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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진단 키워드? 주제로 나온 '미래의 추억'

봄이 가기 전에 다 쓰려고 했는데,, 일단 앞부분을 올려두면 뒤쪽도 쓰겠지 싶어서 올립니다






 









 여기가 어딜까. 멍하게 답이 나오지 않을 자문을 해본다. 낯선 곳. 하지만 익숙한 느낌. 낯선데 익숙하다니 이상한 말이다. 와봤었나? 언제? 햇살이 따뜻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여기가 어디든 내가 지금 이런 곳에 있다는 게 가장 이상하다. 나는 내 방 내 침대에서 잠들었었는데. 일단 이곳은 야외고, 우리 동네도 아니고, 어... 내 방? 어떤 내 방? 내 방에 침대가 있었나? 아 광장에 사람이 많다. 벚꽃이 피었다. 벌써 아이스크림을 파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세진은 십몇 년 전의 나고야에 있었다. 그곳엔 십몇 년 전의 이경도 있었다. 세진은 혼란스럽고 배고픈 상태로, 반은 알아듣겠고 반은 모르겠는 일본어 사이를 무작정 걷다가 어린 이경과 부딪쳤다.



 “아야! 죄송, 아니 스미마센. 어?”



 세진은 이경을 알아봤다. 세진이 아는 서이경보다 약간 어려 보였고, 더 캐주얼한 옷을 입었고, 머리는 덜 정돈됐고, 표정에는 훨씬 불만이 가득했지만 분명 이경이었다. “대표님?”하며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세진을, 이경은 한번 흘겨보기만 하고 지나가려 했다. 세진이 이경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서이경! ......대표님 맞죠? 아 다행이다. 저 지금 여기가 어딘가 하고 엄청...”



 세진의 안도 섞인 호들갑이 이어지는 동안 이경은 미간을 구기고 그냥 지나갈지 뭔가 대꾸를 할지 고민했다. 이번엔 또 어디의 누가 보낸 수작일까, 짐작 가는 곳은 많지만 이런 젊은- 게다가 한국말을 쓰는 여자를 보낼만한 곳은 짚이지가 않았다. 이경은 짜증에 짜증을 더하며 삐딱하게 세진을 돌아봤다.



 “어디서 보냈어?”


 “네?”


 “어쩌다 걸린 심부름꾼 같은데, 어디서 보낸 건지만 말하고 돌아가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 근데 저 지금 너무 배고픈데...”



 주머니엔 지갑도 없고 여긴 어딘지도 모르겠고, 세진이 계속 종알대며 다가왔다. 이경은 주춤대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경이 물러난 만큼 세진은 더 걸어왔다. 이경은 빨리 끝낼 심산으로 세진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세진은 맥없이 끌려 이경에게 붙잡혔다.



 “아, 아야, 아파요! 아파요 대표님.”



 이경은 세진이 자신을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렸다. 한국말을 어설프게 배운 사기꾼이거나 사람을 잘못 봤거나. 하지만 다른 사람과 헷갈렸다기에 세진은 이경의 이름을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다.



 “피차 바쁠 텐데 빨리 끝내지. 어디서 보냈는지만 말해.”


 “아무데서도 안 보냈어요!”



 세진이 소리를 지른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 몇이 이경과 세진을 힐끔거렸다. 이경은 오늘 기분이 언짢은 채로 집을 나섰고, 평소보다 훨씬 참을성이 없었다. 이경이 세진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줬다. 세진이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대표님이 알려주셨으니까 알죠! 대표님 왜 그러세요?!”


 “너 누구 밑에서 일해?”


 “대표님이요!”


 “당신 대표가 누군데?”


 “서이경!”


 “수작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대표님 진짜 왜 그러시냐구요! 저 세진이에요!”



 실랑이가 길어지자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는 사람이 생겼다. 이경은 결국 세진을 던지듯이 놓아주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사람 잘못 본 거면 이렇게까지 했으니 알아서 도망갈 것이고, 원하는 게 있으면 다시 따라 붙을 것이었다. 또 따라오면 이번엔 으슥한 곳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경의 예상대로 세진은 아픈 팔을 문지르면서도 이경을 따라왔다. 반걸음 정도 뒤에서 이경의 눈치를 보며 걷던 세진이 다시 이경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용건만 말해. 계속 헛소리 할 거면 꺼지고.”


 “저 진짜 모르세요?”



 세진이 고개를 갸웃대며 이경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경은 반사적으로 세진을 쳐낼 뻔 했다가 멈칫하고 심호흡했다.



 “내가 그쪽을 알아야하나?”


 “네? 그야 당연히...”


 “우리가 무슨 사인데?”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이경의 물음에 세진의 말문이 막혔다. 아 저 그러니까 저희가 무슨 사이냐면요... 우물대는 세진을 보던 이경에게 갑자기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오늘 이경이 짜증난 채로 집을 나선 이유는 아버지에게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경이 일한금융에서 맡고 있는 일은 수금이었다. 이경 혼자 맡은 일은 아니었으나 이경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했다. 그리고 혼자서도 여러 명의 몫을 해냈다. 그랬는데, 얼마 전 다른 구역 애들이랑 충돌이 좀 있었다. 따지자면 그건 이경이 맡은 업무는 아니었다. 그쪽에서 시비를 걸어와서 대응해준 것뿐이고 그것도 역시 ‘혼자서’ 잘 처리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 성엔 별로 안 찼던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 뜬금없이 사람을 붙여줄 테니 같이 일해보라는 얘기를 꺼냈다. 그건 꼭 경호원을 붙여주겠단 소리로 들려서 이경은 기분이 나빴다.




 일한금융에 이런 직원도 있었던가. 이경은 세진을 찬찬히 뜯어봤다. 어쩌면 이 여자가 아버지가 붙여주겠다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경호원이라기엔 너무 비리비리하고, 방금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경보다도 약했다.



 세진을 관찰하던 이경과 눈이 마주치자 세진이 헤헤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이경은 미간을 구겼다. 단지 미소일 뿐이라 해도,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세진은 온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있거나 이경에게 특히 잘 보이고 싶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직원은 죽었다 깨나도 안 쓸 것 같았는데. 심각한 얼굴의 이경의 눈치를 보던 세진은 갑자기 날짜를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에요?”


 “뭐?”


 “오늘 날짜요.”


 “4월 9일.”


 “헉, 내 생일이네. 아, 아니 그, 연도는 몇 년도에요?”



 이경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아버지가 정말로 이런 직원을 돈 주고 쓰고 있다고? 그 서봉수가? 이경은 미심쩍은 티를 팍팍 냈지만 세진이 물은 것을 알려주긴 알려줬다. 날짜를 듣고 세진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좀 둘러보다 비로소 이경이 조금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았다.



 “제가 대표...아니 서이경씨... 부하는 아직 아닌데 제가 미래에 부하가 될 예정이거든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뭐냐... 그... 우리가 친구... 비슷한 것도 될 예정이고...”



 ......내 회사에선 절대 이런 직원은 쓰지 말아야지. 엉망진창인 세진의 말을 들으며 이경이 생각했다. 한국어 발음은 유창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경은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아들었다. 몇 달 전 조이사님이 아버지에게 또래 친구 어쩌고 하던 대화를 주워들은 적 있다. 친구가 필요 하네 마네 그런 얘기는 김작가와 조이사가 심심하면 던지는 화두였고 서봉수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말도 그냥 흘려보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이 터지자마자 사람을 붙인 걸 보면 어쩌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친구 필요 없는데.”


 “있어본 적은 있으시구요?”



 이경이 세진을 노려봤다. 세진은 딴청을 피우며 필요해서 친구가 되는 게 친구냐고 꿍얼댔다. 언제 봤다고 능청스럽게 구는 세진 때문에 이경은 헛웃음이 났다.



 “말만 많은 부하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고 이경은 휙 돌아서 가야할 길을 갔다. 돌아야할 곳은 많은데 세진 때문에 지체된 시간이 짧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는 이경 뒤를 세진이 도도도도 소리가 나게 따라왔다. 이경이 신경질적으로 휙 돌아보자 세진이 또 활짝 웃었다.



 “말 많이 안 할 게요. 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조용히 있을 수 있어요.”



 걸음 소리마저 시끄러운 주제에 말은 잘했다. 전혀, 아주 조금도 설득력 없는 말이었지만 이경은 세진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기로 했다.



