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쇼] 술 (퍼오인전력60분)
쇼는 독한 술을 좋아했다. 도수가 높고 맑을수록 좋았다. 목으로 채 넘기기도 전부터 알콜이 증발하는 것 같은 그 독한 느낌과, 화끈함이 좋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충고하는 주제에 오만 위험한 짓은 혼자 다 하고 다니는 싸이코가 갑자기 피를 철철 흘리며 집에 쳐들어왔을 때도, 독하고 맑은 술은 유용했다.
“비밀스러운 AI랑 요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하겠지?”
“내 걱정 해주는 자기는 귀엽지만,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었어.”
“그래. 고작해야 치명상 정도네.”
쇼는 빙글빙글 웃는 루트가 짜증나서 루트의 왼팔에 감는 중이던 지혈용 붕대를 부러 더 세게 묶었다. 루트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 나는 당하는 것보단 내가 묶는 게 조금 더 좋은데.”
“루트, 언젠가 니 혀가 다쳐서 오면 내가 정말 예뻐해 줄게.”
“정말, 사민?”
닥치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표정이 밝아지는 루트를 보며 쇼는 혀를 쯧 찼다. 쇼는 예고도 없이 투명한 바카디를 루트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루트가 아까보다 더 크게 신음했다.
“오늘따라 정말 화끈하네? 혹시 나 기다렸어?”
쇼는 대꾸 없이 돌아서서 바카디를 병째로 마셨다. 루트는 세 모금까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쇼가 네 번째로 병을 기울이자, 루트는 피를 많이 흘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루트가 소파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쇼가 다시 루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앉아, 루트.”
“그게 아무리 라이트라지만, 그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다는 것 정도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당장 수혈을 받아야 될 정도로 피를 흘렸으면서 지혈도 안 하고 싸돌아다니는 게 몸에 안 좋다는 것도 말 안 해도 알지.”
“쇼, 지금 화났어?”
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쇼는 또 말없이 병을 입에 가져다댔다. 루트는 조용히 앉아 술에 젖은 붕대를 풀고, 어느 정도 지혈이 된 상처를 닦아냈다. 루트가 약을 바른 뒤 거즈를 대고 새 붕대를 어깨부터 감기 시작하자, 쇼는 그새 제법 비운 술병을 내려놓고, 뜨거운 숨을 푹푹 내쉬며 루트 옆으로 와서 붕대를 빼앗았다. 루트 팔에 피를 안 통하게 할 기세로 온 힘을 다해 압박 붕대를 조이는 쇼 탓에 루트는 이를 악물었다.
“거즈 가는 거 잊지 말고, 붕대 했다고 팔 휘두르고 다닐 거면 아예 하지 마. 집에서 좀 쉬어.”
“사민, 벌써 취했나봐. 설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쇼는 루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트를 소파에 밀어 눕히고, 셔츠를 잡아 뜯을 기세로 들춰 배에 난 상처를 살폈다. 오늘처럼 쇼가 소독하고 기본 연고만 발라둔 지 일주일 정도 된 상처는 보기 흉하게 아물어 있었다. 쇼는 아직 붕대를 풀 때가 아닌 게 분명한데도 이 상태로 돌아다니는 루트가 못마땅했다.
“니가 몸에 바람구멍 내고 다니는 취미가 있다는 건 아주 잘 알지만, 이번엔 진심이야. 네가 죽어버리면, 머신도 핀치도 곤란해져.”
쇼의 불퉁한 말에 쇼 아래에 깔린 루트가 피식 웃었다. 쇼는 다음 순간 루트가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그거 나 걱정하는 거 맞지, 자기?”라고 끈적하게 굴거나, “그럼 너는 어떤데? 너도 곤란해?”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루트는 놀랍게도, 쇼와 눈도 못 마주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쇼는 왠지 어지러웠다. 술기운이 조금 도는 것 같았다.
“뭐라는 거야, 루트.”
쇼는 몸을 굽혀 루트의 입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쇼의 무게 때문인지 루트가 조금 몸을 뒤척였지만, 쇼는 루트의 배와 팔에 난 상처에만 잠깐 눈길을 줬을 뿐, 그대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려 버둥대던 루트가 곧 체념한 목소리로 쇼에게 말했다.
“나, 갈만한 집이 없다고.”
“갈 데가 없다고?”
“응.”
“넌 도대체...”
쇼의 눈동자에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가, 약한 술냄새가 나는 날숨에 흩어졌다. 쇼는 풀린 눈을 몇 번 깜박이고 그대로 루트의 몸 위에 엎드렸다. 루트는 당황해서 몸을 빼려 했지만 배와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왼팔은 밖으로 빼 둔 쇼의 다정함에 루트는 웃어버렸다.
“쇼,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비켜줘. 나야 네 가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자세가 전혀 싫진 않지만, 안 그러던 니가 갑자기 이러니까 나도 좀 무서운걸.”
루트의 희롱 섞인 말에도 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루트는 고개만 숙여 쇼의 정수리를 보았다.
“쇼..? 진짜 자? 사민?”
루트가 가볍게 흔들어 봐도 쇼는 가만히 숨만 쉴 뿐이었다.
“유능한 요원이, 술 좀 마셨다고 이렇게 무방비로 자도 되는 거야?”
루트가 쇼의 등을 쓸어내리며 허공에 중얼거리자, 루트의 오른쪽 귀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루트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Good Night, 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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