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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3-1

불야성 / 2017. 3. 19. 00:41

3편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중이라 늦었어요,,, 한 편은 텀 길지 않게 올리고 싶었는데 3-2는 좀 늦어질지도 모르겠어요.. 8 8












-



 “또 왔냐? 오늘은 좀 잘 숨었다?”


 “아! 야, 너, 좀, 기척 좀 하고 다녀! 간 떨어지겠네. 아오.”



 세진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하품하던 탁이 놀라 핸들에 무릎을 박았다. 세진은 무릎을 문지르며 징징대는 탁에게 간식거리를 안겨주고 조수석 의자를 뒤로 밀어 다리를 편하게 쭉 뻗었다. 이경과의 거래 이후 세진의 바쁜 일과에 추가된 한 가지는 학교 근처에 잠복하고 있는 탁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처음 공사장에서 만났을 때부터 쟤, 너, 야, 하며 반말을 쓰는 탁에게 세진도 진즉 말을 놓아서, 대화만 들으면 둘은 꽤 친해보였다.



 “나 왔다~ 하면서 오면, 마중이라도 나오게?”


 “아니. 빨리 튀어야지.”


 “너 솔직히 말해봐. 사실 숨을 생각이 없지? 어떻게 맨날 들켜?”


 “야 내가 원래는... 원랜 안 이래. 아 이거 정말... 너야말로 솔직히 말해봐. 나한테 추적기 같은 거 심었어?”



 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너를 왜?”


 “근데 어떻게 이렇게 바로 찾아내? 아니지, 애초에 나 일하는데 왜 찾아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나 오면 너도 좋잖아, 아냐?”



 이번에는 탁이 실소를 흘릴 차례였다. 손으로 턱받침까지 하고 묻는 세진에게 탁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좋겠냐.”


 “그래도 내가 맨날 간식도 갖다 주잖아.”


 “이 차에서 뭐 먹으면 안 된다니깐.”



 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진이 사온 피자빵과 카스테라를 양손에 들고 뭘 먼저 먹을지 고민하듯이 번갈아 봤다.






 처음 세진이 잠복하는 탁을 찾아낸 건 우연이었다.



 사실 완전 우연은 아니었다. 탁이 내는 특유의 바람소리를 들은 건 우연이었지만, 혹시나 탁을 대동한 이경이 근처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굳이 학교 주변을 이 잡듯 탐색한 건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탁을 찾아내고 탁이 혼자인 것을 알았어도, 세진은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이경이 저를 감시하라 보낸 것이 아닐까하는, 객관적으로 볼 때 세진에게 딱히 좋을 것도 없는 가정이었다. 절대 너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하는 탁을 추궁한 끝에, 세진은 밀려오는 실망감에 파묻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진은 이경이 자신을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망했단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세진은 그럼 여긴 왜 왔냐고 탁에게 계속 캐물었다. 탁은 보기보다 완고해서, 돌아오는 답이라곤 “그거까지 얘기하면 대표님한테 혼나” 뿐이었다.



 “뭐 어떻게 혼나길래? 월급이라도 까여? 아님 뭐 어디 잡혀가서...”


 “너 되게 전근대적인 발상을 한다. 우리 대표님을 뭘로 보고.”


 “애도 아니고, 그냥 혼나는 게 무섭냐?”


 “야 그거는, 그니까, 누군지가 중요한 거지.”



 탁이 걱정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작은 한숨을 뱉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며 탁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먼 곳을 훑었다. 자신의 대표님을 생각하는 중인 것 같았다. 이경을 생각하는 탁을 보며 세진은 이경과 탁을 생각했다.



 “대표님한테 미움 받기 싫구나.”



 탁이 구겨진 얼굴에 의아함까지 담아 세진을 쳐다봤다.



 “당연하지, 나 월급 주는 분인데. 암튼 너 좀 가라. 나 일해야 된다. 아... 너한테 들킨 것도 아시면 한소리 하실 거 같은데.”



 세진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걱정하고 있는 탁을 두고 널찍한 차 안을 훑어봤다. 희미한 가죽 냄새가 났다. 세진은 이경이 저 자리에 앉았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스스로가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한번 의식하자 세진은 탁의 기척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탁이 정말로 세진 때문에 학교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에는 세진의 전 의뢰인 정도가 있었다.




 세진이 이경에게 의뢰받은 일은 단순했다. 이경을 처음 만나게 해준-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세진과 이경이 만난 일은 물론 서이경을 알지도 못하겠지만-의뢰인 정미연의 미등록 폰을 복제하는 일이었다. 세진에겐 다른 센티넬들이 드글대는 곳에서 남의 물건을 몰래 빼돌렸다가 다시 돌려놓는 일보단, 이경이 떠나고 혼자 남은 응접실에서 붉은 얼굴을 드는 게 훨씬 더 어려웠었다.



 조이사에게 임무 설명을 들을 때 이미 세진은 미연의 미등록 기기가 뭔지 알고 있었다. 의뢰 완료를 위해 최원재 사진을 뽑아 보여준 날, 미연이 손마디가 하얗게 될 때까지 눌러 쥐고 있던 핸드폰이 그것이었다. 집어 던지거나 으스러트리고 싶은 걸 세진 앞이라 참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그날 박살나지 않았길 바란 게 무색하게도 폰은 사감에게 들키지 않게 주문제작한 케이스 가장 아래쪽에 곱게 놓여있었다. 핸드폰 입장에선 캐비닛에 처박혀 있는 건 물리적으로 박살난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덕에 수월하게 일을 마친 세진은 며칠 뒤 미연이 또 다른 미등록 폰을 쓰고 있는 것을 봤었다.




 세진은 그래서 탁이 잠복 중인 것이라 생각했다. 최원재와 관련된 필요한 데이터만 뽑아낸단 말은 거짓말이었고, 미연이 최원재와 주고받을 연락을 염탐할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미연이 세진의 보고를 받고 화나서 최원재와 연락하는 핸드폰을 거들떠도 안 보게 될 것은 서이경의 예상범위 밖이었을 것이다. 이 추측은 미연이 외출중일 때는 탁의 기척이 느껴진 적 없었기 때문에 점점 더 기정사실화 되어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진은 왠지 500만원을 훔친 기분이 되었다.



 이경이나 세진이나 최원재와 정미연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량은 비슷했다. 이경이 자신을 언제부터 조사해놓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세진이 찍은 사진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었고 미연의 의뢰 내용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미연과 최원재의 관계가 변화할 것은 세진이나 이경이나 조금만 생각해봤으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경이 500만원을 지불하고 가져간 복제품이 값비싼 쓰레기가 됐다 해도 세진이 빚진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언제나 애매한 양심이 문제였다. 세진이 실제로 이경에게 빚진 부분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의도야 어쨌든 탁은 위험한 순간에 세진을 도와줬다. 그리고 최원재와 최원재의 센티넬들이 세진을 똑똑히 봤는데도 세진이 지금까지 무사한 걸 보면 ‘김작가’라는 사람이 세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준 것 같았다. 물론 둘 다 세진이 요청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경의 지시였을 것이다.



 이경이 같이 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확인 차 탁에게 찾아갔다가 탁과 친해진 것도 가책의 일부분을 차지했다. 같은 자리에 몇 시간씩 혼자 앉아 갑갑해 몸부림치는 탁을 보면 좀 불쌍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뭘 해봤자 자신은 돈 한 푼 못 받을 일이었고, 탁이 정확히 어떤 것을 얻어가려고 잠복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기도 했을 뿐더러, 탁의 감시가 일주일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미연에게도 조금씩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세진씨. 잠깐 얘기 좀 해요.”



 그래서 세진은 미연이 열람실에서 자신을 불러냈을 때, 놀라서 심장이 못해도 배꼽까지는 떨어진 기분이었다. 세진은 미연과 세진을 번갈아가며 의아하게 쳐다보는 마리를 두고 쭈뼛거리며 미연을 따라 사람이 없는 바깥 복도로 나갔다.



 “ㅇ, 왜 불렀어요?”


 “왜? 그건 세진씨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요?”



 미연이 찡그리며 따져 물었다. 그제야 세진은 요즘 자신도 모르게 미연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대로 다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정보를 얻을 기회를 대충 날리고 싶지도 않았다. 세진은 눈썹에 힘을 빼고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그...냥 걱정이 돼서요. 저번에 그런 일도 있었고.”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이건 업무 이후에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세진의 말에 미연이 얼굴을 더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연의 반응을 본 세진은 미연을 조금 화나게 만들기로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흥분은 진실의 입을 가볍게 한다.



 “근데 미연씨 성인이긴 하지만 아직 학생인데, 그런 건 좀... 좀 그래 보이던데.”


 “뭐라구요?”


 “유부남인 건 둘째 쳐도 남자가 나이도 많고 여자도 많고, 뭐 돈도 많아 보이긴 했지만...”


 “이세진씨!”


 “아 물론, 미연씨가 돈 때문에 만난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절대 아니구요. 근데 요즘도 자주 나가는 거 같길래.”



 미연이 분과 짜증과 억울함이 뒤섞인 눈으로 세진을 노려봤다. 세진에게 느껴지는 압박감은 기분 탓만이 아닐 것이다. 세진은 자신과 비슷한 미연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세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버티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유지했다.