 “방해되면 바로 버리고 갈 줄 알아.”


 “넵.”



 아버지가 시킨 거라면 이 여자와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거니와, 이런 타입을 상대하는 건 성가셨다. 이것저것을 설명하고, 돌아가도록 설득하고, 아버지에게 전언을 전하게 만들 시간도 인내심도 없었다. 따돌리려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다 이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오늘 일을 빨리 마친 뒤 아버지와 담판 짓는 편이 손해가 적다는 게 이경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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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 |

[이경세진] 공모 3-1

불야성 / 2017. 3. 19. 00:41

3편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중이라 늦었어요,,, 한 편은 텀 길지 않게 올리고 싶었는데 3-2는 좀 늦어질지도 모르겠어요.. 8 8












-



 “또 왔냐? 오늘은 좀 잘 숨었다?”


 “아! 야, 너, 좀, 기척 좀 하고 다녀! 간 떨어지겠네. 아오.”



 세진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하품하던 탁이 놀라 핸들에 무릎을 박았다. 세진은 무릎을 문지르며 징징대는 탁에게 간식거리를 안겨주고 조수석 의자를 뒤로 밀어 다리를 편하게 쭉 뻗었다. 이경과의 거래 이후 세진의 바쁜 일과에 추가된 한 가지는 학교 근처에 잠복하고 있는 탁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처음 공사장에서 만났을 때부터 쟤, 너, 야, 하며 반말을 쓰는 탁에게 세진도 진즉 말을 놓아서, 대화만 들으면 둘은 꽤 친해보였다.



 “나 왔다~ 하면서 오면, 마중이라도 나오게?”


 “아니. 빨리 튀어야지.”


 “너 솔직히 말해봐. 사실 숨을 생각이 없지? 어떻게 맨날 들켜?”


 “야 내가 원래는... 원랜 안 이래. 아 이거 정말... 너야말로 솔직히 말해봐. 나한테 추적기 같은 거 심었어?”



 세진이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터트렸다.



 “너를 왜?”


 “근데 어떻게 이렇게 바로 찾아내? 아니지, 애초에 나 일하는데 왜 찾아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나 오면 너도 좋잖아, 아냐?”



 이번에는 탁이 실소를 흘릴 차례였다. 손으로 턱받침까지 하고 묻는 세진에게 탁은 고개를 저어보였다.



 “좋겠냐.”


 “그래도 내가 맨날 간식도 갖다 주잖아.”


 “이 차에서 뭐 먹으면 안 된다니깐.”



 탁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진이 사온 피자빵과 카스테라를 양손에 들고 뭘 먼저 먹을지 고민하듯이 번갈아 봤다.






 처음 세진이 잠복하는 탁을 찾아낸 건 우연이었다.



 사실 완전 우연은 아니었다. 탁이 내는 특유의 바람소리를 들은 건 우연이었지만, 혹시나 탁을 대동한 이경이 근처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굳이 학교 주변을 이 잡듯 탐색한 건 우연이라고 할 수 없었다.



 탁을 찾아내고 탁이 혼자인 것을 알았어도, 세진은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이경이 저를 감시하라 보낸 것이 아닐까하는, 객관적으로 볼 때 세진에게 딱히 좋을 것도 없는 가정이었다. 절대 너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하는 탁을 추궁한 끝에, 세진은 밀려오는 실망감에 파묻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세진은 이경이 자신을 신경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망했단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세진은 그럼 여긴 왜 왔냐고 탁에게 계속 캐물었다. 탁은 보기보다 완고해서, 돌아오는 답이라곤 “그거까지 얘기하면 대표님한테 혼나” 뿐이었다.



 “뭐 어떻게 혼나길래? 월급이라도 까여? 아님 뭐 어디 잡혀가서...”


 “너 되게 전근대적인 발상을 한다. 우리 대표님을 뭘로 보고.”


 “애도 아니고, 그냥 혼나는 게 무섭냐?”


 “야 그거는, 그니까, 누군지가 중요한 거지.”



 탁이 걱정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작은 한숨을 뱉었다. 잠시 정적이 이어지며 탁의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먼 곳을 훑었다. 자신의 대표님을 생각하는 중인 것 같았다. 이경을 생각하는 탁을 보며 세진은 이경과 탁을 생각했다.



 “대표님한테 미움 받기 싫구나.”



 탁이 구겨진 얼굴에 의아함까지 담아 세진을 쳐다봤다.



 “당연하지, 나 월급 주는 분인데. 암튼 너 좀 가라. 나 일해야 된다. 아... 너한테 들킨 것도 아시면 한소리 하실 거 같은데.”



 세진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걱정하고 있는 탁을 두고 널찍한 차 안을 훑어봤다. 희미한 가죽 냄새가 났다. 세진은 이경이 저 자리에 앉았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스스로가 징그럽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한번 의식하자 세진은 탁의 기척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탁이 정말로 세진 때문에 학교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에는 세진의 전 의뢰인 정도가 있었다.




 세진이 이경에게 의뢰받은 일은 단순했다. 이경을 처음 만나게 해준-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세진과 이경이 만난 일은 물론 서이경을 알지도 못하겠지만-의뢰인 정미연의 미등록 폰을 복제하는 일이었다. 세진에겐 다른 센티넬들이 드글대는 곳에서 남의 물건을 몰래 빼돌렸다가 다시 돌려놓는 일보단, 이경이 떠나고 혼자 남은 응접실에서 붉은 얼굴을 드는 게 훨씬 더 어려웠었다.



 조이사에게 임무 설명을 들을 때 이미 세진은 미연의 미등록 기기가 뭔지 알고 있었다. 의뢰 완료를 위해 최원재 사진을 뽑아 보여준 날, 미연이 손마디가 하얗게 될 때까지 눌러 쥐고 있던 핸드폰이 그것이었다. 집어 던지거나 으스러트리고 싶은 걸 세진 앞이라 참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그날 박살나지 않았길 바란 게 무색하게도 폰은 사감에게 들키지 않게 주문제작한 케이스 가장 아래쪽에 곱게 놓여있었다. 핸드폰 입장에선 캐비닛에 처박혀 있는 건 물리적으로 박살난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덕에 수월하게 일을 마친 세진은 며칠 뒤 미연이 또 다른 미등록 폰을 쓰고 있는 것을 봤었다.




 세진은 그래서 탁이 잠복 중인 것이라 생각했다. 최원재와 관련된 필요한 데이터만 뽑아낸단 말은 거짓말이었고, 미연이 최원재와 주고받을 연락을 염탐할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미연이 세진의 보고를 받고 화나서 최원재와 연락하는 핸드폰을 거들떠도 안 보게 될 것은 서이경의 예상범위 밖이었을 것이다. 이 추측은 미연이 외출중일 때는 탁의 기척이 느껴진 적 없었기 때문에 점점 더 기정사실화 되어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세진은 왠지 500만원을 훔친 기분이 되었다.



 이경이나 세진이나 최원재와 정미연의 관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량은 비슷했다. 이경이 자신을 언제부터 조사해놓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세진이 찍은 사진이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었고 미연의 의뢰 내용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정미연과 최원재의 관계가 변화할 것은 세진이나 이경이나 조금만 생각해봤으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경이 500만원을 지불하고 가져간 복제품이 값비싼 쓰레기가 됐다 해도 세진이 빚진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그러나 언제나 애매한 양심이 문제였다. 세진이 실제로 이경에게 빚진 부분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의도야 어쨌든 탁은 위험한 순간에 세진을 도와줬다. 그리고 최원재와 최원재의 센티넬들이 세진을 똑똑히 봤는데도 세진이 지금까지 무사한 걸 보면 ‘김작가’라는 사람이 세진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준 것 같았다. 물론 둘 다 세진이 요청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이경의 지시였을 것이다.



 이경이 같이 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확인 차 탁에게 찾아갔다가 탁과 친해진 것도 가책의 일부분을 차지했다. 같은 자리에 몇 시간씩 혼자 앉아 갑갑해 몸부림치는 탁을 보면 좀 불쌍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뭘 해봤자 자신은 돈 한 푼 못 받을 일이었고, 탁이 정확히 어떤 것을 얻어가려고 잠복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기도 했을 뿐더러, 탁의 감시가 일주일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미연에게도 조금씩 미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세진씨. 잠깐 얘기 좀 해요.”



