알아듣겠냐, 루트?”
 “물론이지 자기. 그렇게 열심히 설명 안 해도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자꾸 내 칫솔을 쓰는 거냐고?!”

 

 

 쇼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루트 눈앞에 칫솔을 흔들었다. 칫솔모에서 투둑투둑 물방울이 떨어져 이리저리 튀었다. 루트는 눈두덩이에 튄 물을 손으로 훔쳐냈다.

 

 

 “나 방금 굉장히 끔찍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사민.”
 “당연히 끔찍하지! 너랑 이딴 더러운 방식으로 간접키스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너 때문에 내가 이번 주에만 벌써 칫솔을 두 개나, 아니 이제 세 개째 새로 뜯게 생겼다고!”
 “우선, 그건 나 때문이 아니야, 쇼. 왜냐면 이건 내 칫솔이거든.”
 “뭐? 이게 왜 니 칫솔이야? 그제도 칫솔모가 젖어있어서 내가 버리고 새로....”
 “잠깐, 그제부터? 그럼 방금도...?”
 “.....!!!”

 

 

 루트와 쇼는 거의 동시에 화장실로 달려가 찬장에서 새 칫솔을 꺼내 맹렬하게 이를 닦았다. 여행 중이 아니면 잘 쓰지 않는 가글액까지 꺼내서 다섯 번씩 가글을 하고나서도 쇼는 루트를 눈빛만으로 불태워버릴 것처럼 노려봤다.

 

 

 “잘 봐 루트, 파란색이 내 거야!”
 “파란색이 내 거니까 알아둬, 쇼.”

 

 

 동시에 똑같은 소리를 내뱉고 나서 그녀들은 상대가 들고 있는 칫솔이 자기가 들고 있는 칫솔과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거였다. 집 근처 생활용품점에서 떨이로 묶음 판매하던 파란 칫솔 세트를 루트도 사고, 쇼도 샀다는 것.

 

 

 “하!”
 “오, 이런..”

 

 

 쇼가 기막혀하며 이를 한 번 더 구석구석 닦는 사이 낮게 탄식한 루트는 방에 가서 절연 테이프로 칫솔 손잡이를 둘둘 말아 왔다.

 

 

 “이러면 되겠지. 테이핑 된 게 내 거. 아닌 건 쇼, 네 거.”
 “됐다고? 일주일이나 내 구강의 순결을 잃었는데?”
 “칫솔이 똑같이 생겼으니까 너도 나도 어쩔 수 없었잖아. 이정도 가지고 순결을 잃었다고 표현하다니. 사민 은근히 귀엽다니까.”

 

 

 루트는 칫솔을 칫솔걸이에 걸고, 세면대 앞에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쇼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쇼가 기분 나쁘다는 표시로 루트의 손을 탁 쳐냈다.

 

 

 “우리 사민이 왜 심통이 난 걸까?”
 “소름끼치니까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진심으로 진저리치는 쇼를 보며 루트가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그렇게 웃지도 마. 기분 나빠.”
 “자기 혹시...”
 “거기까지. 한 마디만 더 하면 주먹 날아갈 줄 알아.”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줄 알고?”
 “무슨 말을 할 건지는 몰라도 니가 ‘자기’라고 운을 떼는 말 중에 제대로 된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건 알지.”

 

 

 쇼의 심퉁맞은 표정을 보고 루트가 경쾌하게 웃었다.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루트 때문에 쇼의 미간 주름이 깊어졌다.

 

 

 “난 우선 사과를 받고 싶어. 그리고,”
 “무슨 사과.”

 

 

 쇼가 루트의 말꼬리를 잘랐다. 쇼의 구겨진 미간에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 루트가 입을 삐죽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한테 그딴 더러운 방식으로 간접키스나 하는 변태 스토커라고 했잖아.”
 “아냐, 변태 스토커라고는 안 했어.”
 “어쨌거나 날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잖아.”
 “아니면 됐지.”

 

 

 세면대 앞에 선 쇼를 향해 루트가 한 발짝 다가섰다. 쇼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고개만 들어 일자로 굳어있는 루트의 입술께와 속눈썹 그늘이 진 눈동자를 노려봤다.

 

 

 “쇼.”
 “뭐.”
 “사실 간접키스인 게 기분 나빴던 거지?”
 “뭐?”

 

 

 쇼가 세면대 앞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 루트가 쇼에게 키스하는 게 더 빨랐다. 아주 가볍게 입술만 스쳤을 뿐인데도 쇼는 길길이 날뛰었다. 루트는 그런 쇼를 피해 재빠르게 방으로 도망쳤으나, 바로 쫓아온 쇼에게 멱살이 잡혔다.

 

 

 “하하, 장난이었어, 사민.”
 “알아.”

 

 

 쇼는 으르렁대며 루트의 멱살을 잡아 자기 눈높이에 맞게 끌어내렸다. 그리고 루트에게 깊게 키스했다. 루트는 쇼가 키스하며 밀어붙이는 대로 뒤로 밀리다가 침대 위에 다리가 걸려 넘어졌다. 쇼가 루트를 양 팔에 가두고 위에서 내려 봤다. 루트가 가슴을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기 입술의 순결을 잃었겠는걸.”
 “이럴 땐 좀 닥쳐, 루트.”

 

 

 쇼가 다시 루트의 입술을 덮었다.

 

 

 

 

 

 

 

 

 

 


+ 일주일 전.

 

 “헤이, 잘생긴 파트너, 밀린 서류는 여기 있어.”
 “쇼랑 루트 이사 나 혼자 도와주는 대신 내 서류 나눠하기로 한 걸로 기억하는데.”
 “이게 이미 반 가져 간 거야.”
 “....”
 “그래, 그 아가씨들이 드디어 같이 살기로 했다고? 부부 싸움이라도 하면 건물이 날아갈지도 모르겠네.”
 “나도 동의는 하지만, 부부라는 말 쇼 앞에서 하면 당신 턱이 날아갈지도 몰라. 그나저나 퍼스코, 당신 넥타이가 낮에 카레를 먹었나봐. 양치질 좀 시켜.”

 

 


 

Posted by 얼음아
, |

 

쇼는 독한 술을 좋아했다. 도수가 높고 맑을수록 좋았다. 목으로 채 넘기기도 전부터 알콜이 증발하는 것 같은 그 독한 느낌과, 화끈함이 좋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충고하는 주제에 오만 위험한 짓은 혼자 다 하고 다니는 싸이코가 갑자기 피를 철철 흘리며 집에 쳐들어왔을 때도, 독하고 맑은 술은 유용했다.

 

“비밀스러운 AI랑 요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하겠지?”

“내 걱정 해주는 자기는 귀엽지만,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었어.”

“그래. 고작해야 치명상 정도네.”

 

쇼는 빙글빙글 웃는 루트가 짜증나서 루트의 왼팔에 감는 중이던 지혈용 붕대를 부러 더 세게 묶었다. 루트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 나는 당하는 것보단 내가 묶는 게 조금 더 좋은데.”