 “정말 불쾌하네요. 내 연애사 하나 알았다고 이세진씨까지 나를 그딴 식으로 매도해도 되는 줄 알아요?”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 그냥 연애사니까 제가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사랑이라는 거, 지나고 나면 정말 별 거 아니에요. 한 사람한테만 너무 연연해하지 않아도 인연이라는 건,”



 세진의 투명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연이 실소했다.



 “하, 사랑? 인연?”


 “아직 젊으니까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죠. 그치만 그런 감정은 어차피 충동적인 거고,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낭만적이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게 지금 누군지 모르겠네. 내가 고작 사랑 때문에 끌려 다니는 거 같아요? 남 일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 정말 좋겠네요. 이세진씨가 이렇게 주제파악도 안 되는 인간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일 안 맡겼지. 나이 좀 많다고 간섭할 권리 생기는 것도 아닌데 아무한테나 참견 마요.”



 이를 갈며 말을 쏟아낸 미연은 더 따질 말이 남은 것처럼 울컥이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세진에게서 등을 돌렸다. 세진을 구길 듯이 찍어 누르던 압력도 미연을 따라 멀어졌다. 세진은 미연이 복도를 벗어나기 전에 급히 외쳤다.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A/S니까 부담 갖지 말구!”



 세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연 뒤쪽의 유리창이 터져 박살났다. 미연은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게 며칠 전이었다. 그 사이에 미연은 외출계를 한 번 냈고, 한 번 몰래 빠져나갔다. 미연과의 대화에서 알게 된, 미연이 최원재와 뭘 하는지는 몰라도 떳떳하지 못한 일이고, 그게 삼류 연예 잡지에 실릴 가십거리 정도가 아니라는 것, 미연과 최원재 사이를 아는 누군가가 세진처럼 미연을 열받게 한 적 있다는 것 외에 추가로 알아낸 건 없었다.



 미연이 두 번 외출하는 동안 탁도 세진에게 두 번 발각됐다. 세 번째로 걸렸을 때 탁은 시무룩하게 쇼핑백 더미를 세진에게 안겼다. 쇼핑백마다 비싸 보이는 옷과 구두, 가방, 장갑, 악세서리 같은 게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열어본 쇼핑백에서는 남성용 정장 재킷이 나왔다. 이경을 처음 만났을 때 세진이 걸치고 있던 것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이게 뭐야?”


 “수트, 코트, 목걸이, 귀걸이, 구두, 어... 그리고...”


 “대표님이야?”



 쇼핑백 내용물을 살피는 척 하던 탁이 찡그린 얼굴로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너한테 들킨 거 들켰어.”


 “2주면 오래 숨겼지. 그래서?”


 “그래서는, 나 엄청 깨졌다. 친구 생겨서 신났냐 하시던데.”



 세진은 불퉁한 탁에게 조금 더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니가 대표님한테 깨진 거랑 이게 다 무슨 상관이냐고.”


 “니가 나 또 찾아내면 주라던데.”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이유도 모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냐? 이 많은 걸 대체 나한테 왜,”


 “주면 그냥 받지 말 진짜 많네. 그냥 우리 사칙이 그래. 첫째, 지시받은 일은 무조건 한다. 둘째, 지시받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셋째, 어떤 일에도 이유는 묻지 않는다.”


 “니네 사칙 같은 건 모르겠고, 난 이거 안 받아. 못 받아.”


 “좀 그냥 가져가면 안 되냐?”


 “너 같으면 이렇게 비싼 걸 이유도 없이 받겠냐?”


 “이유. 뭐, 있을 수도 있지.”


 “무슨 이유?”


 “아, 잘 생각해 보면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왜 소리를 지르냐!”


 “그, 그건 미안. 어쨌거나 내 임무는 이거 전달이니까, 안 가지려면 버리든가, 아님 니가 직접 돌려드리든가. 하여튼 난 줬다.”



 옷과 장신구를 가져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세진과 니가 안 가져가면 내가 또 혼난다는 탁의 실랑이가 길어졌다. 자긴 바쁘니까 제발 그만 가라고 사정사정하던 탁은 결국 세진과 물건들을 차 밖으로 밀어내고 바로 시동을 걸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세진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진 쇼핑백들을 챙겼다. 받을 이유는 없는 것들이지만 버릴 수도 없고, 또 돌려주러 이경을 직접 찾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쇼핑백은 사무실에 그냥 놓고만 와도 되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세진은 짐들을 곱게 챙겨 방에 가져다 놓았다. 벌써 4시가 넘었으니 지금부터 나갈 준비를 하다간 퇴근시간이 될 거 같고, 왔다 갔다 하느라 학식 시간 놓치면 밖에서 저녁 사먹을 돈도 없고, 입을만한 옷은 하필 어제 세탁실에 맡겼고...



 세진은 이경에게 오늘 갈 수 없는 변명들을 쌓아올리며 복도를 서성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준비가 옷이든 화장이든 마음이든. 세진의 손에서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이경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 연락을 하면 뭐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해야 할지 고민하며 괜히 날씨 어플을 켜보던 세진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미연이었다. 세진이 반사적으로 아는 체 하려는 순간 미연의 모습이 홀로그램 스위치를 끈 것처럼 사라졌다. 세진의 것과 비슷한 능력이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기에 유용한 스킬이었다.



 세진은 미연이 몰래 나간 횟수에 1을 더하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미연이 여기 있는데 탁은 뭐가 바빠서 먼저 갔지? 미연이 목표가 아니었다면 오늘 학교에는 왜 왔지, 단지 선물을 전하기 위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의문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자동차로 세진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을 미행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세진과 미연은 조금 무리하면 몇 블록씩 순간이동이 가능했으므로 차도를 따라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가이딩을 받지 못할 상황이라 순간이동을 할 수 없다고 해도, 꼬리가 붙은 것 같으면 근력만으로도 건물 몇 개 뛰어넘어 따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미연의 능력을 미리 알지 못했다고 해도 미행 한번이면 깨달았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탁은 왜 매번 차를 몰고 오지? 그것도 항상 똑같은 차를? 탁의 능력이면 차를 타지 않는 편이 훨씬 눈에 덜 뜨일 텐데. 이제 11월도 끝나가고 그냥 있기는 추우니까, 탁이 차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아서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세진은 자신이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탁의 존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었지? 탁이 지금까지 잠복을 한 게 맞긴 한 건가? 정미연이 학교에 없을 때 탁도 근처에 없었던 이유가, 혹시, 탁이 미연을 따라가서가 아니고 그 반대였다면?



 세진은 야상을 대충 꿰어 입고 황급히 미연의 흔적을 찾아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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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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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님의 세자매 썰(옥다정-서이경-오수경 자매) 기반 세진이경입니다! 같은 배우 필모 역할 셋이 자매로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설정이며 그 외에 다른 설정들은 불야성과 같습니다. 이안님 썰 다 재밌어요(눈물줄줄

(이안님 원트윗 https://twitter.com/Be_dit/status/842568328228954113)











-



 주말에도 집에서 일하는 이경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이 집에서 정중하게 노크를 하는 사람은 세진밖엔 없었으므로, 이경은 누구냐고 묻지 않고 들어오라고 했다. 예상대로 차를 들고 온 세진을 보고 이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이 차를 내려놓는 동안 이경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뒷목을 주물렀다. 고맙단 말에도 나가지 않던 세진이 쟁반을 끌어안고 꾸물대다 이경에게 말을 붙였다.



 "대표님 많이 피곤하세요?"

 "아니."

 "아... 그러시구나."



 칼 같은 부정에 세진이 바로 시무룩해졌다. 이경은 잠시 눈을 굴리곤 목소리에 다정함을 조금 담아 대답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피곤해."

 "그렇죠? 피곤하시죠?"



 이경은 팔짱을 끼고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지는 세진을 쳐다봤다.



 "내가 피곤한 게 좋니?"

 "아뇨 그게 아니고, 제가 어디서 봤는데... 그게... 어..."

 "계속 뜸들일 거면 나가구."

 "피곤할 때 포옹을 하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대요."



 세진의 말에 이경의 눈썹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묻는 것처럼 구겨졌다.



 "지, 진짜루요. 그 코티솔인지 뭔지가 스트레스 받을 때 나오는 호르몬인데, 포옹하면 그게 감소한대요."

 "그래서?"

 "네?"

 "나 안아주려고?"



 나른하게 올려다보는 이경의 풀어진 목소리에 세진이 덜그럭대며 책상에 쟁반을 내려놓고 어정쩡하게 두 팔을 벌렸다. 자기가 먼저 말해놓고, 눈도 못 마주치고 어색하게 서있는 모습에 이경은 속으로 웃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세진의 팔 아래로 팔을 두르고 세진의 왼쪽 어깨와 목 사이쯤에 고개를 기대자 세진도 이경의 등을 감싸 안았다. 세진의 심장이 콩닥대는 게 느껴졌다.



 "어떠세요? 스트레스가 좀 풀려요?"



 3초도 안 지났는데 세진이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세진이 말할 때마다 세진의 몸 전체가 울렸다. 온 몸으로 이세진이 와 닿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이경은 잠시 눈을 감고 세진을 더 꼭 끌어안았다.