 그래서 세진은 미연이 열람실에서 자신을 불러냈을 때, 놀라서 심장이 못해도 배꼽까지는 떨어진 기분이었다. 세진은 미연과 세진을 번갈아가며 의아하게 쳐다보는 마리를 두고 쭈뼛거리며 미연을 따라 사람이 없는 바깥 복도로 나갔다.



 “ㅇ, 왜 불렀어요?”


 “왜? 그건 세진씨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요?”



 미연이 찡그리며 따져 물었다. 그제야 세진은 요즘 자신도 모르게 미연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대로 다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새로운 정보를 얻을 기회를 대충 날리고 싶지도 않았다. 세진은 눈썹에 힘을 빼고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그...냥 걱정이 돼서요. 저번에 그런 일도 있었고.”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이건 업무 이후에 애프터서비스 차원에서...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세진의 말에 미연이 얼굴을 더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다. 미연의 반응을 본 세진은 미연을 조금 화나게 만들기로 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흥분은 진실의 입을 가볍게 한다.



 “근데 미연씨 성인이긴 하지만 아직 학생인데, 그런 건 좀... 좀 그래 보이던데.”


 “뭐라구요?”


 “유부남인 건 둘째 쳐도 남자가 나이도 많고 여자도 많고, 뭐 돈도 많아 보이긴 했지만...”


 “이세진씨!”


 “아 물론, 미연씨가 돈 때문에 만난다고 생각하는 건 절대, 절대 아니구요. 근데 요즘도 자주 나가는 거 같길래.”



 미연이 분과 짜증과 억울함이 뒤섞인 눈으로 세진을 노려봤다. 세진에게 느껴지는 압박감은 기분 탓만이 아닐 것이다. 세진은 자신과 비슷한 미연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세진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버티며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을 유지했다.



 “정말 불쾌하네요. 내 연애사 하나 알았다고 이세진씨까지 나를 그딴 식으로 매도해도 되는 줄 알아요?”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로. 그냥 연애사니까 제가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죠. 지금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겠지만, 사랑이라는 거, 지나고 나면 정말 별 거 아니에요. 한 사람한테만 너무 연연해하지 않아도 인연이라는 건,”



 세진의 투명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미연이 실소했다.



 “하, 사랑? 인연?”


 “아직 젊으니까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죠. 그치만 그런 감정은 어차피 충동적인 거고,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낭만적이게 사랑타령이나 하는 게 지금 누군지 모르겠네. 내가 고작 사랑 때문에 끌려 다니는 거 같아요? 남 일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어서 정말 좋겠네요. 이세진씨가 이렇게 주제파악도 안 되는 인간인 줄 알았으면 내가 일 안 맡겼지. 나이 좀 많다고 간섭할 권리 생기는 것도 아닌데 아무한테나 참견 마요.”



 이를 갈며 말을 쏟아낸 미연은 더 따질 말이 남은 것처럼 울컥이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세진에게서 등을 돌렸다. 세진을 구길 듯이 찍어 누르던 압력도 미연을 따라 멀어졌다. 세진은 미연이 복도를 벗어나기 전에 급히 외쳤다.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A/S니까 부담 갖지 말구!”



 세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연 뒤쪽의 유리창이 터져 박살났다. 미연은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게 며칠 전이었다. 그 사이에 미연은 외출계를 한 번 냈고, 한 번 몰래 빠져나갔다. 미연과의 대화에서 알게 된, 미연이 최원재와 뭘 하는지는 몰라도 떳떳하지 못한 일이고, 그게 삼류 연예 잡지에 실릴 가십거리 정도가 아니라는 것, 미연과 최원재 사이를 아는 누군가가 세진처럼 미연을 열받게 한 적 있다는 것 외에 추가로 알아낸 건 없었다.



 미연이 두 번 외출하는 동안 탁도 세진에게 두 번 발각됐다. 세 번째로 걸렸을 때 탁은 시무룩하게 쇼핑백 더미를 세진에게 안겼다. 쇼핑백마다 비싸 보이는 옷과 구두, 가방, 장갑, 악세서리 같은 게 담겨있었다. 마지막으로 열어본 쇼핑백에서는 남성용 정장 재킷이 나왔다. 이경을 처음 만났을 때 세진이 걸치고 있던 것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다.



 “이게 뭐야?”


 “수트, 코트, 목걸이, 귀걸이, 구두, 어... 그리고...”


 “대표님이야?”



 쇼핑백 내용물을 살피는 척 하던 탁이 찡그린 얼굴로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너한테 들킨 거 들켰어.”


 “2주면 오래 숨겼지. 그래서?”


 “그래서는, 나 엄청 깨졌다. 친구 생겨서 신났냐 하시던데.”



 세진은 불퉁한 탁에게 조금 더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니가 대표님한테 깨진 거랑 이게 다 무슨 상관이냐고.”


 “니가 나 또 찾아내면 주라던데.”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넌 이유도 모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냐? 이 많은 걸 대체 나한테 왜,”


 “주면 그냥 받지 말 진짜 많네. 그냥 우리 사칙이 그래. 첫째, 지시받은 일은 무조건 한다. 둘째, 지시받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 셋째, 어떤 일에도 이유는 묻지 않는다.”


 “니네 사칙 같은 건 모르겠고, 난 이거 안 받아. 못 받아.”


 “좀 그냥 가져가면 안 되냐?”


 “너 같으면 이렇게 비싼 걸 이유도 없이 받겠냐?”


 “이유. 뭐, 있을 수도 있지.”


 “무슨 이유?”


 “아, 잘 생각해 보면 그런 게 있을 수도 있잖아!”


 “왜 소리를 지르냐!”


 “그, 그건 미안. 어쨌거나 내 임무는 이거 전달이니까, 안 가지려면 버리든가, 아님 니가 직접 돌려드리든가. 하여튼 난 줬다.”



 옷과 장신구를 가져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세진과 니가 안 가져가면 내가 또 혼난다는 탁의 실랑이가 길어졌다. 자긴 바쁘니까 제발 그만 가라고 사정사정하던 탁은 결국 세진과 물건들을 차 밖으로 밀어내고 바로 시동을 걸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세진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진 쇼핑백들을 챙겼다. 받을 이유는 없는 것들이지만 버릴 수도 없고, 또 돌려주러 이경을 직접 찾아갈 생각을 하니 기분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쇼핑백은 사무실에 그냥 놓고만 와도 되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돌려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세진은 짐들을 곱게 챙겨 방에 가져다 놓았다. 벌써 4시가 넘었으니 지금부터 나갈 준비를 하다간 퇴근시간이 될 거 같고, 왔다 갔다 하느라 학식 시간 놓치면 밖에서 저녁 사먹을 돈도 없고, 입을만한 옷은 하필 어제 세탁실에 맡겼고...



 세진은 이경에게 오늘 갈 수 없는 변명들을 쌓아올리며 복도를 서성였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 준비가 옷이든 화장이든 마음이든. 세진의 손에서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이경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 연락을 하면 뭐라고 하면서 만나자고 해야 할지 고민하며 괜히 날씨 어플을 켜보던 세진의 눈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미연이었다. 세진이 반사적으로 아는 체 하려는 순간 미연의 모습이 홀로그램 스위치를 끈 것처럼 사라졌다. 세진의 것과 비슷한 능력이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학교를 몰래 빠져나가기에 유용한 스킬이었다.



 세진은 미연이 몰래 나간 횟수에 1을 더하다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미연이 여기 있는데 탁은 뭐가 바빠서 먼저 갔지? 미연이 목표가 아니었다면 오늘 학교에는 왜 왔지, 단지 선물을 전하기 위해서? 고작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의문들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자동차로 세진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을 미행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세진과 미연은 조금 무리하면 몇 블록씩 순간이동이 가능했으므로 차도를 따라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가이딩을 받지 못할 상황이라 순간이동을 할 수 없다고 해도, 꼬리가 붙은 것 같으면 근력만으로도 건물 몇 개 뛰어넘어 따돌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미연의 능력을 미리 알지 못했다고 해도 미행 한번이면 깨달았을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탁은 왜 매번 차를 몰고 오지? 그것도 항상 똑같은 차를? 탁의 능력이면 차를 타지 않는 편이 훨씬 눈에 덜 뜨일 텐데. 이제 11월도 끝나가고 그냥 있기는 추우니까, 탁이 차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아서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세진은 자신이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나는 탁의 존재를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알 수 있었지? 탁이 지금까지 잠복을 한 게 맞긴 한 건가? 정미연이 학교에 없을 때 탁도 근처에 없었던 이유가, 혹시, 탁이 미연을 따라가서가 아니고 그 반대였다면?