“루트, 언젠가 니 혀가 다쳐서 오면 내가 정말 예뻐해 줄게.”

“정말, 사민?”

 

닥치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표정이 밝아지는 루트를 보며 쇼는 혀를 쯧 찼다. 쇼는 예고도 없이 투명한 바카디를 루트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루트가 아까보다 더 크게 신음했다.

 

“오늘따라 정말 화끈하네? 혹시 나 기다렸어?”

 

쇼는 대꾸 없이 돌아서서 바카디를 병째로 마셨다. 루트는 세 모금까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쇼가 네 번째로 병을 기울이자, 루트는 피를 많이 흘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루트가 소파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쇼가 다시 루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앉아, 루트.”

“그게 아무리 라이트라지만, 그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다는 것 정도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당장 수혈을 받아야 될 정도로 피를 흘렸으면서 지혈도 안 하고 싸돌아다니는 게 몸에 안 좋다는 것도 말 안 해도 알지.”

“쇼, 지금 화났어?”

 

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쇼는 또 말없이 병을 입에 가져다댔다. 루트는 조용히 앉아 술에 젖은 붕대를 풀고, 어느 정도 지혈이 된 상처를 닦아냈다. 루트가 약을 바른 뒤 거즈를 대고 새 붕대를 어깨부터 감기 시작하자, 쇼는 그새 제법 비운 술병을 내려놓고, 뜨거운 숨을 푹푹 내쉬며 루트 옆으로 와서 붕대를 빼앗았다. 루트 팔에 피를 안 통하게 할 기세로 온 힘을 다해 압박 붕대를 조이는 쇼 탓에 루트는 이를 악물었다.

 

“거즈 가는 거 잊지 말고, 붕대 했다고 팔 휘두르고 다닐 거면 아예 하지 마. 집에서 좀 쉬어.”

“사민, 벌써 취했나봐. 설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쇼는 루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트를 소파에 밀어 눕히고, 셔츠를 잡아 뜯을 기세로 들춰 배에 난 상처를 살폈다. 오늘처럼 쇼가 소독하고 기본 연고만 발라둔 지 일주일 정도 된 상처는 보기 흉하게 아물어 있었다. 쇼는 아직 붕대를 풀 때가 아닌 게 분명한데도 이 상태로 돌아다니는 루트가 못마땅했다.

 

“니가 몸에 바람구멍 내고 다니는 취미가 있다는 건 아주 잘 알지만, 이번엔 진심이야. 네가 죽어버리면, 머신도 핀치도 곤란해져.”

 

쇼의 불퉁한 말에 쇼 아래에 깔린 루트가 피식 웃었다. 쇼는 다음 순간 루트가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그거 나 걱정하는 거 맞지, 자기?”라고 끈적하게 굴거나, “그럼 너는 어떤데? 너도 곤란해?”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루트는 놀랍게도, 쇼와 눈도 못 마주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쇼는 왠지 어지러웠다. 술기운이 조금 도는 것 같았다.

 

“뭐라는 거야, 루트.”

 

쇼는 몸을 굽혀 루트의 입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쇼의 무게 때문인지 루트가 조금 몸을 뒤척였지만, 쇼는 루트의 배와 팔에 난 상처에만 잠깐 눈길을 줬을 뿐, 그대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려 버둥대던 루트가 곧 체념한 목소리로 쇼에게 말했다.

 

“나, 갈만한 집이 없다고.”

“갈 데가 없다고?”

“응.”

“넌 도대체...”

 

쇼의 눈동자에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가, 약한 술냄새가 나는 날숨에 흩어졌다. 쇼는 풀린 눈을 몇 번 깜박이고 그대로 루트의 몸 위에 엎드렸다. 루트는 당황해서 몸을 빼려 했지만 배와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왼팔은 밖으로 빼 둔 쇼의 다정함에 루트는 웃어버렸다.

 

“쇼,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비켜줘. 나야 네 가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자세가 전혀 싫진 않지만, 안 그러던 니가 갑자기 이러니까 나도 좀 무서운걸.”

 

루트의 희롱 섞인 말에도 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루트는 고개만 숙여 쇼의 정수리를 보았다.

 

“쇼..? 진짜 자? 사민?”

 

루트가 가볍게 흔들어 봐도 쇼는 가만히 숨만 쉴 뿐이었다.

 

“유능한 요원이, 술 좀 마셨다고 이렇게 무방비로 자도 되는 거야?”

 

루트가 쇼의 등을 쓸어내리며 허공에 중얼거리자, 루트의 오른쪽 귀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루트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Good Night, Hon.”

 

 

 

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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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트의 손이 쇼를 밀어 다시 침대에 눕혔다. 루트의 손을 쳐내고 몸을 일으키려던 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쇼는 어정쩡하게 누워 천장을 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루트는 쇼가 바닥에 내팽개친 해열패치를 보며 작게 혀를 찼다.

 


 “넌 지금 쉬어야 해.”
 “저 밖의 어느 누가 위험해질지 모르는 상황에..”
 “네가 이 상태로 돌아다니면 네 넘버가 뜰지도 모르지.”
 “....의사는 나야.”
 “말 돌리는 거야, 사민? 의사도 아프면 다른 병원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네.”
 “적어도 니가 하는 병원은 안 갈 거야.”
 “불평 그만해.”

 


 루트는 새 해열패치를 뜯어 쇼의 이마 위에 올리고, 쇼가 침대 헤드에 기대앉는 것을 도왔다. 패치를 문지르며 “애도 아니고..”라고 중얼거리는 쇼에게 루트가 부러 활짝 웃어 보이며 “사실 난 물수건으로 자기 온 몸을 닦아주고 싶었는데 말이야.”라고 하자 쇼가 몸서리치며 얼굴을 엄청나게 구겼다. 루트는 그 표정을 보고 눈썹을 위로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루트는 한숨쉬기 직전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한숨을 뱉지는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런 표정 안 지어도 자기 마음 알아.”

 


 루트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리고 루트는 협탁 위에 놔둔 스프를 들어 한 숟가락을 떠서 쇼에게 내밀었다.

 


 “네가 환자가 아니라고 길길이 날뛰는 동안 먹기 딱 좋게 식은 스프야. 아- 해.”
 “내가 먹을 수 있어.”
 “알고 있지만, 이게 일종의 처벌이라고 생각해봐. 못할 것도 없잖아?”
 “허, 허.”

 


 가자미 입을 하며 삐죽대는 루트를 보고 쇼가 한숨 같은 헛웃음을 지었다. 쇼는 이 정도 아픈 건 아픈 것도 아니라고 계속 투덜대면서도, 열 때문인지, 혹은 침대 위에 기분 좋게 내리쬐는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농담을 던지고는 있지만 코앞에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는 루트 때문인지, 루트가 떠먹여주는 스프를 고분고분 받아먹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쇼는, 루트가 너무 많이 걱정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겨우 감기 가지고 왜 호들갑인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뭐 이 정도로 죽는 것도 아닌데, 얘는 왜 이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걸까.