 "대, 대표님?"

 "잘 모르겠어."

 "아... 그냥 인터넷에서 본 거니까 꼭 사실은 아닐지도..."

 "힘든데 서있기까지 하니까 더 힘든 것 같아."



 이경이 부러 투정부리듯 말했다. 긴장하고 있던 세진이 그것을 알아채고 활짝 웃었다.



 "그럼 앉으면 되죠!"



 세진은 품에서 이경을 놓아주고 척척 걸어서 책상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앉은 채로 다시 자신에게 팔을 활짝 펴 보이는 세진을 보고 이경은 피식 웃었다.



 "뜸들이지 마시구, 얼른요. 저 팔 떨어지겠어요."



 세진이 싱글거리며 채근했다. 이경은 일부러 천천히 세진에게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손을 팔랑거리며 이경을 기다리던 세진은 옆에 앉은 이경을 안아주는 대신 팔을 내렸다. 이경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세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거기 말고, 여기 앉으세요."



 세진이 '여기'라고 말하며 탁탁 두드린 곳은 자신의 무릎이었다. 이경은, 이번에는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의미로 웃었다.



 "뭐하자는 거야?"

 "음... 이세진표 허그테라피요?"

 "근데 왜 내가 니 무릎에 앉아야 하는데?"

 "제 무릎이 추운 걸로 할까요?"

 "담요 갖다 줄게."

 "아이 대표니임."



 세진이 이경의 허리춤을 붙들고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이경은 세진에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진 못했다. 결국 이경은 못이기는 척 세진의 무릎 위로 다리를 걸쳐놓았다.



 "대표님 이게 앉으신 거예요?"

 "싫으면,"

 "아, 아니에요. 아까보단 낫네요."



 이경이 다시 몸을 돌리고 앉을세라 세진이 급하게 이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경이 뒤로 휘청하며 세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건 내가 널 안아주는 거 같은데."



 세진은 그래요? 하더니 그대로 팔에 힘을 줘서 이경을 자기 무릎으로 올려놓았다.



 "나 무거워!"

 "안 무거워요."

 "웃기지마."

 "정말인데. 이렇게 버둥대는 게 더 힘들어요."

 "힘들면 내려놓으면 되잖아."

 "싫어요."



 결국 이경은 세진의 힘도, 고집도 꺾지 못하고 세진의 무릎 위에 자리 잡았다.



 "무슨 애가 이렇게 고집이 세니."

 "대표님한테 배웠죠."

 "하필 이런 것만 배웠지?"

 "이런 것도 배웠는데요."



 세진이 이경의 입술에 빠르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이경은 고장 난 것처럼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언제 이런 걸 가르쳤어? 너 나 몰래 과외 했니?"

 "그랬나."

 "뭐?"

 "대표님은 저한테 뽀뽀도 먼저 안 해주시고, 안아주지도 않으시고, 좋아한다고도 안 해주시고, 과외라도 해서 배워와야지 어쩌겠어요?"



 이경이 능청스럽게 말하는 세진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늘렸다.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세진은 웃고 있었다.



 "대표님 지금 질투하세요?"

 "내가 왜?"

 "제가 다른 사람이랑 뽀뽀했을까봐."

 "안 했잖아."



 세진은 대답이 없었다. 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 했지?"



 세진이 이경의 시선을 피했다. 이경의 표정이 굳었다.



 "이세진."



 오래도록 대답 없이 계속 눈만 굴리는 세진을 보고 이경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세진은 이경의 뒤쪽 어딘가를 쳐다봤다. 이경은 이번에는 세진의 볼을 양쪽에서 꾹 눌러서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나는 니가 내 잔에 독을 타서 내밀어도 기꺼이 속아줄 거야."

 "대표님,"

 "근데 이런 말엔 속아주기 싫어."



 이경이 세진에게 길게 키스했다. 이경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세진은 그냥 이경을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푸스스 웃었다. 이경이 세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세진이 너어, 한번만 더 그런 장난 쳐봐."



 으름장을 놓는 이경의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닫힌 문만 볼 수 있었다. 문 쪽을 향해 앉아있던 세진이 방문객의 정체를 알렸다.



 "대표님 동생분이..."

 "뭐? 언제부터? 그걸 왜 이제 말해?"

 "대표님이 제 입을 막으셔가지구."



 이경이 앓는 소리를 내며 세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세진은 부끄러워하는 이경에게 들키지 않게 웃으며 이경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줬다.








 "저게 미쳤나 대낮부터 어디에 앉아서... 뭐? 독이라도 먹어? 아 서이경 진짜 가지가지.... 하... 이놈의 집구석 휴일에도 스트레스만 쌓이고. 내가 진짜 돈만 모으면 다시 나간다."


 이경의 방에서 뽑아온 외서를 펼치며 수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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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2-2

불야성 / 2017. 2. 20. 22:43

좀 짧아요 2편 끝입니당








-



 이경이 세진에게 지시한 일은 단순했다. 최원재와 관련된 어떤 사람의 핸드폰을 복제해오는 일이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회사 직원 센티넬 중에도 은신과 잠입에 특출한 사람은 있었지만, 이 일에 세진이 특히 적합한 이유는 우선, 타겟이 세진이 다니는 학교 학생이자 세진에게 저번 일을 의뢰한 의뢰인이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학교 기숙사에 학교와 관련 없는 센티넬이 몰래 들어갔다가 잡히는 것과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이 면식이 있는 다른 학생의 방에서 발견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구든 후자를 고를 것이다.



 세진이 복사해 와야 할 핸드폰이 학교에 등록된 학생용 폰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여온 폰이라는 것도 이 일을 세진에게 맡기는 이유였다. 학교 보안과 학생 관리를 위해 학생들은 외부와 연락 가능한 전자기기는 전부 학교에 등록을 해야 했고 학교에서는 개인 식별 칩을 심어 돌려줬다. 칩을 통해 학교가 알 수 있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학생의 위치 정보뿐이었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가능한 다들 들고 다니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교내 연락이나 공지는 거의 그쪽으로 왔으므로 챙겨 다니긴 했다.

 더러는 잘못한 게 없으면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애들도 있었다. 그러나 세진의 의뢰인과 최원재가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보면, 의뢰인에겐 분명 최원재와 관련된 다른 핸드폰이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최원재가 직접 마련해서 준 걸 수도 있고. 등록된 폰과 그렇지 않은 폰을 구별하려면 대상을 관찰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은 더욱 같은 학교 학생인 세진에게 알맞았다.



 굳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진은 이번 일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많은 후보들 중 한 명이었다.




 필요한 장비는 회사에서 제공하고, 보수가 높은 대신 걸렸을 경우 책임은 전부 세진이 진다. 이것이 이경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표면상으론 제안이었지만 이경은 세진이 거절하지 못 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경이 제안을 가장해 내린 명령에 세진이 부탁을 가장한 조건을 걸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대신 부탁이 있어요.”



 세진의 말에 이경은 악수하려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구요, 제가 그렇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진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뜸을 들일수록 더 수상해지기만 했다. 이경은 조금 지루해져서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 봤다. 그 행동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변명을 늘어놓던 세진이 황급히 말을 맺었다.



 “일 끝나면 대표님이 가이딩 해주세요.”



 무슨 얘긴가 했더니.



 “부탁을 할 땐 거절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 거 알죠?”


 “이정도 부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학교에서 갑자기 가이딩 받으면 뭐 때문인지 의심 받을 수도 있잖아요.”


 “부탁,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건 내 시간을 달라는 얘기나 마찬가지고 내 시간은 세진씨 생각보다 훨씬 비싸거든요. 세진씨가 일당으로 오백을 요구하는 편이 더 가능성 있을 거예요.”


 “그럼 오백 주실 거예요?”



 이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버렸다. 세진은 몰랐겠지만 그건 이경이 짓는 표정 중 가장 큰 축에 들었다.



 “몸값 올리는 솜씨가 좋네요.”


 “말했잖아요, 급하다고. 대표님도 매일이 급하다 하셨지만, 역시 저만큼 급하진 않으신가 봐요.”



 여전히 웃음이 떠나지 않은 얼굴로 이경이 숨을 깊게 쉬며 세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에 이끌리듯이 세진도 허리를 숙였다. 이경이 세진 옆의 팔걸이에 기대 속삭였다.



 “거래를 할 땐 원하는 조건을 정확하게 말하는 편이 좋아요. 솔직하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완벽하게 속이든지.”



 귓가를 스치는 속삭임에 세진이 잠시 파득 고갯짓을 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이경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세진의 귓바퀴 바로 위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세진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이경이 피식 웃자 그 바람을 귀로 느낀 세진이 크게 움찔했다. 이경은 반대편 손을 뻗어 세진의 목덜미를 달래듯이 감싸 쥐었다. 토닥이는 손길에 세진이 이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경과 세진의 이마가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세진의 생각이 활자로 쓰인 것처럼 또렷이 읽혔다. 놀라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있던 세진은 목을 감싼 이경의 손이 더 위쪽으로 움직이자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세진은 이경에게 더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이경의 입술에 꽂힌 시선을 거두지도 못했다. 이경이 세진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세진씨가 일을 끝내고 올 때쯤엔 내가 다른 일정이 있고, 지금이라면 잠깐 가능해요.”