 세진은 야상을 대충 꿰어 입고 황급히 미연의 흔적을 찾아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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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님의 세자매 썰(옥다정-서이경-오수경 자매) 기반 세진이경입니다! 같은 배우 필모 역할 셋이 자매로 같은 집에 살고 있다는 설정이며 그 외에 다른 설정들은 불야성과 같습니다. 이안님 썰 다 재밌어요(눈물줄줄

(이안님 원트윗 https://twitter.com/Be_dit/status/842568328228954113)











-



 주말에도 집에서 일하는 이경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이 집에서 정중하게 노크를 하는 사람은 세진밖엔 없었으므로, 이경은 누구냐고 묻지 않고 들어오라고 했다. 예상대로 차를 들고 온 세진을 보고 이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이 차를 내려놓는 동안 이경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뒷목을 주물렀다. 고맙단 말에도 나가지 않던 세진이 쟁반을 끌어안고 꾸물대다 이경에게 말을 붙였다.



 "대표님 많이 피곤하세요?"

 "아니."

 "아... 그러시구나."



 칼 같은 부정에 세진이 바로 시무룩해졌다. 이경은 잠시 눈을 굴리곤 목소리에 다정함을 조금 담아 대답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피곤해."

 "그렇죠? 피곤하시죠?"



 이경은 팔짱을 끼고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지는 세진을 쳐다봤다.



 "내가 피곤한 게 좋니?"

 "아뇨 그게 아니고, 제가 어디서 봤는데... 그게... 어..."

 "계속 뜸들일 거면 나가구."

 "피곤할 때 포옹을 하면 스트레스가 사라진대요."



 세진의 말에 이경의 눈썹이 무슨 헛소리를 하냐고 묻는 것처럼 구겨졌다.



 "지, 진짜루요. 그 코티솔인지 뭔지가 스트레스 받을 때 나오는 호르몬인데, 포옹하면 그게 감소한대요."

 "그래서?"

 "네?"

 "나 안아주려고?"



 나른하게 올려다보는 이경의 풀어진 목소리에 세진이 덜그럭대며 책상에 쟁반을 내려놓고 어정쩡하게 두 팔을 벌렸다. 자기가 먼저 말해놓고, 눈도 못 마주치고 어색하게 서있는 모습에 이경은 속으로 웃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세진의 팔 아래로 팔을 두르고 세진의 왼쪽 어깨와 목 사이쯤에 고개를 기대자 세진도 이경의 등을 감싸 안았다. 세진의 심장이 콩닥대는 게 느껴졌다.



 "어떠세요? 스트레스가 좀 풀려요?"



 3초도 안 지났는데 세진이 민망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세진이 말할 때마다 세진의 몸 전체가 울렸다. 온 몸으로 이세진이 와 닿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이경은 잠시 눈을 감고 세진을 더 꼭 끌어안았다.



 "대, 대표님?"

 "잘 모르겠어."

 "아... 그냥 인터넷에서 본 거니까 꼭 사실은 아닐지도..."

 "힘든데 서있기까지 하니까 더 힘든 것 같아."



 이경이 부러 투정부리듯 말했다. 긴장하고 있던 세진이 그것을 알아채고 활짝 웃었다.



 "그럼 앉으면 되죠!"



 세진은 품에서 이경을 놓아주고 척척 걸어서 책상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앉은 채로 다시 자신에게 팔을 활짝 펴 보이는 세진을 보고 이경은 피식 웃었다.



 "뜸들이지 마시구, 얼른요. 저 팔 떨어지겠어요."



 세진이 싱글거리며 채근했다. 이경은 일부러 천천히 세진에게 다가가 소파에 앉았다. 손을 팔랑거리며 이경을 기다리던 세진은 옆에 앉은 이경을 안아주는 대신 팔을 내렸다. 이경이 의아하게 쳐다보자 세진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거기 말고, 여기 앉으세요."



 세진이 '여기'라고 말하며 탁탁 두드린 곳은 자신의 무릎이었다. 이경은, 이번에는 정말 말도 안 된다는 의미로 웃었다.



 "뭐하자는 거야?"

 "음... 이세진표 허그테라피요?"

 "근데 왜 내가 니 무릎에 앉아야 하는데?"

 "제 무릎이 추운 걸로 할까요?"

 "담요 갖다 줄게."

 "아이 대표니임."



 세진이 이경의 허리춤을 붙들고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이경은 세진에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진 못했다. 결국 이경은 못이기는 척 세진의 무릎 위로 다리를 걸쳐놓았다.



 "대표님 이게 앉으신 거예요?"

 "싫으면,"

 "아, 아니에요. 아까보단 낫네요."



 이경이 다시 몸을 돌리고 앉을세라 세진이 급하게 이경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경이 뒤로 휘청하며 세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건 내가 널 안아주는 거 같은데."



 세진은 그래요? 하더니 그대로 팔에 힘을 줘서 이경을 자기 무릎으로 올려놓았다.



 "나 무거워!"

 "안 무거워요."

 "웃기지마."

 "정말인데. 이렇게 버둥대는 게 더 힘들어요."

 "힘들면 내려놓으면 되잖아."

 "싫어요."



 결국 이경은 세진의 힘도, 고집도 꺾지 못하고 세진의 무릎 위에 자리 잡았다.



 "무슨 애가 이렇게 고집이 세니."

 "대표님한테 배웠죠."

 "하필 이런 것만 배웠지?"

 "이런 것도 배웠는데요."



 세진이 이경의 입술에 빠르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이경은 고장 난 것처럼 잠깐 멈췄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언제 이런 걸 가르쳤어? 너 나 몰래 과외 했니?"

 "그랬나."

 "뭐?"

 "대표님은 저한테 뽀뽀도 먼저 안 해주시고, 안아주지도 않으시고, 좋아한다고도 안 해주시고, 과외라도 해서 배워와야지 어쩌겠어요?"



 이경이 능청스럽게 말하는 세진의 볼을 잡고 양쪽으로 늘렸다.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세진은 웃고 있었다.



 "대표님 지금 질투하세요?"

 "내가 왜?"

 "제가 다른 사람이랑 뽀뽀했을까봐."

 "안 했잖아."



 세진은 대답이 없었다. 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안 했지?"



 세진이 이경의 시선을 피했다. 이경의 표정이 굳었다.



 "이세진."



 오래도록 대답 없이 계속 눈만 굴리는 세진을 보고 이경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세진은 이경의 뒤쪽 어딘가를 쳐다봤다. 이경은 이번에는 세진의 볼을 양쪽에서 꾹 눌러서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다.



 "나는 니가 내 잔에 독을 타서 내밀어도 기꺼이 속아줄 거야."

 "대표님,"

 "근데 이런 말엔 속아주기 싫어."



 이경이 세진에게 길게 키스했다. 이경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세진은 그냥 이경을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푸스스 웃었다. 이경이 세진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세진이 너어, 한번만 더 그런 장난 쳐봐."



 으름장을 놓는 이경의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경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닫힌 문만 볼 수 있었다. 문 쪽을 향해 앉아있던 세진이 방문객의 정체를 알렸다.



 "대표님 동생분이..."

 "뭐? 언제부터? 그걸 왜 이제 말해?"

 "대표님이 제 입을 막으셔가지구."



 이경이 앓는 소리를 내며 세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세진은 부끄러워하는 이경에게 들키지 않게 웃으며 이경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여줬다.








 "저게 미쳤나 대낮부터 어디에 앉아서... 뭐? 독이라도 먹어? 아 서이경 진짜 가지가지.... 하... 이놈의 집구석 휴일에도 스트레스만 쌓이고. 내가 진짜 돈만 모으면 다시 나간다."


 이경의 방에서 뽑아온 외서를 펼치며 수경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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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이경] 0409+1005=?

2017. 2. 23.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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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2-2

불야성 / 2017. 2. 20. 22:43

좀 짧아요 2편 끝입니당








-



 이경이 세진에게 지시한 일은 단순했다. 최원재와 관련된 어떤 사람의 핸드폰을 복제해오는 일이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회사 직원 센티넬 중에도 은신과 잠입에 특출한 사람은 있었지만, 이 일에 세진이 특히 적합한 이유는 우선, 타겟이 세진이 다니는 학교 학생이자 세진에게 저번 일을 의뢰한 의뢰인이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학교 기숙사에 학교와 관련 없는 센티넬이 몰래 들어갔다가 잡히는 것과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이 면식이 있는 다른 학생의 방에서 발견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구든 후자를 고를 것이다.