 

 “루트.”
 “응?”
 “감기 빨리 낫는 법이 있는데, 니 도움이 좀 필요해.”
 “뭔데?”
 “뭐냐면...”

 


 

 쇼가 뭐라고 하든 뭐라도 할 기세로 쇼의 말에 귀 기울이는 루트를 보며, 쇼는 속으로 조금 웃었던 것 같다. 고열 때문인지,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따라 자신을 곧 꺼질 것 같은 촛불처럼 대하는 루트의 태도 때문인지, 쇼는 스스로도 오늘은 참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생각하며 루트의 어깨를 잡아당겨 짧게 입 맞췄다. 열이 올라 충혈된 쇼의 눈과, 놀라서 커진 루트의 눈이 마주쳤다.

 


 “남한테 옮기는 거.”

 

 

 쇼는 씨익 웃으며 말하곤, 어버버 거리는 루트의 손에서 스프 그릇을 빼앗아 후루룩 마셔버렸다. 그리고 “입가에 스프가 묻었으니 입으로 닦아주겠다.”며 달려드는 루트를 쫓아내고, 침대에 누워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혼잣말 했다. 쇼는 밀려오는 나른함에 기분 좋게 낮잠에 빠졌다. 그날 쇼의 꿈속엔 사마리탄도, 머신도 없었고, 루트의 귀에도 흉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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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오인 트친오락관 1빠였숩니다!

 

 

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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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님(트위터 Arendelle_Y4)께서 5/10 케스에 내신 뤁쇼책 <A Daily Life>에 실린 짧은 축전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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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님 루트쇼 개인지 내신 거 정말정말 축하드려요!! 책이 못 나올 거 같다고 울상이셨지만 저는 여사님이 어떻게든 완성하실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 >.<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여러분 여사님한테 리퀘도 많이 주시고 막막 채찍질해 주세요. 제 존잘님 이렇게 존잘이시면서 그림을 자주 안 그리신달찌ㅠ.ㅠ 아래는 축하의 마음을 담은 짧은 루트쇼에요^0^ 뤁쇼행쇼(엄숙

 

 

 

 

비가 오는 풍경 by 얼음

 

  비오는 날은 조금 습하고 축축하고, 그래서 밖에 나가기 꺼려진다는 것 외엔 쇼에게 다른 날들과 똑같은 날 일 뿐이다. 거기에 더해 천둥번개가 쳐도 쇼는 별 감흥이 없었다. 평소보다 약간 더 번쩍거리고 시끄러워서 정신이 없긴 하지만 그래봤자 기상현상 중 하나일 뿐인 것에 싸이코패스가 무슨 특별한 감정을 갖겠는가. 그러나 지금 쇼 옆에서 천둥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고 있는 여자에게는 천둥번개가 기상현상 중 하나로만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30분 전 저녁을 배부르게 먹은 쇼는 소파에 기대 병맥주를 마시며 일 없이 TV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보통 이 시간이면 쇼는 은밀한 산책을 나갔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들과 함께하는 밤마실은, 하루 종일 백화점 매장에서 얌전한 척하느라 좀이 쑤신 쇼의 근육을 풀어주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쇼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 쇼는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집에서 꼼짝없이 무료한 얼굴로 나쵸만 씹고 있었다.
  아까 지나친 재미없는 코미디 프로라도 봐야하나. 기계적으로 채널 버튼을 연타하는 쇼에게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는 이제 배경음처럼 들렸다. 그러다 별안간, 무드등만 켜 놓아서 약간 어두운 방 안을 번쩍이는 번개가 채웠고, 몇 초 뒤 천둥이 쳤다. 쇼는 별 반응 없이 탁자에 발을 올린 자세 그대로 계속 리모컨을 눌러 이 채널 저 채널로 옮겨 다녔다. 두 번째 천둥은 아까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더 큰 소리로 울렸다. 루트가 소리 없이 쇼 방에 들어와 슬쩍 자리 잡은 건 그때쯤이었다. 쇼는 처음엔 루트에게 당장 나가라고 하려 했으나, 곧이어 내리친 세 번째 번개와 세 번째 천둥에 루트의 어깨가 눈에 띄게 파들거리는 것을 보고, 그냥 TV나 계속 보기로 했다.


  그렇게 두 여자는 말없이-간만에 사소한 말다툼도 없이 평화롭게- 게스트들이 오버해서 웃는 연기를 하는 코미디 쇼를 보았다. 빗소리가 이제 좀 잦아드나 싶더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다시금 굵은 빗발이 후두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평화로웠다. 괜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라는 수식어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일깨워 주려는 듯 연달아 울리는 천둥소리에 루트가 쇼 품을 파고들었고, 고막을 잡고 흔드는 것 같은 천둥이 끝날 쯤에 루트는 쇼에게 거의 안겨있었다. 천둥이 멎은 뒤 정신을 차린 루트가 쇼의 품에서 살짝 고개를 들었고, 두 번째 병맥주를 마시고 있던 쇼는 맥주가 아직 남은 유리병을 옆 탁자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미안. 좀 놀라서.”


  짤막하게 사과하며 떨어지는 루트를 보며 쇼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루트는 작은 한숨을 뱉으며, 쇼가 방문을 가리키며 이제 나가는 게 좋겠다고 말할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쇼는 루트의 예상과 달리, 문 반대쪽의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더 야무지게 여미고 다시 루트 곁으로 돌아와 맥주를 계속 마셨다.


  “비와서 추우니까, 여기서 같이 자던가. 난방비도 아낄 겸.”


  루트가 살짝 웃으며 고맙다고 했고, 쇼는 너 좋으라고 그러는 게 아니고 내가 추울까봐 그러는 거라고 쏘아붙였다. 루트는 툴툴대는 쇼의 팔을 안고 쇼에게 기대며, “그래 그걸로 충분해.”라며 웃었다. 쇼는 팔을 감아오는 루트의 손에 파드득 놀라 루트를 밀쳤다가, 루트의 처진 눈썹을 보고 머쓱하게 일어나 담요를 가져왔다. 다 안다는 투로 미소 짓는 루트에게 그렇게 웃지 말라고 틱틱대면서도 쇼는 담요를 꽁꽁 여며주며, “이걸로도 충분 할 거야.”라고 했다.


  쇼에게 그날 밤 비가 오는 풍경은 재밌는 척 연기하는 유명인들의 웃음소리와, TV소리를 덮는 빗소리와, 가끔씩 그런 빗소리마저 덮는 천둥소리, 자신에게 기대 반쯤 누워서 천둥이 울릴 때마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루트의 온기, 그리고 루트가 자신에게 기대기 전에 냉장고에서 꺼내오지 못해 마시지 못한 세 번째 맥주로 기억되고 있다.


-fin.