 무엇이 가능한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세진의 눈꺼풀이 티나게 동요했다.




 이경은 세진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일은 타겟이 다니는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에게 시켜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굳이 세진에게 시키려던 이유는, 처음엔 세진이 이대로 졸업 후 아이파이낸셜에 입사할 것 같아서였다. 유능한 인재고, 재단을 통해 일부러 키워진 재원이니 어떤 종류든 요직을 맡게 될 것이었다. 이경의 계산에 따르면 경쟁사 미래 주요인사의 학창시절 범죄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건 이경에게 손해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경은 세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세진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보다 세진을 직접 키우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세진은 더 큰 판에서도 유용할 것이었다. 이세진이 3년 동안 학비를 대준 아이파이낸셜 대신 서이경을 선택하게 만드는 게 전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새로운 계획의 장점이자, 유일하게 이경을 갈등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이경이 세진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세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진이 학생이긴 했지만 어린 나이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이미 한 번 키스도 한 사인데, 세진의 행동에 이경은 이래도 괜찮은 게 맞는지 순간 멈칫했다. 이세진은 스물여섯이고, 성인이고, 의사 결정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경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세진이 살며시 눈을 떴다가, 다시 꼭 감았다가, 결국 완전히 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경과 눈을 맞췄다. 귀 끝이며 목덜미가 붉어지는데도 세진이 시선은 피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욕망에 솔직한 눈을 보며 이경은 계산을 마쳤다.



 “지금 우리 둘만 있는 것 같겠지만, 여길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이경의 말에 세진의 동공이 커지며 재빠르게 이곳저곳을 훑어봤다.



 “여기서 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지만, 세진씨한테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천장 한구석에서 감시카메라를 발견한 세진이 다시 이경을 봤다. 표정이 아까보다 굳어있었다. 이경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세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경은 그런 세진에게 빠르게 다가가 여러 번 잘게 입을 맞췄다. 세진이 어리둥절해 있다가 급히 자기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이경은 기울였던 몸을 세워 세진에게서 떨어진 뒤였다.



 “누가 본다면서요?!”


 “그래서 짧게 한 건데. 더 하려면 방으로 올라가구요.”



 이경이 눈짓으로 저가 내려왔던 계단을 가리켰지만 세진은 그 시선을 따라가는 대신 양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감쌌다. 얼굴은 감췄지만 세진의 머리카락 사이로는 붉은 귓바퀴가, 팔목 사이로는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가 보였다. 얼굴을 가린 이유가 당혹스러움과 놀람과 그와 동시에 느낀 설렘과 기대감과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였다면, 안타깝게도 아무 효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효과까지 없지는 않았다.



 이경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 능숙했지만 그것에 딱히 공감을 하진 않았다. 누군가 부끄러워한다고 덩달아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는데.



 “컨디션은, 좋아졌죠? 지금 바로 출발해요. 학교까지 탁이가 태워줄 거고, 장비 받아서 복사 후에 다시 탁이한테 돌려주면 돼요.”



 세진이 다시 얼굴을 들기 전에 응접실을 떠나는 이경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임무가 끝난 뒤, 세진에게 건네진 수당은 오백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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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2-1

불야성 / 2017. 2. 19. 01:47





 “이세진씨가 정말 올까요?”



 이경의 말이 끝났는데도 안 나가고 미적거린다 싶더니, 조이사가 질문인 척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경이 앉은 채로 올려다보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자 조이사가 말을 이었다.



 “이세진씨만 기다렸다가 만약에 오지 않으면 실행 불가능해지는 계획입니다. 꼭 세진씨가 아니더라도 이번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올 거예요, 그 아이.”



 이경이 조이사의 말을 잘랐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조이사는 이경의 계획이 불확실한 것에 기반을 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경은 도박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쓸 데 없는 걱정 마시고, 지시한 대로 처리하세요.”



 조이사가 나간 뒤 이경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세진은 그 중 무엇 때문에든 이경을 만나러 올 것이었다.






 이경은 타인의 욕망에 기민했다. 믿을 사람은 몇 없겠지만 이경은 타인의 아픔과 감정의 변화에도 예민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알아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이경의 가장 큰 무기는 그것이었다. 무섭게 정확한 판단력도, 빠른 결단력도, 막대한 자금도, 이경에겐 전부 보조도구쯤이고, 이경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큰 밑천은 타인의 욕심이었다. 욕심도 결국은 사람의 감정이다.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기도 쉬웠다. 소중한 사람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애틋한 마음이나,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 혹은 그냥 쪽팔리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객기, 좀 더 편하게 살고 싶다는 일견 당연한 소망, 제 잘못이 분명한데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나약한 마음까지, 모든 것이 이경의 밑천이 됐다.



 자신이 가이드임을 알게 된 날 이경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파악해야할 것 리스트에 센티넬의 안정에 대한 욕구를 추가했다. 이경이 판단한 결과로는 그건 즉각적으로 충족되어야할 욕구에 속했다. 호흡보다는 덜 긴박하지만 허기보다는 훨씬 더 급박해 보였다. 갈증과 비슷하게 사람을 애걸하게 만들지만 갈증처럼 사람 기운을 다 빼놓는 대신 오래 지나면 점점 더 포악해지게 만든다는 점이 달랐다. 가이드가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가 되기 전에 안정시키는 게 최선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경계가 어딘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경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는 센티넬들은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며 그들이 애원할 때까지 내버려둔다고 했지만, 이경의 눈에 그건 비효율적인 악취미였다. 도구는 항상 최상의 상태로 관리해야 한다. 소소한 가이딩에는 힘도 시간도 돈도 안 드는데 굳이 그걸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경의 ‘소소한’ 가이딩에 키스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쓸 만해 보였다. 회장 전체를 스캔하고 있던 김작가님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자기 능력을 잘 컨트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김작가님이 알려준 두 번째 얘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접근은 안 했겠지만.




 몇 년 전부터 아이파이낸셜 쪽에서 금전적이거나 가정사 문제로 훈련기관 입학 시기를 놓친 센티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이경은 그게 쭉 신경 쓰였었다. 다른 기업들도 물론 센티넬 장학금 재단을 운영한다. 기업에 필요한 센티넬을 육성하기 위해서든,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든. 하지만 아이파이낸셜은 이미 센티넬 관련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서 굳이 (통상적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은 센티넬들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는 단순 금융회사에서 센티넬 재단을 두 개나 굴린다는 것부터 이경의 눈엔 다른 내막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심지어 특정 연령대만을, 자기소개서와 면접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심사기준으로 선발한다고? 언제나 주시하고 있었지만 가시화 되는 부분이 없었다. 이경의 앞에 그 아이파이낸셜의 장학생이라는 이세진이 나타난 건 그런 때였다.




 조금 취기가 돈 얼굴로 새빨간 오프숄더 드레스 위에 남성용 큰 재킷을 걸치고 새하얀 벽에 기대 선 세진은, 방금까진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오늘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이경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경이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봐서인지 세진도 금방 이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놀라는 품이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보여 걱정했는데, 세진에겐 파티에 잠입한 목적이 더 우선이었던 것 같다. 혹은 다른 원하는 게 있었거나. 그건 이경이 세진의 어깨에 손을 댄 순간 분명해졌다.



 이경이 닿자마자 세진은 눈에 띄게 긴장이 풀어지고 얌전해졌다. 평소에 학교에서 케어를 잘 못 받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키스를 한 건 그래서였다. 이경은 원래 타인의 욕망에 민감하니까, 세진이 원하는 걸 줘야 세진과 가까워지고 계속 이용할 수 있어지니까. 이경이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세진이 이경을 찾아오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만 빼내면 되니까 그 친구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세진씨한테도요.”


 “...”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린다면,”


 “따불.”


 “예?”


 “따불로 주세요, 이백.”


 “......이세진씨. 5분 일하는 건데 200만원은 너무...”


 “아니 어쨌든 위험한 일은 다 제가 하잖아요. 재수 없으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구.”



 이경은 응접실에서 조이사와 흥정을 하고 있는 세진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세진이 능청스럽게 머리를 흔들 때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사이로 목덜미가 드러났다가 곧 감춰졌다. 어제까진 세진이 오지 않을까봐 걱정하던 조이사님 이마에는 허락이 안 떨어졌어도 다른 사람을 찾아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쓰여 있었다. 깊어지는 조이사의 주름을 보고도 이경은 지금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경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기 쉽다.



 “삼백으로 하죠.”



 이경의 목소리에 조이사와 세진이 동시에 이경을 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돈이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되겠어요?”


 “저야 땡큐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일할 땐 수지타산을 생각해야한다고 하셨으면서.”



 그 말이 어지간히도 거슬렸던 건지, 한방 먹였단 표정으로 저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는 세진을 이경은 일부러 스치듯 지나쳤다. 옷깃만 살짝 닿을락 말락 했을 뿐인데 세진의 몸이 자신을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이경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챈 척 세진의 대각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 계산은 내가 하고, 이세진씨는 맡은 일만 해주면 돼요. 어차피 거절할 입장은 못 될 텐데.”