 세진이 복사해 와야 할 핸드폰이 학교에 등록된 학생용 폰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여온 폰이라는 것도 이 일을 세진에게 맡기는 이유였다. 학교 보안과 학생 관리를 위해 학생들은 외부와 연락 가능한 전자기기는 전부 학교에 등록을 해야 했고 학교에서는 개인 식별 칩을 심어 돌려줬다. 칩을 통해 학교가 알 수 있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학생의 위치 정보뿐이었으나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가능한 다들 들고 다니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교내 연락이나 공지는 거의 그쪽으로 왔으므로 챙겨 다니긴 했다.

 더러는 잘못한 게 없으면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애들도 있었다. 그러나 세진의 의뢰인과 최원재가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보면, 의뢰인에겐 분명 최원재와 관련된 다른 핸드폰이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최원재가 직접 마련해서 준 걸 수도 있고. 등록된 폰과 그렇지 않은 폰을 구별하려면 대상을 관찰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은 더욱 같은 학교 학생인 세진에게 알맞았다.



 굳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진은 이번 일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는 많은 후보들 중 한 명이었다.




 필요한 장비는 회사에서 제공하고, 보수가 높은 대신 걸렸을 경우 책임은 전부 세진이 진다. 이것이 이경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표면상으론 제안이었지만 이경은 세진이 거절하지 못 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경이 제안을 가장해 내린 명령에 세진이 부탁을 가장한 조건을 걸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대신 부탁이 있어요.”



 세진의 말에 이경은 악수하려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팔짱을 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구요, 제가 그렇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진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뜸을 들일수록 더 수상해지기만 했다. 이경은 조금 지루해져서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 봤다. 그 행동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변명을 늘어놓던 세진이 황급히 말을 맺었다.



 “일 끝나면 대표님이 가이딩 해주세요.”



 무슨 얘긴가 했더니.



 “부탁을 할 땐 거절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 거 알죠?”


 “이정도 부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학교에서 갑자기 가이딩 받으면 뭐 때문인지 의심 받을 수도 있잖아요.”


 “부탁, 할 수 있죠. 하지만 그건 내 시간을 달라는 얘기나 마찬가지고 내 시간은 세진씨 생각보다 훨씬 비싸거든요. 세진씨가 일당으로 오백을 요구하는 편이 더 가능성 있을 거예요.”


 “그럼 오백 주실 거예요?”



 이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버렸다. 세진은 몰랐겠지만 그건 이경이 짓는 표정 중 가장 큰 축에 들었다.



 “몸값 올리는 솜씨가 좋네요.”


 “말했잖아요, 급하다고. 대표님도 매일이 급하다 하셨지만, 역시 저만큼 급하진 않으신가 봐요.”



 여전히 웃음이 떠나지 않은 얼굴로 이경이 숨을 깊게 쉬며 세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에 이끌리듯이 세진도 허리를 숙였다. 이경이 세진 옆의 팔걸이에 기대 속삭였다.



 “거래를 할 땐 원하는 조건을 정확하게 말하는 편이 좋아요. 솔직하지 못하겠으면 차라리 완벽하게 속이든지.”



 귓가를 스치는 속삭임에 세진이 잠시 파득 고갯짓을 했으나 피하지는 않았다. 이경은 그대로 고개를 돌려 세진의 귓바퀴 바로 위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세진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이경이 피식 웃자 그 바람을 귀로 느낀 세진이 크게 움찔했다. 이경은 반대편 손을 뻗어 세진의 목덜미를 달래듯이 감싸 쥐었다. 토닥이는 손길에 세진이 이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경과 세진의 이마가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세진의 생각이 활자로 쓰인 것처럼 또렷이 읽혔다. 놀라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있던 세진은 목을 감싼 이경의 손이 더 위쪽으로 움직이자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세진은 이경에게 더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이경의 입술에 꽂힌 시선을 거두지도 못했다. 이경이 세진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세진씨가 일을 끝내고 올 때쯤엔 내가 다른 일정이 있고, 지금이라면 잠깐 가능해요.”



 무엇이 가능한지는 말하지 않았는데 세진의 눈꺼풀이 티나게 동요했다.




 이경은 세진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 일은 타겟이 다니는 학교 학생이라면 누구에게 시켜도 괜찮았다. 그럼에도 굳이 세진에게 시키려던 이유는, 처음엔 세진이 이대로 졸업 후 아이파이낸셜에 입사할 것 같아서였다. 유능한 인재고, 재단을 통해 일부러 키워진 재원이니 어떤 종류든 요직을 맡게 될 것이었다. 이경의 계산에 따르면 경쟁사 미래 주요인사의 학창시절 범죄에 대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건 이경에게 손해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경은 세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세진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보다 세진을 직접 키우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세진은 더 큰 판에서도 유용할 것이었다. 이세진이 3년 동안 학비를 대준 아이파이낸셜 대신 서이경을 선택하게 만드는 게 전혀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이 새로운 계획의 장점이자, 유일하게 이경을 갈등하게 만드는 이유였다.




 이경이 세진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세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세진이 학생이긴 했지만 어린 나이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이미 한 번 키스도 한 사인데, 세진의 행동에 이경은 이래도 괜찮은 게 맞는지 순간 멈칫했다. 이세진은 스물여섯이고, 성인이고, 의사 결정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경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세진이 살며시 눈을 떴다가, 다시 꼭 감았다가, 결국 완전히 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이경과 눈을 맞췄다. 귀 끝이며 목덜미가 붉어지는데도 세진이 시선은 피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욕망에 솔직한 눈을 보며 이경은 계산을 마쳤다.



 “지금 우리 둘만 있는 것 같겠지만, 여길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



 이경의 말에 세진의 동공이 커지며 재빠르게 이곳저곳을 훑어봤다.



 “여기서 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을 사람이지만, 세진씨한테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천장 한구석에서 감시카메라를 발견한 세진이 다시 이경을 봤다. 표정이 아까보다 굳어있었다. 이경이 살짝 입꼬리를 올리자 세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경은 그런 세진에게 빠르게 다가가 여러 번 잘게 입을 맞췄다. 세진이 어리둥절해 있다가 급히 자기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이경은 기울였던 몸을 세워 세진에게서 떨어진 뒤였다.



 “누가 본다면서요?!”


 “그래서 짧게 한 건데. 더 하려면 방으로 올라가구요.”



 이경이 눈짓으로 저가 내려왔던 계단을 가리켰지만 세진은 그 시선을 따라가는 대신 양손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감쌌다. 얼굴은 감췄지만 세진의 머리카락 사이로는 붉은 귓바퀴가, 팔목 사이로는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가 보였다. 얼굴을 가린 이유가 당혹스러움과 놀람과 그와 동시에 느낀 설렘과 기대감과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였다면, 안타깝게도 아무 효용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효과까지 없지는 않았다.



 이경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것에 능숙했지만 그것에 딱히 공감을 하진 않았다. 누군가 부끄러워한다고 덩달아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는데.



 “컨디션은, 좋아졌죠? 지금 바로 출발해요. 학교까지 탁이가 태워줄 거고, 장비 받아서 복사 후에 다시 탁이한테 돌려주면 돼요.”



 세진이 다시 얼굴을 들기 전에 응접실을 떠나는 이경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임무가 끝난 뒤, 세진에게 건네진 수당은 오백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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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2-1

불야성 / 2017. 2. 19. 01:47





 “이세진씨가 정말 올까요?”



 이경의 말이 끝났는데도 안 나가고 미적거린다 싶더니, 조이사가 질문인 척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경이 앉은 채로 올려다보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자 조이사가 말을 이었다.



 “이세진씨만 기다렸다가 만약에 오지 않으면 실행 불가능해지는 계획입니다. 꼭 세진씨가 아니더라도 이번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올 거예요, 그 아이.”



 이경이 조이사의 말을 잘랐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조이사는 이경의 계획이 불확실한 것에 기반을 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경은 도박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쓸 데 없는 걱정 마시고, 지시한 대로 처리하세요.”



 조이사가 나간 뒤 이경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세진은 그 중 무엇 때문에든 이경을 만나러 올 것이었다.