 

 

 

 

 

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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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x루트 자공자수 주의*

텔님의 리퀘: 페링이요....!ㅠㅠ 튜링쌤이 간식 사왔는데 로빈이 막 투정부리고 그러면서도 먹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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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있었어요, 로빈?”


 로빈 패로우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긴 독방 안에서, 침대 다리에, 이중으로 묶여서도 ‘잘’ 있을 수 있다면, 잘 있었던 거겠죠, 미스 튜링.”


 패로우가 빈정거리며 침대에 앉은 채 오른쪽 다리를 허공에 찼다가 내려놓자, 패로우의 다리와 침대 다리를 연결하고 있는 사슬이 바닥에 부딪혀 철그렁 소리를 냈다. 캐롤라인 튜링의 눈썹 끝이 약간 아래로 처졌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은.. 음.. 당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사라질 것 같아서.”


 튜링이 우물우물 사과하자 패로우가 작게 실소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죠. 그리고 그녀가 그걸 원한다면, 그 이유는 당신이 내게 이런 짓을 해서일 테고.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에요? 왜 이러는 거예요?”
 “그..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기분 나쁘고, 아팠다면 사과할 게요.”
 “사과는 하지만 그래도 풀어줄 생각은 없겠죠?”


 튜링은 패로우의 물음에 난처하게 웃으며 들고 온 작은 쇼핑백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패로우의 나른한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튜링의 목소리는 약간 긴장한 듯 떨렸다. 패로우는 튜링이 의자에 겉옷을 벗어둔 뒤 책상을 빙 돌아 자신 앞으로 오는 것을 눈으로 쫓았다. 패로우의 시선에 튜링은 눈을 살짝 내리깔며, 팔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께를 슬쩍 문질렀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튜링이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았다가, 밖으로 삐죽 내밀었다. 그런 튜링을 지켜보던 패로우가 침묵을 깼다.


 “당장 풀어주는 건 바라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 핸드폰은 돌려 줬으면 해요. 그녀는 나와 그녀의 연결이 끊기는 걸 달가워하지 않거든요.”
 “아.. 로빈,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요. 방금 당신이 말한 그게, 내가 당신을 조금 거칠게 가둬둔 이유에요. 나는 당신과 당신이 듣는다는 그 목소리들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어요. 당신과 내가 깊은 대화를,”


 튜링의 말을 끊고 패로우가 코웃음 쳤다.


 “하, 예전에 닥터 카마이클도 그렇게 말했었죠. 나와 그녀를 떨어트려 놓아야겠다고. 그렇지만 그는 적어도 날 묶어두라고 지시한 적은 없었어요, 미스 튜링. 그리고 난 당신과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대화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리고 닥터 카마이클은 환자들을 통제할 경비원들이 따로 있는 큰 병동에서 당신을 진료했잖아요. 반면에 난 혼자 일해요.”
 “그래서, 당신은 당신 환자들에게 언제나 이런 특별 치료를 해요? 환자를- 컨트롤하기 위해? 참 고상한 취향이네요.”
 “내가 당신을 특별 대우하는 것 같아요? 정말 그렇다면 그건 당신이 특별해서겠죠.”


 패로우의 비아냥거림에 튜링은 오히려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패로우는 여전히 나른하게 침대 헤드에 기대서, 그러나 묘하게 번뜩이는 눈동자로 튜링을 노려보았다. 튜링은 이번에는 패로우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자신이 들고 온 쇼핑백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우린 분명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을 위해서 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사왔어요.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질,”
 “당신이 준 라떼를 먹고 지금 이 꼴이 된 걸 내가 벌써 잊었을 거 같아요?”


 패로우가 튜링의 말을 자르고 쏘아붙였다. 튜링이 다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신용하지 못하는군요.”
 “제정신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걸요.”
 “그건 당신 진료 기록에는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쓰여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인가요?”


 튜링은 두 번이나 자신의 말을 끊은 패로우를 정중한 말투로 비꼬았다. 그러나 곧 그것이 유치한 처사였다고 생각하며, 패로우를 위해 사온 조각 케이크 포장을 풀었다. 들고 오는 동안 좀 식었지만, 그래도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베이커리의 라바 케이크니까 분명 맛있을 거예요. 이리 와 봐요. 어머, 생각보다 아직 따뜻하네요. 케이크 안의 라바가 아직 다 굳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오븐이나 렌지가 있었으면 좀 데우는 건데, 그건 미처 마련을 못 했으니까...


 튜링은 부산스럽게 케이크를 일회용 접시에 얹고, 마찬가지로 일회용 포크 하나를 꺼내며 조잘거렸다. 패로우는 튜링이 뭐라고 떠들든 말든 계속 못 믿겠다는 눈초리로 튜링이 하는 양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튜링은 그런 패로우를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로빈.”
 “아까도 말했지만 말이에요, 미스 튜링, 제정신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이렇게 갇혀 있다면.”


 튜링은 말없이 케이크를 담은 접시를 들고 패로우에게 다가갔다. 패로우가 튜링의 얼굴과 케이크 접시에 번갈아 시선을 줬다. 여전히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는 패로우 옆에 튜링이 가까이 붙어 앉았다. 침대가 작게 출렁였다. 패로우는 달콤한 초콜릿 냄새를 맡았다.


 패로우가 무의식적으로 초콜릿 냄새가 나는 케이크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튜링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 순간 튜링이 패로우의 어깨를 밀어 침대 헤드에 누르고 속삭였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예상 외로 강한 힘에 패로우가 당황하는 동안 튜링의 다른 손이 초코 케이크 일부를 패로우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패로우가 그것을 뱉지 못하도록 튜링의 입이 그 위에 덮였다. 패로우는 난폭한 키스에 최선을 다해 반항했지만 케이크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케이크는 접시 째로 바닥에 떨어져 뭉개졌다. 잠시 뒤 튜링이 패로우에게서 떨어지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젠장, 나한테 뭘 먹인..”


 패로우가 숨을 헐떡였다. 튜링이 살풋 미소 지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네요. 아니면 ‘그들’이 알려주기라도 했어요?”
 “‘그들’이 아니고 ‘그녀’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그리고 당신이 방금 나한테 약을 또 먹였다는 건 그녀 도움이 없어도 알 수 있어.”
 “미안해요. 이해해줘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당신이 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잖아요. 걱정은 말아요. 이번 약은 재우는 약이 아니고 그냥... 나한테 좀 더 고분고분해지게 만드는 약일뿐이니까.”


 숨을 뱉을 때마다 패로우의 몸은 뜨거워졌다. 튜링은 자신의 손에 끈적하게 묻은 초콜릿을 보고 그것을 패로우의 입에 물렸다. 패로우의 의지와 상관없는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튜링이 패로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얘기했죠? 즐거운 시간이 될 거라고.”
 “하읏, 하아..”