 마지막 말에 세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경이 세진을 위해 깔아둔 길은 여러 겹이었다. 세진이 정말 올지 묻던 조이사님의 우려에 반드시 온다고 확언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경은 세진에게 매력적일 돈이란 패도 쥐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세진을 학교에-혹은 센티넬 관리국에 신고할 수 있다는 패도 쥐고 있었다.



 “조이사님, 다른 일정 하러 가보세요.”



 이경은 조이사를 내보냈다. 둘만 남고도 한동안 불퉁한 얼굴로 서있던 세진이 마지못해 앉으며 말했다.



 “가이드들은 원래 다 그렇게 센티넬 괴롭히길 좋아해요?”



 세진의 말에 이경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떤 가이드들처럼 ‘비효율적인 악취미’ 같은 건 없는데. 그런 취향도 아니고.



 “신고할 생각도 없으면서 일부러 협박하시잖아요.”


 “협박?”


 “저를 관리국에 넘기실 거였음 굳이 명함을 줄 필요가 없었죠. 오히려 제가 여기 드나들면 더 곤란해질 텐데. 신고하지 않는 게 더 이득이니까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신 거예요, 맞죠?”



 세진의 말에 이경은 얼굴에 웃음이 번지게 둘지, 감출지 고민했다. 세진은 이경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쓸 만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용케 찾아왔네요. 원칙까지 어기고 찾아온 거 보면 급한 사정이라도 있나본데.”


 “뒷조사 다 해보신 거 아니에요? 저 같은 사람은 매일매일이 급해요. 대표님은 그런 거 모르시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처음 만난 날 이후 이경은 김작가님에게 세진의 모든 것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었다. 세진은 이모네 집 전세비가 올라 목돈이 필요했지만 졸업심사도 얼마 안 남아서 시급이 낮은-센티넬 능력과 관계없고 세진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아르바이트에는 시간 할애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경이 세진의 비밀을 쥐고 세진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은근하게 알려주지 않았어도, 혹은 세진이 그 언질을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페이가 두둑한 의뢰를 받으러 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돈이 간절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세진이 틀린 지점은 이경이 갈망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이었다. 이경 역시 세진만큼이나 매순간이 급했다. 단 한 순간도 멈춰 있을 수 없었다. 그건 절대량을 얼마나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세진씨랑 다르지 않아요. 마음은 절실한데, 필요한 만큼 가지진 못했으니까.”



 이경이 세진을 바라봤다. 세진은 아까부터 이경을 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두 쌍이 서로를 비췄다. 이경은 세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얇고 길어 상대적으로 마디가 도드라져 보이는 곧은 손이었다. 세진의 시선이 이경의 검은 눈에서 새하얀 손으로 떨어졌다.



 “우리 서로, 원하는 걸 손에 넣어볼까요?”



 이경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세진을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세진의 손이 떨렸다. 악수를 하려던 세진의 손끝이 이경의 손끝에 스치며 허공에서 접혔다. 세진이 다시 이경과 눈을 맞췄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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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1-3

불야성 / 2017. 2. 1. 11:28






 세진에게만 들리는 것 같던 온갖 이상한 소리들이 사라지고, 골목에는 조금씩 느려지는 탁의 숨소리만 들렸다. 세진은 서있기조차 힘들었지만 크게 숨을 몰아쉴 수도, 주저앉을 수도, 가이딩 중인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대로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세진의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1분이 지나고 탁이 대표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대표는 그제야 탁에게서 메모리카드를 건네받았다.



 “수고했어.”



 탁의 만족스러운 얼굴은 10초 만에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서대표가 메모리카드를 받자마자 몸을 돌려 세진에게 자기 명함과 함께 그것을 건네줬기 때문이었다. 세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명함과 메모리카드를 받아들었다. 명함에는 에스건설 서이경 대표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 이게...”


 “다음부턴 파티 주최자 이름이랑 얼굴 정도는 확인하고 와요.”



 오늘 있었던 경매와 그에 딸린 가벼운 연회는 에스건설에서 주최한 것이었다. 세진도 알고는 있었다. 주최와 전혀 상관없는 의뢰라서 자세히는 안 알아봤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하면서 돌아다녔을 당사자를 속이려고 했었다니, 세진은 아까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손에 쥔 명함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서이경. 이름 세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세진의 속이 다시 들끓으려했다. 세진은 억지로 이 감정은 피곤하고 힘들고 아픈 탓이라고 스스로에게 둘러댔다. 그만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이경은 할 말이 더 있는 눈치였다. 세진은 지금 당장 공간이동으로 튀어도 무례하다는 소리 안 들을 만큼 다쳤는데, 그런 상태로도 이경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짜증이 일었다.



 “좋은 옷이 망가져서 어쩌나. 오늘 보수로 옷값은 되겠어요? 일을 할 때는 수지타산을 생각해야죠.”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제 의뢰는 제가 알아서 해요. 돈 받는 만큼 제 책임이 어디까진지도 제가 알아서 하구요.”


 “하지만 능력은 정말 잘 쓰던데요. 탐색도, 은신도.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 여기까지 도망친 것도 대단하고.”


 “처음부터 저를 보고 있었어요?”



 세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경은 대답 없이 탁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탁아,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대표님.”


 “그럼 세진씨 좀 데려다 줘.”


 “네? 얘를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 직원이 그쪽 싸움에 휘말려서 조금 다치긴 했지만 세진씨 혼자 가는 것보다 안전할 거예요.”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엄청 생색내시네요. 그냥 신경 꺼주셨음 좋겠는데.”



 세진은 울컥했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거나, 미행했다거나, 그런 것보다, 저가 몇 배는 더 다쳤는데 탁이 조금 다친 걸 굳이 짚는 이경에게 화가 났다. 하, 자기 센티넬이 다쳤다 이건가? 험악해진 세진의 표정을 보고 이경이 피식 웃었다. 이경의 웃음에 세진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탁아, 임무 수정해야겠다. 이 사람들부터 김작가님한테 보여드려. 조작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 알아서 해주실 거야. 끝나면 작가님이 말하는 곳에 두고 와.”


 “네, 대표님.”



 탁은 이경이 또 명령을 바꾸기 전에 기절한 남자 센티넬과 여자 센티넬을 들쳐 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세진이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을 때 들은 바람소리는 탁이 오는 소리가 맞았던 모양이었다. 이경은 탁이 멀어지자 세진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세진은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가, 반걸음 다시 돌아왔다. 온 몸이 삐그덕대며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말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경 때문에 심란한 것에 비하면 참을만했다.




 세진은 이제 이 소란스러운 마음이 뭔지 알았다. 이경에게 닿고 싶은 거였다. 연회장에서부터 그랬다. 이경을 처음 봤을 때부터 세진은 이경에게 가까워지고 싶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가이딩을 원하는 건 센티넬의 본능이었으니까.



 연회장에서처럼 세진은 이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경도 세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이경에 대한 이-성욕에 가까운-욕구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그게 지금 세진의 상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몸 상태는 최악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이딩을 원하는 센티넬의 욕구는 최고치였다. 세진은 더는 이성적으로 버틸 수 없을 거 같아 이경의 눈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게 만약, 정말 만약에 그 ‘공명’이 맞다면, 공명에 관한 전설 중에 다른 건 몰라도 서로 가까이만 있어도 안정되는 관계라는 부분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세진은 지금 코앞의 이경을 만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세진의 시선이 자꾸 이경의 목과 입술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런 세진을 보면서 슬며시 웃는가 싶더니, 이경은 금세 세진에게 붙어 한 팔로 세진의 등과 허리를 받쳤다.



 “이, 이봐요?”


 “지금 원하는 게 이거 아니에요?”



 세진은 ‘이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세진의 신경은 온통 이경의 손이 닿은 등에 가있었다. 이경은 세진에게로 몸을 숙였다. 



 “눈 감아요.”



 이상하게 이경의 말에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세진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추측해보기도 전에 세진의 눈은 벌써 감겨있었다.




 이경은 세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맞댔다. 건조하게 닿기만 했다가 멀어지려는 입술에 세진이 잘 안 움직이는 팔을 급하게 둘러 이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경은 아파서 끙끙대며 제 뒤통수를 감싸면서도 눈은 계속 감고 있는 세진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자세만 조금 바꿔 다시 세진에게 입맞췄다. 이경은 처음부터 가볍게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마음 급한 세진이 몇 번씩 이경의 입술을 깨물고 앞니에 부딪쳤지만 이경은 세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가끔씩 입술을 뗐을 때 보이는 이경의 눈은 고요했다. 세진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통상적 의미의 가이딩은 이미 끝났다. 세진의 정신적 능력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좋은 컨디션으로 회복된 상태다. 금 간 갈비뼈나 유리조각에 긁힌 뺨 같은 물리적 상처는 치료가 더 필요했지만 당장 못 견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세진을 안달 나게 하는 건 다른 종류의 충동이었다. 안정과 회복 같은 가이딩에 대한 열망인 척 숨어있던 욕망.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경은 세진이 숨을 고르려 잠시 떨어질 때마다 세진의 눈을 보며 안색을 살폈다. 다정하면서도 아무 열기 없이 차분한 눈빛에 세진은 결국 이경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어깨를 짚고 몸을 떨어트렸다.