 이경은 타인의 욕망에 기민했다. 믿을 사람은 몇 없겠지만 이경은 타인의 아픔과 감정의 변화에도 예민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알아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이경의 가장 큰 무기는 그것이었다. 무섭게 정확한 판단력도, 빠른 결단력도, 막대한 자금도, 이경에겐 전부 보조도구쯤이고, 이경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큰 밑천은 타인의 욕심이었다. 욕심도 결국은 사람의 감정이다.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기도 쉬웠다. 소중한 사람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애틋한 마음이나,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 혹은 그냥 쪽팔리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객기, 좀 더 편하게 살고 싶다는 일견 당연한 소망, 제 잘못이 분명한데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나약한 마음까지, 모든 것이 이경의 밑천이 됐다.



 자신이 가이드임을 알게 된 날 이경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파악해야할 것 리스트에 센티넬의 안정에 대한 욕구를 추가했다. 이경이 판단한 결과로는 그건 즉각적으로 충족되어야할 욕구에 속했다. 호흡보다는 덜 긴박하지만 허기보다는 훨씬 더 급박해 보였다. 갈증과 비슷하게 사람을 애걸하게 만들지만 갈증처럼 사람 기운을 다 빼놓는 대신 오래 지나면 점점 더 포악해지게 만든다는 점이 달랐다. 가이드가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가 되기 전에 안정시키는 게 최선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경계가 어딘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경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는 센티넬들은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며 그들이 애원할 때까지 내버려둔다고 했지만, 이경의 눈에 그건 비효율적인 악취미였다. 도구는 항상 최상의 상태로 관리해야 한다. 소소한 가이딩에는 힘도 시간도 돈도 안 드는데 굳이 그걸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경의 ‘소소한’ 가이딩에 키스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쓸 만해 보였다. 회장 전체를 스캔하고 있던 김작가님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자기 능력을 잘 컨트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김작가님이 알려준 두 번째 얘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접근은 안 했겠지만.




 몇 년 전부터 아이파이낸셜 쪽에서 금전적이거나 가정사 문제로 훈련기관 입학 시기를 놓친 센티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이경은 그게 쭉 신경 쓰였었다. 다른 기업들도 물론 센티넬 장학금 재단을 운영한다. 기업에 필요한 센티넬을 육성하기 위해서든,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든. 하지만 아이파이낸셜은 이미 센티넬 관련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서 굳이 (통상적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은 센티넬들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는 단순 금융회사에서 센티넬 재단을 두 개나 굴린다는 것부터 이경의 눈엔 다른 내막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심지어 특정 연령대만을, 자기소개서와 면접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심사기준으로 선발한다고? 언제나 주시하고 있었지만 가시화 되는 부분이 없었다. 이경의 앞에 그 아이파이낸셜의 장학생이라는 이세진이 나타난 건 그런 때였다.




 조금 취기가 돈 얼굴로 새빨간 오프숄더 드레스 위에 남성용 큰 재킷을 걸치고 새하얀 벽에 기대 선 세진은, 방금까진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오늘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이경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경이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봐서인지 세진도 금방 이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놀라는 품이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보여 걱정했는데, 세진에겐 파티에 잠입한 목적이 더 우선이었던 것 같다. 혹은 다른 원하는 게 있었거나. 그건 이경이 세진의 어깨에 손을 댄 순간 분명해졌다.



 이경이 닿자마자 세진은 눈에 띄게 긴장이 풀어지고 얌전해졌다. 평소에 학교에서 케어를 잘 못 받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키스를 한 건 그래서였다. 이경은 원래 타인의 욕망에 민감하니까, 세진이 원하는 걸 줘야 세진과 가까워지고 계속 이용할 수 있어지니까. 이경이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세진이 이경을 찾아오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만 빼내면 되니까 그 친구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세진씨한테도요.”


 “...”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린다면,”


 “따불.”


 “예?”


 “따불로 주세요, 이백.”


 “......이세진씨. 5분 일하는 건데 200만원은 너무...”


 “아니 어쨌든 위험한 일은 다 제가 하잖아요. 재수 없으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구.”



 이경은 응접실에서 조이사와 흥정을 하고 있는 세진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세진이 능청스럽게 머리를 흔들 때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사이로 목덜미가 드러났다가 곧 감춰졌다. 어제까진 세진이 오지 않을까봐 걱정하던 조이사님 이마에는 허락이 안 떨어졌어도 다른 사람을 찾아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쓰여 있었다. 깊어지는 조이사의 주름을 보고도 이경은 지금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경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기 쉽다.



 “삼백으로 하죠.”



 이경의 목소리에 조이사와 세진이 동시에 이경을 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돈이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되겠어요?”


 “저야 땡큐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일할 땐 수지타산을 생각해야한다고 하셨으면서.”



 그 말이 어지간히도 거슬렸던 건지, 한방 먹였단 표정으로 저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는 세진을 이경은 일부러 스치듯 지나쳤다. 옷깃만 살짝 닿을락 말락 했을 뿐인데 세진의 몸이 자신을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이경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챈 척 세진의 대각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 계산은 내가 하고, 이세진씨는 맡은 일만 해주면 돼요. 어차피 거절할 입장은 못 될 텐데.”



 마지막 말에 세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경이 세진을 위해 깔아둔 길은 여러 겹이었다. 세진이 정말 올지 묻던 조이사님의 우려에 반드시 온다고 확언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경은 세진에게 매력적일 돈이란 패도 쥐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세진을 학교에-혹은 센티넬 관리국에 신고할 수 있다는 패도 쥐고 있었다.



 “조이사님, 다른 일정 하러 가보세요.”



 이경은 조이사를 내보냈다. 둘만 남고도 한동안 불퉁한 얼굴로 서있던 세진이 마지못해 앉으며 말했다.



 “가이드들은 원래 다 그렇게 센티넬 괴롭히길 좋아해요?”



 세진의 말에 이경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떤 가이드들처럼 ‘비효율적인 악취미’ 같은 건 없는데. 그런 취향도 아니고.



 “신고할 생각도 없으면서 일부러 협박하시잖아요.”


 “협박?”


 “저를 관리국에 넘기실 거였음 굳이 명함을 줄 필요가 없었죠. 오히려 제가 여기 드나들면 더 곤란해질 텐데. 신고하지 않는 게 더 이득이니까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신 거예요, 맞죠?”



 세진의 말에 이경은 얼굴에 웃음이 번지게 둘지, 감출지 고민했다. 세진은 이경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쓸 만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용케 찾아왔네요. 원칙까지 어기고 찾아온 거 보면 급한 사정이라도 있나본데.”


 “뒷조사 다 해보신 거 아니에요? 저 같은 사람은 매일매일이 급해요. 대표님은 그런 거 모르시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처음 만난 날 이후 이경은 김작가님에게 세진의 모든 것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었다. 세진은 이모네 집 전세비가 올라 목돈이 필요했지만 졸업심사도 얼마 안 남아서 시급이 낮은-센티넬 능력과 관계없고 세진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아르바이트에는 시간 할애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경이 세진의 비밀을 쥐고 세진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은근하게 알려주지 않았어도, 혹은 세진이 그 언질을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페이가 두둑한 의뢰를 받으러 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돈이 간절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세진이 틀린 지점은 이경이 갈망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이었다. 이경 역시 세진만큼이나 매순간이 급했다. 단 한 순간도 멈춰 있을 수 없었다. 그건 절대량을 얼마나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세진씨랑 다르지 않아요. 마음은 절실한데, 필요한 만큼 가지진 못했으니까.”



 이경이 세진을 바라봤다. 세진은 아까부터 이경을 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두 쌍이 서로를 비췄다. 이경은 세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얇고 길어 상대적으로 마디가 도드라져 보이는 곧은 손이었다. 세진의 시선이 이경의 검은 눈에서 새하얀 손으로 떨어졌다.



 “우리 서로, 원하는 걸 손에 넣어볼까요?”