 귓가에 스치는 숨결에도 신음하며 몸을 뒤트는 패로우를 보며 튜링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닥에 짓이겨진 초콜릿 라바 케이크가 녹아 뭉근하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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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 넹.. 얀데레튜링 사랑합니다..(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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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x루트 자공자수 주의*

 

 

 

 

 

 

 

 

 

 

 

 

 

 

 뉴욕 맨하탄 펄 가에 작은 사무실을 가진 심리상담사 캐롤라인 튜링은 매일 아침저녁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더럽고 냄새나고 좁기로 유명한 바로 그 뉴욕 맨하탄의 지하철로. 그곳에서 튜링은 별별 꼴을 다 보았다. 노숙자들이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대낮부터 떨리는 손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다거나, 뉴욕 경찰도 출동을 포기한 좁아터진 통로에서 성추행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거나, 고양이만한 쥐 시체가 선로에 쌓여 잠시 운행이 중단된다거나, 제대로 터지지 않는 휴대전화 때문에 화가 나서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취객과 같은 칸에 타게 된다거나, 분명 천장 위로 몇 겹의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있을 지하철 플랫폼에 비가 들이친다거나, 고장난지 최소 6개월은 된 것 같은 환풍구에 둥지를 튼 비둘기 떼들이 정차한 열차에 용변폭격을 퍼붓는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악명 높은 뉴욕 지하철에는 외계인이 살고 있다는 괴담도 돌아다닐 정도니, 그 지하철을 매일 두 번씩 타는 튜링은 출퇴근길에 무엇을 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혹은 놀라지 않은 척 평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겪은 일에 대해서 튜링은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최근 고객 중 하나인 프레드릭슨 씨가 상담 내용이 유출된 것 같다며 예민하게 굴고, 또 다른 고객인 백스터 씨의 검찰 출두로 튜링에게까지 연락이 와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 잠을 좀 설치긴 했지만, 헛것을 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튜링은 믿기지 않게도 지하철에서 자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보았다.


 튜링은 여느 때처럼 단정한 옷에 얇은 코트를 걸치고 지하철 문 근처에 서서 사무실에 어떤 차를 새로 들여놓는 게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케지언 씨가 홍차를 선물로 주시긴 했지만 그걸 사무실에 둬도 괜찮은 걸까? 괜한 오해의 소지가 되는 건 아니겠지. 일상적인 고민을 하던 튜링은 급작스럽게 덜컹이는 지하철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옆의 바를 잡고 몸을 다시 세웠다. 작은 안도의 숨을 쉬며 몸을 바로 하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순간, 튜링은 좌석 건너편에서 자신처럼 열차 손잡이를 잡고 자신과 비슷한 오피스룩을 입고 헤어스타일만 약간 다른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여자도 튜링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헉하고 숨을 들이쉬며 몸을 돌려버린 튜링은 왠지 모를 두려움에 다시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마침 튜링이 탄 열차는 그녀가 내려야 하는 풀턴 역에 도착했고, 튜링은 가늘게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전철에서 내렸다.

 


 그녀는 하루 종일 아침의 여자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스스로에게 집에서의 가벼운 족욕과 평소보다 조금 빠른 퇴근을 처방했다. 안정되지 못한 마음상태로는 내담자들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 뿐 아니라, 어차피 집에 돌아갈 때도 같은 지하철을 타서 아침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 지하철 밖으로 나왔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밝은, 조금이라도 더 이른 시간인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튜링은 저녁 이후 시간으로 잡혀있는 두 명의 내담 예정자들에게 개인적인 일로 오늘 저녁 상담을 미뤄야 할 것 같다고, 이런 것으로 보상이 될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때 무보수로 추가 상담을 해드리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튜링은 자신의 예상대로 지하철에 타자마자 아침에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감각을 뚜렷하게 떠올렸다. 운 나쁘게도 튜링은 사람으로 가득 찬 퇴근 열차에 올랐고, 앞에 선 사람들의 등과 어깨, 핸드백 때문에 시야가 막혀있었기 때문에 불안감이 상승해서 어디선가 아침의 여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고, 튜링은 별 다른 일 없이 지하철에서 내렸다. 튜링은 집에 도착해서 계획을 약간 수정해 족욕 대신 느긋하게 반신욕을 즐겼다. 튜링은 욕조에 기대 마른 체리가 들어간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아침의 일은 그저 자신의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착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튜링은 다음날 출근 전철에서,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앞사람에게 들릴까봐 지하철 문에 바짝 붙어 서있어야 했다. 여느 때처럼 문 근처에 자리 잡고 서서 한 손은 핸드백 위에 살짝 얹고 있었다. 웨스트 포 스트리트 역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튜링은 살짝 뒤로 물러났고, 옆 사람과 더 바짝 붙어 서있게 되었다. 다음 역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내렸다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 올라탔고, 이후 덜컹거린 열차 탓에 튜링은 자신이 내리는 역에 도착할 때까진 열리지 않을 이쪽 편 전철 문과, 튜링의 몸 앞을 가로질러 지하철 안전봉을 잡은 옆 사람의 팔 사이에 갇혀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사람이 남자였다면 좀 더 긴장했겠지만, 여자였기 때문에 튜링은 가만히 지하철 문에 등을 대고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옆 사람의 구두가 상당히 자기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음, 굽은 내가 신는 것보다 약간 더 높아 보이지만 저런 펌프스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네. 그리고 연한 갈색의 H형 스커트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스커트와 같은 색의 재킷도, 재킷 안에 입은 은은한 와인색 셔츠도 주름이 예쁘게 잡혀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여자의 아래에서부터 위로 시선을 옮기던 튜링은, 셔츠 깃의 작은 브로치마저도 귀엽고 갖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상대방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지만, 무례하게 여성의 몸을 훑어본 꼴이라는 걸 깨달은 튜링은 얼른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옷 스타일이 정말 좋아서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라고 하려고 했다. 눈이 마주친 상대가 어제 본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튜링은 자신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객차가 다시 한 번 덜컹이며 튜링과 여자의 간격이 좁아졌다. 튜링은 여자에게 자신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하철 문에 바짝 붙어 섰다. 여자는 튜링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고, 사과의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친 튜링은 그저 그대로 그녀의 시선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열차가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안전봉을 잡은 여자의 손과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고, 여자에게서는 희미하게 샴푸 냄새가 났다. 그녀가 자신이 만들어 낸 환영이나, 괴담 속의 도플갱어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자신과 좀 많이 닮았을 뿐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튜링은 어제만큼 이 여자가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튜링을 빤히 쳐다보는 여자의 눈빛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최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방황하던 튜링의 눈에, 숨 쉴 때마다 차분하게 오르내리는 여자의 가슴팍이 보였다.


 “이런 거 좋아하나 봐요.”
 “아, 아니에요. 이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튜링은 여자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여자의 가슴팍에서 시선을 거두고 변명을 주워섬기려다 여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제 브로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무슨 ‘다른 뜻’이요?”


 여자는 튜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몸을 살짝 틀었다. 그 덕에 튜링은 몸을 조금 곧추세워야 했고, 이제 튜링은 여자에게 반쯤 안긴 자세로 서있었다.