 뒤늦게 탁이란 남자가 생각났다. 세진은 자기 센티넬을 먼저 보내고 오늘 처음 본 센티넬에게 키스한 이경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경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이드들이 능력에 따라 센티넬들을 여럿 부린다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가이딩 능력을 말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재력이나 권력 같은 것도 포함한다. 센티넬 고유 능력을 쓰면 정신과 신체가 불안정해지는 센티넬과 달리 가이드는 가이드 고유 능력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았다. 가이딩에 거의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스킨십-방금의 키스 같은 것-때문에 지치는 일은 있어도, 가이딩이 가이드를 지치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이딩 자체는 가이드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경에게도 이 ‘가이딩’은 아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걸로 충분해요?”



 센티넬의 상태가 얼마나 안정됐는지도 가이드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었다. 세진이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다시 키스해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은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키스는 부족했지만.


 ......키스로는 부족했지만.



 “원하는 게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경의 애매한 말에 세진이 뜨끔했다. 방금 키스만으로도 터질 것처럼 빨개진 세진의 얼굴에 한 번 더 열이 올랐다. 이경은 세진이 키스에 열중하느라 떨어트린 명함과 메모리카드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다쳐서 바닥에서 뒹굴면서도 절대 포기 못한다고 버텼으면서 키스 때문에는 너무 쉽게 내동댕이친 것 같아서, 세진은 민망함에 잠시 눈을 굴렸다. 이경은 메모리카드를 좀 살펴보다가 먼지를 털고 세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잠깐 다시 닿는 것만으로도 세진은 목 언저리가 뜨거워졌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긴 숨을 내뱉었다. 세진이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이경은 깨끗한 명함을 새로 꺼내서 세진에게 건넸다.



 “다음 의뢰에 관심 있으면 연락해요. 보수는 두둑하니까.”



 다음 의뢰라는 말에 세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이드에게 아무 영향이 없다고 해도 이유 없이 가이딩을 해준 건 아니었다는 생각과, 의뢰를 맡으면 다시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무슨 일인데요?”


 “아까 그 사람들하고 관계있는 일.”


 “아쉽네요. 한번 의뢰받은 업무는 연장하지 않는 게 제 원칙이라.”


 “그래요 그럼.”


 “저기요!”



 너무 단번에 돌아서는 이경을 불러 세운 건 물론 충동적이었다.



 “어, 저기, 최원재 찾을 때 도와준 건 고마웠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세진씨두요.”



 이경이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곧 자동차에 시동 거는 소리와 엔진이 구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세진은 엉망이 된 바닥을 뒤져 반파된 카메라와 수선 불가능해 보이는 겉옷을 집어 들었다.





 이경의 가이딩 덕분에 학교에 몰래 복귀하는 건 수월했다. 붕붕 날아다니는 몸만큼이나 기분도 계속 붕 떠있었다. 붕 뜬 게 아니라 깊이도 모를 물속에 가라앉는 중인 것 같기도 했다.





 세진은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마리에게 잡혀 상처를 살피고 약을 발랐다. 만난 김에 카메라와 옷의 복구도 부탁하는 세진에게 마리는 눈을 흘겼다.



 “야, 야, 내 능력이 무슨 되감기 버튼인 줄 알아? 이걸 어떻게 되돌려.”



 자기가 새로 사주는 게 낫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마리는 한번 시도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 대가로 야식을 사주며 어디서 또 굴러먹다 왔냐고 잔소리를 잔뜩 들었지만, 세진에겐 그 시간도 다른 날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랬다. 우리 최종심사도 얼마 안 남았어. 몸 좀 아껴."


 "응. 그래야지."


 "하긴 뭐 넌 장학금도 받는데, 심사가 문제겠니. 내가 문제지."


 "너도 잘 하면서 꼭 그러더라."


 "너, 나 가고 또 딴 짓 말고 바로 자. 알겠지?"


 "그래. 너두 딴 데로 새지 말고."


 "헐... 방금 무단 외출하고 오신 이세진씨가 할 말은 아니죠."


 "얼른 들어가."





 계속 걱정하는 마리를 겨우 자기 방으로 돌려보내고 혼자가 된 세진은 침대에 누워 이경의 명함을 만지작대다 깨달았다. 자신은 서이경에게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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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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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1-2

불야성 / 2017. 1. 30. 21:31





 경매장에 잠입하기는 연회장에 들어오는 것보다 쉬웠다. 최원재와 최원재의 섹스 상대와 최원재의 센티넬, 딱 세 사람만 속이면 됐다. 평소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아진 세진은 단 한 걸음도 망설이지 않고 경매장에 들어섰다. 최원재는 밖에 세워둔 센티넬을 아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자기 집 안방처럼 아직도 옷을 안 챙겨 입고 히득거리고 있는 걸 보면.




 그 덕에 세진은 대상을 늦게 발견하고도 의뢰를 성공할 수 있게 됐다. 세진은 장비만 있다면 눈으로 본 것을 사진처럼 전사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의뢰인은 사진 같은 것 말고 그냥 사진을 원했다. 본인도 전사능력이 있는 센티넬이면서, 그런 건 못 믿겠다고 했다. 왜 못 믿겠다는 건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사실 굳이 의뢰인을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세진에게 중요한 건 의뢰인의 요구사항이 무엇인가였다.


 의뢰는 그냥 흔한 내용이었다. 최원재가 자신 외에-그리고 법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나는지 확인해 달라. 그리고 다른 여자가 있다면 증거 사진을 찍어 와라. 그래서 의뢰와 관련해 세진이 전송받은 사진은 두 장이었다. 최원재와 최원재 부인 사진. 최원재는 확인 됐고. 여자 쪽을 살펴봤다. 부인이 아니었다. 세진은 이것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본인도 내연녀면서 다른 내연녀가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의뢰라니? 하지만 이것도 굳이 세진이 파고들 문제는 아니었다.





 세진은 펄럭거리는 남성용 자켓을 얌전히 입었다. 거추장스럽지 않게 소매를 접고 단추까지 잠그고,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다가가 사진이 잘 나올 각도를 살폈다. 지금 컨디션으론 두 사람 코앞에서 셔터를 눌러도 모를 정도로 은신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찍으려는 이유는 이 사진을 나중에 최원재의 법적 반려자에게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에 판다면 아마도 법원에 증거물로 쓰일 수도 있고, 법정에 오른다면 누가 봐도 센티넬이 능력을 써서 찍은 사진은 좀 곤란했다. 안 그래도 윤리니 뭐니, 시키는 일만 할 뿐인데 화살은 다 맞고 있는 ‘센티넬에게’ 곤란하다. 사진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충분히 욕먹을만한가 싶긴 하지만 사실 세진에게는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세진은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창 옆에서 몸을 낮추고 탁자 너머로 두 남녀를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보통 사람이면 맞은편 건물에서 대포렌즈로 줌을 당겨 찍겠지만 세진에겐 그런 좋은 렌즈와 좋은 카메라는 없었다. 대신 인간 줌인렌즈 이세진이 왔다. 세진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카메라를 살짝 기울여서 맞은편 건물에서 찍은 것처럼 연출하고 셔터를 누른 순간 최원재에게 살랑거리던 여자가 표정을 바꾸고 세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렌즈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세진은 미처 방어도 못하고 벽까지 튕겨져 날아갔다. 



 “컥.”



 벽에 처박힌 건 세진이지만 목이 졸려 끓는 소리를 낸 건 최원재의 여자 쪽이었다. 세진은 얼얼한 등과 뒤통수를 체크할 시간도 없이 여자에게 반격부터하고 창을 깨고 뛰어내렸다. 이 여자도 센티넬일 줄은 몰랐다. 최원재가 또 다른 센티넬을 만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창문으로 떨어지는 세진을 잡으려 허공을 훑는 힘이 느껴졌지만 세진의 힘과 중력의 합산이 더 강했다. 최원재가 경매장 바깥의 남자 센티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좋게 착지해보려 했지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낙하시간이 길지 않아서 세진은 몸을 둥글게 말고 다시 한 번 등을 희생했다.



 “으윽...”



 세진이 깬 건 분명 유리조각이 흩어지지 않는 안전유리였는데, 날카롭게 조각난 창문 유리들이 세진을 뒤따라 빠르게 떨어졌다. 뒤이어 덩치 큰 남자도 떨어졌다. 세진은 가장 위험한 유리조각 몇 개만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잘 깎인 유리조각을 따라 내려온 남자에게 되돌려 날려주고 세진은 벌떡 일어나 달렸다.


 아파 죽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치였다. 남자를 따돌리거나 때려눕히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계산을 마친 세진은 일부러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만 도망치다가 공사장 주변의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세진이 골목에 들어서고 얼마 안 돼 곧 남자 센티넬도 따라 들어왔다. 남자는 막힌 골목 담을 뛰어 넘으려는 세진을 보고 급하게 돌진했다. 남자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던 세진에게 직선으로 달려드는 커다란 덩치를 피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세진이 속임수로 좀 더 멀어보이게 만든 벽에 온 힘을 다해 부딪친 남자가 눈의 초점을 잃고 비틀거렸다. 잠시였지만 세진은 그걸 놓치지 않고 다리와 뒤통수를 한 번씩 더 가격해 완전히 기절하게 만들었다.