 이경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세진을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세진의 손이 떨렸다. 악수를 하려던 세진의 손끝이 이경의 손끝에 스치며 허공에서 접혔다. 세진이 다시 이경과 눈을 맞췄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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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 |

불야성OST 중 배수정씨의 '나를 위해'라는 노래를 듣다가 그 노래가 20화 이후의 서이경 얘기 같아서 쓰게 된 글인데 쓰고 보니 노래랑은 별 관련이 없게 됐네요... 근데 제목 못 짓는 병에 걸려서 제목은 그냥 나를 위해에요 노래 좋아요 들어보세요()












-



 꽤나 사치스럽게 보관했던 1엔짜리 동전을 던지고 이경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미련, 자책, 후회, 그런 건 하지 않는다. 한국은 떠나왔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생각은 아니었다. 돈이 곧 신이고, 숫자만이 믿을 수 있는 지표라는 생각도 변함없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할 것이란 것도 여전했다. 어떻게 보면 이경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이경이 변했다고 했다.



 바람이 불자 방 안쪽에서 풍경이 울렸다. 사는 사람이 조용하니 이런 거라도 가끔 소리를 내는 게 좋지 않겠냐며 걸어두고 간 거였다. 확실히 더 좋기는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걸 준 사람이 생각난다는 점이.








 충분해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쉬었다고 말하는 조이사님과 한국에서 일본 일처리도 전부 맡아준 김작가님이 삐진 탁이를 달래 일본으로 들어온 날, 마당까지 나와 인사를 나누던 이경은 집으로 들어서는 네 번째 사람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당혹감보단 반가움이 더 드러났길 바랐지만 그런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진이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경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도 이경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았다. 조이사님이 가장 먼저 아무 말 없이 짐을 들고 방으로 향했고, 김작가님은 지낼 방을 알려주겠다며 탁이를 끌고 들어갔다.



 “이세진의 왕국 건설이 이렇게까지 오래 안 걸릴 줄은 몰랐는데. 아님 벌써 포기한 건가?”


 “일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칭찬해드리려고요.”



 꽤나 당돌한 말을 하는 그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경의 눈썹이 들썩였지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다음 말을 이어가는 세진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다들 그러던데요, 대표님이 일본 가시더니 기대했던 것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맞는 말이었다. 일본에 온 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보름 간 이경이 한 건 아버지 봉수가 하던 일 중 아직 굴릴만한 것과 아닌 것을 분류하고, 가끔 필요한 곳에 연락을 넣고, 그밖에는 없었다. 서봉수의 자리는 채우고 있었지만 서이경의 계획은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다. 일한금융 일을 적당적당히 처리하고 있다는 것만도 별로 서이경답지는 않았다. 그게 어째서 칭찬할 일이 되는 지 의구심이 떠오르는 이경의 얼굴을 보며 세진이 이미 웃는 얼굴로 웃음을 참았다.



 “대신 끼니도 대충 안 때우고 잠도 잘 자고 주말에는 쉬시고, 그러신 거 같아서.”


 “그래서?”


 “잘 하고 계시다구요.”


 “내가 밥 잘 먹고 잘 자는데 왜 세진이 니가 좋아해?”


 “네? 그게...”



 부러 싸늘하게 말하는 투에 웃음을 지우고 당황하는 세진이를 보며 이경은 비로소 편하게 웃었다. 자신을 놀렸는데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정말 우리 대표님 맞냐고 재차 묻기에 시끄럽게 할 거면 가라고 했더니, 지불은 다음에 할 테니 하루만 먹여주고 재워달라고 뻔뻔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대로 보낼 생각도 물론 없었지만, 돌려보냈으면 삼박사일은 김작가님 아쉬운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경은 괜히 져주는 척 세진이를 집으로 들였다. 어떤 싸움에서는 굳이 이길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다섯이 둘러앉아 떠들고, 먹고, 가끔 건배를 했다. 누군가를 해고하는 일 빼곤 언젠가의 파티와 비슷한 저녁을 보내고,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질 시간이 왔다. 김작가님이 나서기 전에 이경이 먼저 세진의 방 안내를 자처했다.



 “대부분 요를 깔고 자긴 하는데, 침대가 있는 손님방이 딱 하나 있어. 넌 침대가 편하지?”



 큰 짐 없이 손가방 하나만 덜렁 든 세진이 비틀거리며 빠르게 걷는 이경의 뒤를 따랐다. 와인을 꽤나 마시고도 흐트러짐 없던 이경의 걸음이 어떤 방 앞에서 멈췄다. 이경은 미닫이문에 손을 얹고 생각할 게 남았다는 듯 머뭇거렸다. 그런데 세진아.



 “꼭, 침대에서 자야 되니?”



 세진이 취하긴 했어도 이경의 말뜻을 파악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목울대가 마른 침을 한 번 삼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경이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저 아무데서나 잘 자요.”



 세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경이 아까부터 잡고 있던 방문을 밀어 열었다. 침대는 없고 한쪽 벽에 두툼한 이불만 깔려있는, 별다른 가구도 많지 않은 단출한 방이었다. 세진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계속 거기 서있을 거야?”



 이경은 이미 웃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세진이 이경의 방에 어울릴 것 같다며 가져온 게 저 풍경이었다. 



 세진이는 계속 갖가지 핑계를 대며 이경을 찾아왔다. 세진이 자고 갈 때마다 이경의 방에 예쁜 것, 예쁘지만 쓸모없는 것, 쓸모는 없지만 마침 장식장이 허전했는데 잘된 것, 조금은 쓸모가 있는 것, 아무리 봐주려 해도 정신 사나워서 한구석에 밀어둔 것들이 하나둘 쌓여갔다.





 일본과 한국 시장을 중계하는 코디네이터 일을 한다며, 주근거지는 오사카면서 나고야까지 이렇게 자주 놀러 와도 되는 건지. 세진이가 자신에게 쓰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을 줄인 게 아니라 세진이 응당 가져야할 휴식시간을 줄인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이경은 세진이 걱정됐다. 일은 세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었다. 다만 한국에서의 자신이 자꾸 지금의 세진이에게 겹쳐 보였다. 위로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던 날들이었다. 지금도 언제나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같다. 이경은 멈춘 채로는 절대 살 수 없으니까. 단지 자신을 깎아가면서 나아갈 길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 막 배운 참이었다. 그걸 알게 해준 당사자가 속 썩이고 있다는 게 지금 상황의 모순이었지만.



 세진이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아도 무리하는 거겠지. 이경과 한 약속 때문이든, 사업 특성상 현시점에서는 들어오는 일들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든, 세진은 아마 지금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경도 그랬으니까.





 언제나 쉬엄쉬엄 하라는 말을 듣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하고 싶은 걸 참느라 꽤나 애를 먹고 있다고 하면 세진이가 들어주려나. 새벽 어슴푸레한 빛으로 봐도 피곤해 보이는 동그란 머리통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이경은 저가 이렇게 잔걱정 많은 성격임을 처음 알았다.



 “대표님?”



 가만히 쓸어보기만 한다는 게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잠에서 얕게 깬 세진이가 꾸물거리며 이경의 손을 끌어가더니 손바닥에 코를 박았다.



 “더 자.”


 “왜 깨셨어요? 어디 아프세요? 안 좋은 꿈 꾸셨어요?”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다른 사람 걱정부터 하는 세진이의 말에 이경의 마음이 저릿하면서도 간지러워졌다. 이경은 어디쯤 있는지 모를 제 마음 대신 세진이의 뺨이며 눈가를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너 때문에 걱정돼서 잠을 못자겠어. 네? 너 이렇게 한가하게 바람이나 쐬러 다니고, 내가 살아있을 때 니가 건설한 왕국 보여줄 수 있겠니? ...... 농담이야, 웃어.



 서이경식 서늘한 농담에 세진이 멈칫거리지 않을 수 있게 될 쯤엔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또 웬일이야.”


 “저 오늘은 진짜 그냥 놀러온 거 아니에요. 이 근처에 사업차, 일이 있어서.”


 “그럼 숙소도 알아보고 왔겠네.”


 “...”


 “여기가 공짜 숙박업소인 줄 알아?”


 “공짜...로는 안 묵잖아요.”


 “담보로도 못 쓸 잡동사니는 사양이야. 거래는 상대가 탐낼만한 걸 제시해야 성립된다는 거, 몇 번이나 가르쳐줬던 거 같은데.”



 이전처럼 겁먹진 않았지만 곤란하다는 듯 꾸물거리는 세진이를 보며 이경은 져주는 척 다른 조건을 내비쳤다.



 “나는 이세진의 오늘을 갖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왔으면 바쁘겠네.”


 “아니요! 저, 일, 방금 다 끝내고 왔어요. 이제 내일까진 오프에요.”


 “정말이야?”


 “네.”