 “그, 그쪽이 입은 스타일이 제 취향이어서 그런 거긴 한데,”
 “그래요?”


 여자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넘기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있어서 더운 모양인지, 그저 머리카락이 거슬렸을 뿐인지는 모르지만, 튜링의 눈에는 그 몸짓이 나른하고 우아해 보였다. 튜링이 여자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사이 여자가 혀를 작게 내어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쳐다볼 정도로 당신 취향이에요?”


 튜링은 자신과 비슷하지만 더 나른하고, 은근한 목소리에 홀리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여자가 튜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는 바람에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튜링을 품에서 놔주며 여자가 작게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기대고 서있는 문이 열려서.”


 튜링은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그곳이 풀턴 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뛰어 내렸다. 그리고 튜링은 그날도 전날처럼 내담자들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튜링은 오늘도 지하철의 여자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튜링은 여자와 다시 마주친다면 이름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은 뒤 튜링은 진지하게, 오늘은 저녁 상담이 없으니 오후 상담도 취소하고 집에 가서 마음을 다스려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하필 오후의 마지막 내담자는 어제 저녁에 일방적으로 상담 취소 통보를 받은 그 사람이었고, 튜링은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명성과 내담자에 대한 신의-이미 약간 금이 갔을 지도 모르는-를 지키기 위해 오후까지만 상담을 계속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예민하고 섬세한 상태로 튜링의 앞에 앉고, 자신이 그녀 앞에서 편해져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튜링은 그들의 그러한-일반적인 속성을 알고 있었고, 평소에는 그게 거슬리지 않았다. 오늘이라고 해서 그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튜링은 오늘따라 내담자들의 편집증적인 의심과 신경질적인 말투를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두세 명의 내담자들이 왔다가고, 튜링은 목을 살짝 긁고 등을 쭉 펴며 잠깐 스트레칭을 했다. 피곤하니까 페퍼민트티라도 마셔볼까 하고 걸어가는 튜링의 구두소리 위로 다음 내담자의 노크가 묵직하게 울렸다. 튜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잠시 입을 크게 벌려 턱과 입을 푼 뒤 미소를 띠고 “들어오세요!”하고 외쳤다. 그리고 곧 튜링의 얼굴에 진짜 미소가 퍼졌다.


 “오.. 안녕하세요, 튜링 선생님. 당신일 줄은 몰랐네요.”
 “저도 몰랐어요, 어..”
 “아, 미스 메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미스 메이.”
 “이거 참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튜링의 마지막 내담자는 지하철에서 본 튜링을 닮은 그 여자였고, 튜링은 어제부터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일하는 곳도, 심지어 그녀의 상사 이름도 알고 있었다. 튜링은 내담자의 뒤를 캐는 타입의 상담사는 아니었으나, 이번 내담자의 상사는 정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름을 알만한 국내의 장관이었고, 내담자는 그의 수석비서였다. 튜링은 갑자기 강한 갈증을 느끼고, 자신이 차를 마시려던 중임을 깨달았다.


 “지금 차를 내릴까 했는데, 혹시 선호하시는 차 있으세요? 홍차도 몇 종류 있고, 허브티는 카모마일이랑 자스민, 라벤더랑, 또..”
 “선생님.”
 “네?”


 약간 허둥대는 느낌으로 상담실에 비치된 차 종류를 읊던 튜링의 말을 메이가 끊었다. 문 앞에 서있는 메이를 보고 튜링은 아-하고 작게 탄식했다.


 “제 정신 좀 봐, 들어와서 앉으시라고도 안 하고. 여기,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튜링은 메이에게 자리를 권하며 손바닥을 교차시켜 마주 대고 비비듯이 눌렀다. 튜링의 손바닥은 땀이 나서 약간 축축했다.


 “아뇨 그게 아니고, 어제 상담 취소하신 것 말이에요.”
 “아, 아 그.. 어제 제가 정신없는 일이 있었거든요. 정말 죄송해요. 첫 방문 전이시라 개인 번호도 몰라서 메일만 보냈는데, 그게 정말... 정말 죄송해요.”


 메이의 의문은 정당했다. 튜링은 마음이 졸았다. 그렇다고 “그건 당신 때문이었어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튜링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메이는 그런 튜링을 보고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음, 말로 하는 사과보다, 제게 주시기로 한 스페어 상담 시간에 대해.. 제가 약간의 추가 요구를 해도 괜찮을까요?”
 “어떤 요구요?”
 “우리가 상담실이 아닌 곳에서 만난다거나..?”


 메이가 아침의 지하철에서처럼 몸을 살짝 틀며 고개를 우아하게 옆으로 기울였다. 아침에는 머리카락을 치우기 위한 동작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냥 습관인 모양이었다. 메이 본인의 예쁜 목을 돋보이게 하는 습관. 튜링이 말없이 메이의 목 언저리만 바라보자 메이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요. 여기서 세 블럭 쯤 떨어진 클리프가에 적당한 식당이 있거든요.”


 메이의 말에 튜링이 불현듯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상담자는 내담자와 사적인 만남을 가져선 안 돼요. 특히 아직 상담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경우에는..”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맞아요. 우린 아직 상담을 시작하지 않았죠.”
 “네, 그러니까 메이씨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러니까 제 제안은 상담 대신 데이트를 하자는 거였는데.”
 “예?”
 “클리프가에, 라이언 맥과이어라는 사람의 가겐데, 너무 비싸지도 않고, 채식 메뉴도 있고, 가볍게 술도 한 잔 할 수 있어서 첫 데이트에 ‘적당한’ 식당이 있어요.”


 튜링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메이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사실 나도 당신 스타일이 취향이거든요.”


 메이가 웃었고, 튜링은 자신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날 튜링의 마지막 상담은 결국 취소되었다.

 

 

 

 

 

 

 

 

 

 

 


 +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나 뚫어지게 쳐다봤던 거,”
 “응?”
 “지하철에서요.”
 “아아.”
 “그거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거예요?”
 “아니요? 그냥 나랑 똑 닮은 사람이 있는 게 신기해서.”
 “아.. 아 그렇구나...”
 “거짓말이에요.”
 “예?”
 “예뻐서 쳐다본 거 맞아요. 그래서 상담실에서 보자마자 데이트 신청했던 거고.”
 “메이...”
 “앗 혹시 지금 감동했어요?”
 “그 말 엄청 나르시즘처럼 들린다구요.”
 “튜링 선생님.”
 “네?”
 “저는 선생님이 상담사처럼 굴 때가 두 번째로 섹시해 보여요.”
 메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물론 첫 번째는 침대 위에 있을 때. 바로 지금처럼.”
 튜링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마주 웃었다.

 

 

 

 

 

 

 

 

 

 

 

 

 

 

=

판엠님 리퀘, 메이튜링 만원철에서 같이 낑기는데 메이가 튜링 뚫어져라 쳐다봐서 튜링이 겁먹는거..입니다.

