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얼음아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6)
Agent 4 (4)
POI (10)
불야성 (12)
기타 (15)
판매 (5)
감상 (7)
- (3)

글 보관함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쇼는 독한 술을 좋아했다. 도수가 높고 맑을수록 좋았다. 목으로 채 넘기기도 전부터 알콜이 증발하는 것 같은 그 독한 느낌과, 화끈함이 좋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한테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고 살아남으라고 충고하는 주제에 오만 위험한 짓은 혼자 다 하고 다니는 싸이코가 갑자기 피를 철철 흘리며 집에 쳐들어왔을 때도, 독하고 맑은 술은 유용했다.

 

“비밀스러운 AI랑 요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물어도 대답 안 하겠지?”

“내 걱정 해주는 자기는 귀엽지만, 걱정할만한 일은 아니었어.”

“그래. 고작해야 치명상 정도네.”

 

쇼는 빙글빙글 웃는 루트가 짜증나서 루트의 왼팔에 감는 중이던 지혈용 붕대를 부러 더 세게 묶었다. 루트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 나는 당하는 것보단 내가 묶는 게 조금 더 좋은데.”

“루트, 언젠가 니 혀가 다쳐서 오면 내가 정말 예뻐해 줄게.”

“정말, 사민?”

 

닥치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표정이 밝아지는 루트를 보며 쇼는 혀를 쯧 찼다. 쇼는 예고도 없이 투명한 바카디를 루트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루트가 아까보다 더 크게 신음했다.

 

“오늘따라 정말 화끈하네? 혹시 나 기다렸어?”

 

쇼는 대꾸 없이 돌아서서 바카디를 병째로 마셨다. 루트는 세 모금까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쇼가 네 번째로 병을 기울이자, 루트는 피를 많이 흘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루트가 소파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쇼가 다시 루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앉아, 루트.”

“그게 아무리 라이트라지만, 그렇게 마시면 몸에 안 좋다는 것 정도는 말 안 해도 알겠지?”

“당장 수혈을 받아야 될 정도로 피를 흘렸으면서 지혈도 안 하고 싸돌아다니는 게 몸에 안 좋다는 것도 말 안 해도 알지.”

“쇼, 지금 화났어?”

 

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쇼는 또 말없이 병을 입에 가져다댔다. 루트는 조용히 앉아 술에 젖은 붕대를 풀고, 어느 정도 지혈이 된 상처를 닦아냈다. 루트가 약을 바른 뒤 거즈를 대고 새 붕대를 어깨부터 감기 시작하자, 쇼는 그새 제법 비운 술병을 내려놓고, 뜨거운 숨을 푹푹 내쉬며 루트 옆으로 와서 붕대를 빼앗았다. 루트 팔에 피를 안 통하게 할 기세로 온 힘을 다해 압박 붕대를 조이는 쇼 탓에 루트는 이를 악물었다.

 

“거즈 가는 거 잊지 말고, 붕대 했다고 팔 휘두르고 다닐 거면 아예 하지 마. 집에서 좀 쉬어.”

“사민, 벌써 취했나봐. 설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

 

쇼는 루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트를 소파에 밀어 눕히고, 셔츠를 잡아 뜯을 기세로 들춰 배에 난 상처를 살폈다. 오늘처럼 쇼가 소독하고 기본 연고만 발라둔 지 일주일 정도 된 상처는 보기 흉하게 아물어 있었다. 쇼는 아직 붕대를 풀 때가 아닌 게 분명한데도 이 상태로 돌아다니는 루트가 못마땅했다.

 

“니가 몸에 바람구멍 내고 다니는 취미가 있다는 건 아주 잘 알지만, 이번엔 진심이야. 네가 죽어버리면, 머신도 핀치도 곤란해져.”

 

쇼의 불퉁한 말에 쇼 아래에 깔린 루트가 피식 웃었다. 쇼는 다음 순간 루트가 자신의 눈을 쳐다보며 “그거 나 걱정하는 거 맞지, 자기?”라고 끈적하게 굴거나, “그럼 너는 어떤데? 너도 곤란해?” 같은 낯간지러운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루트는 놀랍게도, 쇼와 눈도 못 마주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쇼는 왠지 어지러웠다. 술기운이 조금 도는 것 같았다.

 

“뭐라는 거야, 루트.”

 

쇼는 몸을 굽혀 루트의 입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쇼의 무게 때문인지 루트가 조금 몸을 뒤척였지만, 쇼는 루트의 배와 팔에 난 상처에만 잠깐 눈길을 줬을 뿐, 그대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대답하지 않으려 버둥대던 루트가 곧 체념한 목소리로 쇼에게 말했다.

 

“나, 갈만한 집이 없다고.”

“갈 데가 없다고?”

“응.”

“넌 도대체...”

 

쇼의 눈동자에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가, 약한 술냄새가 나는 날숨에 흩어졌다. 쇼는 풀린 눈을 몇 번 깜박이고 그대로 루트의 몸 위에 엎드렸다. 루트는 당황해서 몸을 빼려 했지만 배와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왼팔은 밖으로 빼 둔 쇼의 다정함에 루트는 웃어버렸다.

 

“쇼,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비켜줘. 나야 네 가슴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이 자세가 전혀 싫진 않지만, 안 그러던 니가 갑자기 이러니까 나도 좀 무서운걸.”

 

루트의 희롱 섞인 말에도 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루트는 고개만 숙여 쇼의 정수리를 보았다.

 

“쇼..? 진짜 자? 사민?”

 

루트가 가볍게 흔들어 봐도 쇼는 가만히 숨만 쉴 뿐이었다.

 

“유능한 요원이, 술 좀 마셨다고 이렇게 무방비로 자도 되는 거야?”

 

루트가 쇼의 등을 쓸어내리며 허공에 중얼거리자, 루트의 오른쪽 귀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루트가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Good Night, Hon.”

 

 

 

Posted by 얼음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