 “허우... 아저씨 미안.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니셔야죠.”



 세진은 손을 두어번 털고 얼른 재킷을 벗어 살폈다. 이거 정말 비싼 건데. 두 번이나 크게 부딪힌 등보다 엉망이 된 재킷을 보는 속이 더 쓰렸다. 최대한 멀쩡해 보이게 수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세진은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확인했다. 스트랩을 목에 걸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카메라 화면에 1번 메모리카드가 꽉 찼다며 빨간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연사모드로 눌려있는 셔터를 한 번 더 누르고 2번 메모리카드로 설정을 바꾸자 깜박이던 빛이 꺼졌다.



 최원재가 다른 사람들을 더 보내기 전에 도망가기 위해 골목 밖으로 발을 딛...으려던 세진은 섬뜩한 감각에 뒤로 펄쩍 뛰었다. 뛰어오른 세진을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리쳤다. 공중에서 그대로 충격을 받은 세진은 이번엔 머리만 겨우 감싸고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옷과 카메라와 구두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고 세진의 뼈 몇 조각과 정신 약간도 제자리에서 이탈했다. 세진의 머리 바로 위쪽으로 옆 공사장에서 끌어온 것 같은 쇠발판이 쩡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세진을 공격한 건 최원재와 함께 있던 여자였다. 여자는 몸을 말고 컥컥대는 세진을 지나쳐 바닥에 널브러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너한테 별 악감정은 없는데 이건 좀 곤란해서.”


 “끄으...”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워하며 겨우 눈만 뜬 세진의 귀에 카메라 셔터소리가 계속 들렸다. 어떻게 들으면 우르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면 어쩌면 그냥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여자가 메모리카드를 찾으려 이미 반쯤 박살난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세진은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너무 구형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오래 걸릴 뿐이지 여자는 금방 메모리카드를 빼내 가루로 만들 것이고, (아마도 최원재가 시켰을) 그 임무를 완수한 뒤엔 세진 자신까지 가루내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세진은 갈등하고 있었다. 집중하면 한 번 정도는 순간이동 할 수 있었다. 다 망가진 카메라와 비싼 옷과 구두 따위를 포기하면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세진이 상처와 고민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이 여자는 혼잣말로 짜증을 내다가 작게 탄성했다. 곧이어 메모리칩 커버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진은 이제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셔터소린지 발자국소린지 바람소린지가 멈췄다. 그리고



 “나도 그쪽한테 별 감정은 없는데, 이게 망가지면 내가 좀 곤란해져서.”



 사진이 든 메모리카드는 방금 멈춘 바람소리의 정체인 것 같은 남자의 손으로 옮겨가 있었다.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주 잠시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던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맞붙어서 꽝꽝거렸다. 정확히는, 여자 쪽은 힘으로 내려치거나 올려쳐서 안 그래도 먼지구덩이인 이곳에 환상적인 먼지 눈을 내리게 했고, 남자는 아주 빠르게 여자의 공격을 피하며 뭔가 조금씩 반격도 하는 것 같았다. 세진은 지금 그 싸움에 휘말리면 정말로 온 몸이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안 들어 그냥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피와 피에 엉긴 먼지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아직 메모리카드가 저기 있었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됐는데 의뢰마저 실패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어느 쪽이든 지친 상태로 결판이 나겠지. 세진의 계산은 그랬다. 그때까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론 회복이 돼야 할 텐데. 







 결과는 스피드의 승리였다. 아무리 세도 벽에 바닥에 그렇게 박아대는데 힘이 남아날 리 없었다. 피가 맺힌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쓰러진 여자는, 가이드가 여기까지 와서 가이딩해주지 않는 이상 아침까진 뻗어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세진의 예상대로 재빠른 남자도 충분히 지쳐 보였다. 세진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아, 그쪽한테도 미안하지만 이거 가져오란 게 우리 대표님 명령이거든.”



 세진은 대꾸 없이 온 힘을 짜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으로 남자의 턱을 날렸다. 갑작스레 들어간 펀치에 남자가 뒤로 넘어지긴 했지만 세진의 생각만큼 공격이 강하게 들어가진 않았다. 그래도 메모리카드를 놓치게 할 정도는 됐다. 세진이 메모리카드를 주워들려는 순간 남자도 이를 악물고 슬라이딩하려 했다.



 “탁아.”



 그 목소리에 남자도, 세진도 행동을 멈추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세진에게 최원재 행방을 알려준 그 여자였다. 연회장에서도 대표님이라고 불리더니, 이 남자한테 사진을 가져오라고 한 대표님도 이 사람이었던 거다.



 “대표님 오지 마세요. 제가 해결할 수,”


 “괜찮아.”



 대표라는 사람은 높은 힐을 신고도 흔들림 없이 난장판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세진은 붙박인 듯 서서 여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또 다시 이상한 소리들이 와글거리며 세진을 꼼짝 못하게 했다. 탁은 그 틈에 얼른 메모리카드를 집어 들었다. 세진이 힘겹게 메모리카드가 놓여있던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탁이 세진을 보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뿌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대표님에게 메모리카드를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임무 완수했습니다.”


 “왜 다치고 그래.”


 “전투 타입이 그런 건 제가 어쩔 수가 없어요.”



 대표는 탁이 내미는 물건을 받는 대신 질책 같은 걱정을 하며 곧장 탁의 목 뒤로 팔을 뻗었다. 대표가 목덜미를 손바닥 전체로 감싸자 탁은 변명을 멈추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대표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탁을 보며 세진은 시끄럽게 자신을 채우던 소리들이 끓어오르고, 동시에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센티넬이 아니라 가이드였고 세진이 여자에게 느낀 건 ‘공명’이라고 부르는 거였다. 기본적으로 모든 센티넬들은 모든 가이드와 공명할 수 있다. 공명이라는 건 가이드가 센티넬을 진정시키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말이지만, 대부분은 공명을 그냥 ‘가이딩’이라고 불렀다. 특별히 ‘공명’이라고 따로 부르는 가이딩은 거의 구전설화처럼 여겨졌다. 세상에는 아주 약간의 접촉만으로도 센티넬을 안정시켜준다는, 그 센티넬 개인에게만 꼭 맞는 가이드가 있다고 한다. 서로에게 완벽하게 맞는 센티넬과 가이드 페어의 공명은 말 그대로 완벽해서, 가이드가 가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센티넬을 안정시켜줄 뿐만 아니라 더 강해지게 만들어 준다고도 한다.


 세진은 완전한 가이딩을 믿지 않았다.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존재하더라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나만을 위한 단 한 명.



 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다른 센티넬과 함께. 세진은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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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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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1-1

불야성 / 2017. 1. 30. 13:44

기본 센티넬버스 세계관에서 약간 변형시킨 부분이 있어요 읽다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거에요!













-



 이미 한차례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 인사들의 건배사와 서로간의 인사치레를 주고받은 연회장만큼 어수선한 곳이 또 있을까. 누군가는 이미 자리를 떴고, 누군가는 뒤늦게 헐레벌떡 얼굴을 비추러 나타났으며, 사용인들은 고용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쉬지 않고 회장 안팎을 뛰어다녔다.



 세진이 나타난 건 그런 때였다.



 조금 취기가 돈 얼굴로, 손바닥만 한-문자 그대로 손바닥만 한-가방조차 없이, 새빨간 오프숄더 드레스 위에 남성용 큰 재킷을 걸치고 회장을 향해 걸어오는 세진을 막아서는 경비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전부 허리춤에 ‘센티넬 감지기’를 달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세진에게 써보려 하지 않았다. 개중 가장 잔걱정 많은 요원만이 다가와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경비원의 호의를 가벼운 눈웃음으로 거절한 세진은, 그러나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걸음걸이부터 달라졌다.




 세진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걸치고 온 남성용 재킷 안주머니에서 얇은 화면을 꺼내 대상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무진그룹의 이사이자 미개척토지개발기획실 ‘현장정리’팀을 맡고 있는 가이드가 오늘 세진의 일감이었다. 인터넷으로 기사 사진 같은 걸 몇 장 더 찾아보긴 했었지만 면식 없는 사람을 이 복잡한 곳에서 찾아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었다. 워낙 술 좋아하고 과시하고 으스대며 노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라니 벌써 자리를 뜨진 않았을 거였지만, 세진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능력’을 써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대부분의 행사장과 마찬가지로 이 연회장에도 센티넬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지만, 가이드가 데려온 센티넬들은 출입할 수 있다. 그러니까 능력이 좀 발현된 것만으로 경보기가 울리진 않을 터였다. 세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가이드로 추정되는 사람이건 센티넬로 추정되는 사람이건, 혹은 그냥 일반인이건, 다들 이미 조금씩 취해 있거나 각자 이곳에 온 목적-대부분은 사업과 인맥-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거나하게 취해 몸도 못 가누고 능력을 흘리고 있는 센티넬을 경비원들이 조용히 데리고 나가는 것도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어수선했다.