ㅇ..어쩌다 이렇게 길어졌죠...?

제 안의 메이는 싸이코가 아니라서.. 메이튜링이 막 훈훈하고.. 급달달해진...

헿....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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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휘님의 리퀘 - 커플링 루트쇼, 키워드 고립.

 

생각보다 길어져서 블로그에 올려여. 루트쇼 진짜 손톱만큼 나오지만... 헤헤.. 휘님러뷰..S2

 

 

 

 

 

 

 

 

 

 

 

 

-

 

양서류란, 물과 육지 둘 다에서 살 수 있는 동물로, 대표적으로 개구리가 있어요. 우리 교실 수조에 오늘 선생님이 넣어 놓은 게 올챙인데, 올챙이가 커서 개구리가 되는 거예요. 우와, 우와, 짱 쪼끄매. 올챙이가 어딨어? 야 좀 비켜봐. 저거 안 보이냐? 저기 많잖아. 으엑 징그러. 선생님 이게 어떻게 개구리가 돼요? 글쎄, 친구들이 올챙이를 잘 보살펴주고 지켜보면, 어떻게 개구리가 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개구리가 될 때까지 친구들이 잘 키울 수 있죠? 네-!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지 않아도 되는 실습수업 시간이라, 한껏 들떠 왁자지껄한 어린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또래보다 더 침착하고,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어린 사민 쇼는 먼 곳에서 아이들이 에워싸고 있는 수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쇼가 알고 있는 사전적 의미의 양서류란, 동물계의 척삭동물문 양서강의 일상적 총칭으로, 무족영원목, 도롱뇽목, 개구리목을 포함하는 생물 분류학상의 용어이다. 그것은 어류와 파충류의 중간적 위치에 해당하며, 진화학적으로 동물의 육상진출에 매우 중요한 계통 분류이다. 하, 계통학적으로 중요하다고? 게다가 물과 육지 모두에서 살 수 있다고? 쇼는 코웃음 쳤다. 개구리는 물과 육지 돌 다에서 살 수 있는 생물이 아니다. 정확히는 물과 육지가 모두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그저 육지 짐승이 되는 것에 실패한 불쌍한 미물일 뿐이다.

 

쉬는 시간 종이 치고, 아이들은 얼마간 더 올챙이 수조 근처에서 웃고 떠들다가 교실과 복도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웃고 소리 지르며 내달렸다. 따사로운 햇살이 아이들의 교실에 들어와, 아이들이 앞다투어 던져둔 먹이를 오물거리며 평화롭게 헤엄치는 올챙이들의 수조를 적당한 온도로 따뜻하게 데웠다. 쇼는 그 햇살 한 자락을 전에도 본 적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틈에 쇼는 교실 뒤편 한 구석의 개구리 수조 앞에 서 있었다. 쇼는 생각했다. 교과과정을 만드는 사람들은, 교실에 우글거리는 서른 몇 개의 미숙한 어린 머리통들로도 모자라, 같은 공간에 그들보다 더 작고 어리석은 올챙이 스무 마리를 밀어 넣으면, 이 작은 꼬마 멍청이들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걸까? 개구리 수조에는 뿌옇게 이끼가 끼어 있었다. 올챙이들을 풀고 2주 동안 아무도 물을 안 갈아준 탓이었다. 수조 위의 올챙이 밥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 중에 올챙이들이 먹은 건 반이 될까말까고, 나머지는 전부 어린 애들의 장난으로, 혹은 실수로 공중에 흩뿌려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자의로 움직일 수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수조 안에서만 살아온, 그래서 그곳이 세계의 전부일 올챙이들은 이제 거의 다 뒷다리를 가지고 있었고, 몇 놈은 완전한 앞다리까지 가지고 있어서 제법 개구리 태가 났다. 그리고 그 때부터 그들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개구리가 된 올챙이들은 애석하게도, 반드시 일정량의 폐호흡을 해야만 했다. 교실의 그 누구도-심지어 선생님조차- 수조에 올챙이들이 기어 올라갈만한 경사의 넓고 평평한 돌을 놓아둘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구리가 된 올챙이들은 호흡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올챙이인 것들도, 따뜻한 햇살 덕에 수조를 덮을 정도로 자란 녹조 때문에 숨 쉬는 게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올챙이들은 자신들에게 점점 가혹해지는 그 작은 세계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쇼는 알 수 없었다. 쇼는 사실, 자신과 똑같은 것을 먹고, 보고, 듣고, 배우는 다른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쇼는, 조금이라도 더 수면에 가까운 곳에 닿겠다고 서로의 머리를 짓밟고 있는, 그리고 저런 발악에도 영영 수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작은 세계 안에서 곧 생을 마감할 올챙이와 개구리들의 생각 따위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수조가 너무 더럽고, 개구리가 징그럽게 몸을 부풀렸기 때문에 수조를 외면했다. 남자아이들의 일부는 개구리들이 서로 싸우면서 아등바등 대는 게 탈출하려는 것이라 생각해 수조 뚜껑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놓았고, 다른 일부는 선생님 몰래 개구리를 꺼내서 여자애들에게 던지려다 걸려 반성문을 썼다. 그들은 왜 개구리들이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지는 몰랐다. 사실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쇼만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이 왜 그러는지 알았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그러나 쇼는 개구리 수조에 개구리들이 밟고 올라설만한 돌이나 받침대를 넣어주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쇼는 물에서 평화롭게 살던 올챙이들이, 생존에 육지가 필수 요소가 되는 개구리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떤 것을 직감했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일어날 변화를, 언젠가 반드시 마주할 곤란을, 피할 수 없을 장애물을.

쇼는 개구리가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냥 평생 아가미로 호흡하면 안 되는 것이었을까? 스스로의 꼬리지느러미를 삭히고 폐호흡을 하는 고통을 꼭 견뎌야만 하는 걸까?

땅만으로도, 물만으로도 살지 못하는 개구리가 쇼에게는 효율적이지 못한 생애주기를 가진 생물이라고 느껴졌고, 쇼가 좀 더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면, 자신이 느낀 그것에 연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쇼는 연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쇼는 버르작대는 개구리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수조를 밀어 창밖으로 떨어트려 버렸다. 쇼의 교실은 2층이었고, 다행히 그 창문 밑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으나 개구리들은 낙하 충격과 깨진 유리 파편 사이에서 반은 즉사하고 반은 풀숲에서 이리저리 튀어 다니다가 곧 말라 죽었으며, 쇼는 학교에 어머니를 모셔오고, 교장선생님과 1대 1 면담을 했으며, 이후 4주 간 나머지 공부를 하는 벌을 받았다.

 

교장과의 면담에서, “왜 그랬니?”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 교장에게 쇼는 건조한 목소리로 “개구리들은 어차피 죽을 거였어요.”라고 했고, 교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그게 그들이 너의 폭력으로 죽었어야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단다.”라고 했다. 쇼는 다시 “그들은 이미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어요.”라고 했고, 교장은 전혀 화나지 않은 목소리로 “그렇지만 너는 그 폭력을 끝낼 폭력적이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었잖니.”라고 했다. 쇼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 무슨 말을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라는 걸 깨닫고 그냥 입을 다물었고, 교장은 그저 인자하게 웃으며 이제 나가봐도 좋다고 했다.

 

 

 

나머지 공부를 하고 노을이 내린 교정을 걷던 쇼의 발걸음이, 개구리 수조가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엄마는 이 사건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쇼는 발끝을 톡톡 몇 번 바닥에 내리치고,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쇼는 자신의 어깨에 닿아 부서지는 노을에도 무게가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가, 주린 배를 한시라도 빨리 채우기 위해 집까지 뛰어갔다. 쇼가 집에 도착했을 때 식탁에는 방금 만든 팬케이크가 있었고, 노을은 집 안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었다. 쇼의 엄마가 나갈 채비를 하며 쇼를 돌봐줄 베이비 시터와 통화하는 동안 쇼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점점 붉어지는 햇살 속에 앉아 시럽 뿌린 팬케이크를 전부 먹어 치웠다. 쇼는 왠지, 이 햇살도 역시 전에 언제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쇼는 잠에서 깼다. 어린 시절의 꿈을 꾸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으나, 꾸고 나면 항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악몽 아닌 악몽을 꾼 뒤에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입으로 몰아쉬었는데, 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쇼의 마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쇼의 폐는 크게 부풀어 구강을 통해 많은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다시 입을 통해 날숨을 조금씩 끊어 내뱉었다. 폐포를 통과하기 전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함유한 공기가, 그날 교장실에서 다 하지 못한 말들과 함께 쇼의 목 언저리에 맴돌았다.

 

마담, 제게 별로 어울리지 않는 질문처럼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저는 궁금해요. 개구리는 왜 육지로 올라오려고 하는 걸까요? 축축한 연못 수면 아래에서 원하는 대로 아무렇게나 헤엄치며 살던 올챙이는 왜 물 위로 올라와 딱딱한 땅을 밟고, 수중보다 배는 무거운 중력을 이기며 튀어 다니려 하는 걸까요? 한꺼번에 더 많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포슬포슬하고 따뜻한 흙 사이를 누비는 삶이, 수중에서 미꾸라지와 물방개에게 노려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지상의 새들에게까지 먹이가 되는 위험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나요? 최초의 개구리는 차가운 물속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어요. 그 어리석은 시도는 스스로를 물에서도, 육지에서도 평안할 수 없게 만들었을 뿐이에요. 그 덕에 개구들은 길지 않은 일생동안 음습한 연못가에서 따사로운 해가 비출 날만 손꼽으며, 자신이 태어난 좁은 웅덩이에서 사방 5미터도 벗어나지 못하는 생을....

 

“나쁜 꿈이라도 꿨나봐, 사민.”

 

쇼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속도보다 빠르게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베게 밑에 있던 스페어 총을 겨눴다.

 

“방금 좀 숨을 몰아쉬던데.”

 

그러나 상대는 쇼의 권총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다가와 쇼에게 우유를 한 잔 건넸을 뿐이었다.

 

“루트.”

 

쇼는 총을 거두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우유를 받았다. 약 같은 건 단 한 방울도 안 섞었으니까 걱정 말아, 사민. 쇼는 주문을 걸 듯 나직하게 말하는 루트를 노려보며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어딘가에서 사온 것인지, 테이크아웃 잔에 담긴 우유에는 부드러운 거품이 얹혀 있었고, 아직 따뜻했다. 쇼의 몸에 온기가 퍼졌다.

 

“머신이 또 나한테 스턴건을 쏴서 데리고 오라고하기라도 했나보지?”

 

쇼의 불퉁한 말에 루트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Unfortunately, not today. 그냥 이 근처를 지나가는데 그녀가 네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대서.”

 

쇼는 우유를 마시며 루트의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갑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루트 때문에 우유 거품에 코를 박았다.

 

“아 젠장, 루트!”

“개구리는,”

 

적어도 이 순간에는 쇼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단어 하나가 루트의 성대를 울렸다. 쇼의 폐는 다시금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고, 목과 어깨를 연결하는 견갑거근과, 어깨 위쪽의 상승모근이 수축했다.

 

“개구리는 단지 개구리의 삶에 충실할 뿐이야. 자유로워 보이진 않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고립된 것도 아니지.”

 

루트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루트의 말에 쇼의 어깨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별, 머신이 그런 것도,”

 

알려 주냐고 물으려는 쇼의 코끝에 루트의 입술이 빠르게 닿았다 떨어졌다. 우유거품이 쇼의 콧등에서 루트의 입술로 옮겨갔다. 루트가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사민. 누구에게나 온기는 필요해.”

 

쇼가 얼굴을 구기며 소매로 코끝을 닦는 사이, 루트는 유유히 쇼에게서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건 머신의 말이냐고 네가 하는 말이냐고 쏘아붙이는 쇼에게 루트는 춤추듯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며 “Nighty Night, sweetie.”라고 말하더니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루트는 재주 좋게 열쇠도 없이 밖에서 문을 잠그고 뚜벅뚜벅 복도를 울리며 걸었다. 쇼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한껏 여유 부리는 루트를 쫓아가려면 쫓아갈 수 있었지만, 그냥 그대로 침대에 앉아 루트가 사다준 우유를 끝까지 비우고, 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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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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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진단에서 본 문장으로 쇼루트쇼 짧은 글. 
쇼 시점.
시즌4 스포가 있을 지도 모름.
5ㅌr도 있을지 모름;-;

"내가 사라져도 넌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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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는 자주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사라져도 넌 괜찮을 거야, 사민."

언제라도 사라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언젠가 일어날 자신의 부재를 적응시키려는 듯, 루트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렇게 말했다.

"내가 없어져도 변하는 건 없을 거야."

그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루트는 그 전부터도 확실한 여자였지만, 머신의 수족이 된 후에는 더더욱 틀리는 법이 없었다. 루트의 그 말 그대로, 루트가 사라져도 나는 평소처럼 살아갈 것이다. 평소처럼,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섹스하고 싶으면 나가서 적당한 놈을 꼬시고, 가끔 자존감을 채워줄 남모를 선행을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는 시간에는 지루해 하면서, 내 삶은 그렇게 살아질 것이다.
사실 루트 뿐만이 아니라 그 누가 사라져도, 심지어 지구가 멸망한대도, 나는 내가 살던 대로 살아갈 것이다.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슬퍼하는 법도, 안타까워하는 법도, 그리워하는 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게 과거란 회상하는 것일 뿐, 추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된 지금에서는, 하릴없이 갇혀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다 보면, 너무나, 너무나 지루한 나머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루트, 너는 어떨까? 네가 사라져도 나는 괜찮은데, 루트 너는, 어떨까.

너는 지금 어때? 괜찮아,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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