 세진은 웨이터로부터 샴페인 잔 하나를 건네받고 천천히 회장 안을 거닐며 서있기 적당한 곳을 찾았다. 기둥 뒤로 다섯 발짝 떨어진, 빈 접시가 몇 개 쌓인 테이블 옆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얇은 실처럼 의식을 흩어놓고 세진은 벽에 몸을 기댔다. 일단 이 홀에는 없다. 발코니와 화장실까지 천천히 탐색망을 넓혀봤으나 역시 없었다. 경매가 끝난 경매장에서는 대범한 연인들이 연인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복도 구석에는 아까 끌려 나간 센티넬이 경비 한 무리의 추파를 받고 있었다. 세진은 신물이 난단 표정으로 그쪽에서는 신경을 거뒀다. 다른 층에 있을 가능성도 살펴봤지만 다른 층으로 통하는 문은 연회장 출입구밖엔 없었다. 타겟이 이미 연회장을 떠난 거라면 탐색이 더 막막해진다.



 “아 방 잡은 거면 답 안 나오는데.”



 아예 이 호텔을 벗어난 거면 더 답 안 나오고. 세진은 짜증이 나서 들고 있던 샴페인을 한입에 털어버렸다. 희미하지만 광범위하게 능력을 쓰고 있던 탓인지 도수 낮은 샴페인에도 취기가 확 돌았다. 연회장에 펼쳐놓은 탐색망을 서서히 거두며 세진은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흩어져있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세진은 자신에게 붙은 시선 하나를 눈치 챘다. 아무리 탐색에 신경을 쏟더라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되는 거였는데, 뻔뻔하게 센티넬이 아닌 척 해야 할지, 취해서 의식이 멋대로 흩어졌다고 변명해야할지, 상대방이 왜 쳐다보는 건지 모르니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도 결정할 수 없었다. 세진은 그냥 취해서 꼴값 떠는 할아범이면 차라리 해결하기 쉽겠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대수롭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는 척 시선의 주인을 확인하려 했던 세진의 계획은 세진이 눈을 뜨자마자 박살났다. 너무 단번에 세진의 시야에 들어온, 세진을 ‘관찰’하고 있던 여자에게서 세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진의 모든 세포가 제각기 의지를 가진 것처럼 주장해댔다.



 저기. 맞아. 내가. 있어. 나. 방해하면. 반드시. 저 사람이야, 놓치지 않아. 나는. 찾았어. 당장. 내가. 아니 내가. 다 죽일 거야. 저거야. 전부 다. 나도. 절대로. 원하는 거. 가질 거야. 내가. 나만. 내거야.



 감정인지 생각인지 모를 것들이 순식간에 세진을 가득 채웠다. 여전히 시선은 이어진 채로, 파도에 밀리는 것처럼 세진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 쪽으로 걸어가다가 앞에 있던 테이블에 부딪쳤다.




 빠르게 움직이던 중은 아니어서 테이블은 가볍게 흔들렸을 뿐이지만 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잔과 접시, 포크 따위가 만들어낸 소음은 생각보다 컸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는 아니었으나 하필 그 때 테이블 위를 치우던 웨이터들이 달려와 세진에게 괜찮으신지, 모셔다 드릴 필요가 있는지 따위를 질문할 정도는 됐다. 세진이 그냥 조금 취한 것 같다며 괜찮다고 하는데도 웨이터들은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릇을 여기에 둬서 죄송하다는 둥(원래 그러려고 외진 곳에 놓아둔 테이블 같았지만), 잠시 쉬실 수 있게 위층 방으로 모시겠다는 둥, (아무것도 튀지 않았는데도) 옷 세탁에 30분이면 된다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도 세진이 걸친 남성용 재킷과 목걸이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좋아보였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비싼 것들이었다. 재계 거물들의 파티장에 잠입하기에 비싼 장신구와 옷만큼 완벽한 위장 수단은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게 오히려 세진을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배상하겠다고 거의 울먹이며 말하는 직원을 달래다시피 떼어놓는 중에 세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았다. 웨이터들보다 저쪽이 배는 위험했다. 저 여자는 자신에게 뭔가 했다. 세진을 똑바로 보며 걸어오는 이 순간에도 전혀 센티넬처럼은 안 보이는데, 하지만 분명 뭔가를 했다. 자신처럼 정신계통으로 발달한 센티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진이 아는 센티넬 중 누구도 이런 기술을 쓴 적이 없다. 온 몸을 뭔가가 지배하는데 그게 너무 편하게 느껴져서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다.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잠식하는 그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주 생소한 감각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비슷한... 이것과 조금 비슷한 뭔가가 있었는데.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했다. 웨이터고 의뢰고 다 팽개치고 그냥 도망가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 여자가 나에게 뭘 한 건지, 방금 그것으로 저쪽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이대로 학교로 돌아가도 되는 건지, 세진이 알아내야할 건 끝도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세진은 점점 더 생각하기가 힘들어졌다. 세진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고 웨이터들의 표정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이건 정말 곤란했다. 둘 중 하나라도 사라져줬음 좋겠다. 하나 정돈 그냥 조용히 없애버릴 수... 세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낼 뻔 한 진심을 막으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제스쳐가 웨이터들을 더 경악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제 여자는 세진의 바로 뒤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세포단위로 아우성치는 소리에 잠겨 외부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세진이 들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여자의 목을 조르고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소거되었다. 세진의 속을 시끄럽게 만든 당사자에 의해서.



 “상무님, 여기서 뭐하세요?”



 여자가 힘겹게 서있는 세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마자 세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게 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자신과 여자가 선 곳만 다른 공간으로 분리된 것 같았다. 세진이 상무라고 불리자 직원들이 다시금 자세를 바로 고쳤다. 아니면 이 여자가 센티넬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대단한 사람인 거든가.



 “대, 대표님.”


 “내 손님인데, 여기 무슨 문제 있어?”



 대표라니, 두 번째 추측이 맞았다. 직원들이 허둥지둥 설명하는 중에도 대표라고 불린 사람은 세진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세진은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감각은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왠지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까 올라왔던 술기운이 아직도 남은 건지, 오늘 컨디션에 비해 능력을 너무 과하게 써서 지친 건지, 세진은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하곤 정반대의 충동과 싸워야했다. 여자가 자신을 더 감싸 안게 하고, 여자에게 좀 더 편하게 기대고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가까이... 세진은 불 꺼진 경매장에서 둘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연인들을 떠올렸다. 아까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 같던데 아직도 하고 있으려나? 세진의 의식이 그쪽으로 뻗었다. 그 사람들은...



 “그래, 이 친구는 이제 나랑 있을 거니까 괜찮아. 할 일들 해.”



 여자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지고 나서 세진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무의식중에 여자의 품을 파고들었다거나 몸에 손을 댔다거나 하진 않았다. 세진은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며 이번 의뢰는 정말로 포기하고 이쯤에서 철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우선 이 여자에게서 벗어나야했다.



 “허락 없이 손대서 미안해요.”


 “아 아뇨,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하, 하하, 직원 분들이 많이 친절하시네요.”


 “벌써 돌아가게요?”



 아는 사이처럼 말을 붙여오는 여자를 보며 세진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고 무탈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나는 그쪽이 뭔가 찾는 중인 줄 알았는데.”



 세진이 뭘 해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패 한 장을 깠다. 세진에겐 다행이었다. 센티넬이 완전 출입불가능한 곳도 아니니, 학생인 것만 들키지 않게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 죄송해요. 같이 온 분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조용히 찾고 싶어서, 근데 먼저 돌아가셨나 봐요. 저도 이제,”


 “그 동행인은 물론 가이드겠죠?”


 “...그럼요.”



 세진은 학교 밖에서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피가 식는 기분에 빨리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육 마치고 정식 등록되면 앞으로 수천만번은 더 겪을 일이었다. 같은 센티넬이면서 가혹하게 구는 상대에게 조금 짜증도 났다. 적당히 가이드 이름만 대면되겠지, 이 여자가 여기 온 사람들 동행인까지 다 아는 것도 아닐 테고.



 “무진건설 최원재 이사님하고 같이 왔어요. 그냥 옆에 서있기만 하면 된대서 제가 등록증은 따로 챙겨 오질 않았는데...”


 “최이사님 동행인은 남자였는데. 아직 여기서 나가지도 않았고.”


 “뭔가 잘못, 아셨나 봐요.”



 웃으며 가볍게 말했지만 세진은 등줄기부터 서늘해졌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일단 튀자. 우선 빠져나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지도,



 “경매는 아까 다 끝났는데 경매장이 소란스럽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지 그랬어요. 아직 저런 건 부끄러울 나인가?”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세진의 시선과 모든 신경이 경매장으로 쏠렸다. 방금까지 능력을 많이 써서 지쳤던 게 거짓말처럼 세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흔적 없이 빠르게, 그리고 선명하게 벽 너머를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경매장 구석 소파에서 좋다고 끙끙대고 있는 남자가 최원재였다. 이제보니 경매장 문 앞을 어떤 남자-아마도 눈앞의 여자가 말한 최원재의 남자 동행인-가 티 안 나게 지키고 있었다. 왜 아까는 몰랐던 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모든 상황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엇.”



 정신을 차린 세진이 다시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이미 멀어지는 중이었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은 것인지, 세진이 고개를 돌린 그 순간에 여자도 세진 쪽으로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작게 한번 끄덕였다. 그게 허락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세진은 조용히 경매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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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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