 겨우 점심시간 지났는데 벌써 무슨 일을 끝냈다는 건지, 일이 있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아예 사업얘기 꺼내기도 전에 퇴짜를 맞았어야 가능한 시간이었다. 세진이 점점 뻔뻔해지고 있었다. 다른 날이었다면 무슨 일이었는지부터 다시 채근했겠지만, 오늘은 솔직하게 밝아지는 얼굴로 충분했다.



 “나한테는 다행이네. 따라와.”






 이경은 세진이에게 편한 신발부터 신기고 시내로 데리고 나갔다. 가끔 단 둘이 가던 레스토랑 같은 곳이 아니라 이경이 일한금융에서 수금할 때 돌아다니던 상점가였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그때와 또 다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이경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이경이 한국에 가기 전까지 주기적으로 돌던 곳이니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상인들의 인사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세진의 몫이었다.



 “대표님 혹시 옛날에 아이돌이나... 그런 비슷한 거라도 하셨어요?”



 그리고 세진이의 뜬금없는 소리에 실소하는 건 이경의 몫이었다.



 “어쩐지 여기 사람들이 다 대표님 알아보는 거 같아서요. 기분 탓이 아닌 거죠?”


 “허리 펴고 고개 들어. 여기서도 사업하고 싶은 거면.”


 “그렇긴 한데요, 이렇게 대표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세진이 걸음을 멈췄다. 이경도 바로 걸음을 멈췄다. 돌아본 세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인맥으로 장사하는 중이면서도 가장 가까운 인맥은 활용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경은 알고 있었지만, 그럴 거면 제 집에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면 안 됐다. 좋은 이미지로든 나쁜 이미지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세진은 이미 서이경과 엮여있을 것이었다.



 “이게 도움이 되란 법은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적이 아주 많거든.”



 반박하고 싶은데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하는 세진이의 얼굴은 꽤나 볼만했다. 하지만 이경은 웃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경에게 지금 이 상황은 조금 억울했다. 그냥 자신이 오랜 시간 다닌 곳들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말을 할수록 더 단단히 오해만 하게 만들었다. 이경은 어떻게 세진이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짧지 않은 평생 남이 오해하면 그 오해를 이용하며 살아온 이경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길 한복판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정면만 응시하던 이경과 세진을 움직이게 만든 건 예쁜 옷을 맞춰 입은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었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가끔 앞을 보고 걸으라는 선생님의 외침을 들으며, 열을 맞춰 걸어가는 아이들을 피해 이경과 세진은 자연스럽게 길 한편에 나란히 섰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사원에서 시내까지 행진을 하는 아이들이 가끔 있어. 올해는 토요일이라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경의 설명에도 세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경은 잠시 이세진처럼 해보기로 했다. 이경이 가진 가장 큰 무기가 욕망이었다면, 세진의 가장 큰 무기는 진심이었다. 그 둘은 아주 다르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저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건 내가 서이경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금을 하러 다녔었기 때문이야. 여기는, 내 일터였고.”



 나란히 서있을 땐 상대방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상대가 이쪽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면 더더욱 표정을 알기 힘들었다. 반응은 없지만 세진이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경은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고 싶었거든. 근데 내가 한 게 일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여기라도 같이 와볼까 싶었던 건데 실수였네.”



 와글거리던 애들은 한참 전에 다 지나갔지만 이경과 세진은 그대로 서있었다. 서이경의 투박한 진심은 이미 꺼내졌고 그걸 받아들지 말지는 세진의 선택이었다. 이경은 말을 하고 나서도 이게 과연 저울에 올려놓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제안-과거에 같은 사람에게 건넸던 보증금이나 뜻밖의 횡재 같은 류-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세진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과거, 추억, 옛날 얘기, 그런 돈 안 되는 걸 저한테 알려주고 싶으셨다구요? 여기에서?”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 건 방금 세진이 말하기 전까지 자신이 하려던 일이 그런 일인 줄 이경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진심이세요?”


 “응.”



 세진만큼이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경이 수긍했다. 세진은 어쩌면 구원투수가 아니라 포수였는지도 몰랐다. 이경 스스로도 못 믿을 투구까지 놓치지 않고 정확히 받아주는.







 풀어진 분위기로 이경과 세진은 상점가를 벗어났다. 오해가 풀렸어도 계속 인사를 받으며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아이들의 행렬을 거스르며 둘은 사원까지 천천히 걸었다. 작은 천을 따라 벚꽃이 피고 있었다. 꽃이 예쁘다고 활짝 웃는 세진을 보며 이경은 네가 더 예쁘다는 말이 떠오른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날 밤 이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12시가 지나고, 키스하던 세진이를 굳이 멈추게 하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선물을 건넨 후였다. 비싼 것이든 구하기 어려운 것이든 뭐든 해주고 싶었지만 참고 참아 준비한 건 머리끈이었다. 어느새 길이가 제법 길어 묶고 다닐 때가 더 많다는 단순한 이유로 준 것이었는데, 세진은 다행히, 어쩌면 당연히 좋아했다.



 “대표님이 이걸로 제 머리 묶어주세요.”



 세진이 떨며 내밀었던 팔찌보다도 더 별 거 아닌 선물인데 좋아해주는 게 고마워서, 이경은 세진의 어리광 같은 요구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세진이는 얌전히 이불을 두르고 제게 등을 보이고 앉아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손이 떨려서 이경은 몇 번인가 주먹을 쥐었다 펴야했다. 제 뒤에서 이경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줄은 모르는 세진은 신나서 오늘 정말 좋았다고 날씨도 좋고 재밌었고 애기들도 귀여웠고 꽃도 예쁘고 선물도 고맙다고 그런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안 그래도 떨리는 손인데 세진이 종알대며 고개를 까딱이는 통에 머리 정리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경은 흔들거리는 세진의 얼굴을 잡고 키스해버렸다.



 “오늘 내가 본 것 중에 니가 제일 예쁘고 귀여웠으니까 머리 묶을 땐 가만히 좀 있어.”



 세진은 바로 얌전해졌다. 남의 머리는 묶어본 적 없어 어설피 마무리하고 세진을 바로 앉히니 세진은 귀끝까지 시뻘게진 채로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래?”


 “오늘 제 생일이라 데이트한 거 맞죠?”



 알면서 묻는 심보는 뭘까. 이경은 이마저도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다른 사람들 말처럼 자신이 변하긴 했나보다고 생각했다.



 “맞으면?”


 “제 생일인데 제가 대표님한테 제 시간 드린 게 억울해서요. 제가 받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갖고 싶은 거 있어?”


 “대표님 시간-”


 “그거 말고.”


 “왜요?”



 안 그래도 없는 시간 뺏는 것 같다는 얘긴 삼켰다.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내 시간보단 덜 비싼 걸로 골라봐.”


 “허, 일본도 통째로 살 수 있겠네요.”


 “수학에는 정말 소질 없구나.”



 실없는 소리를 하다 세진과 이경은 다시 입을 맞췄다. 세진이 요구하는 서이경의 시간을 줄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이세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이경의 시간은 이미 계속 이세진에게 지출되는 중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었어?”



 이경의 동그란 어깨 위에서 손장난을 치던 세진이 고개를 들어 이경을 봤다. 자기가 둘러댄 말도 기억 못하는 것 같아서 이경은 표정을 조금 굳혔다.



 “오늘 일 때문에 왔다며. 거짓말이었니?”


 “그게... 여긴 아니고 교토에 잠깐 갔다가 교토까지 온 김에 대표님도 보고 싶고 제 생일이기도 하고...”



 말끝을 흐리며 파고드는 세진에게 순순히 품을 내주며 이경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사카와 나고야 사이에 있긴 하지만 교토도 절대 가깝진 않은데 거리감이 왜 이 모양인지. 수학 뿐 아니라 지리에도 소질이 없어 보였다.



 “화나셨어요?”



 하지만 이경도 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꼭 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생일을 의식한 건 세진이 혼자가 아니었다. 반쯤 풀린 머리끈을 아예 빼서 옆으로 치워두고 이경은 세진의 머리칼에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교토엔 왜 갔는데?”


 “마리가 이제 진짜 교토 장인이 만든 거울 줄 때도 되지 않았냐고 성화라. 저 저번에 큰 건 하나 했다는 거, 마리 도움 좀 받았었거든요.”



 제 도움은 거절하고 마리 손은 아무렇지도 않게 빌리는 거 같아서 이경의 눈이 절로 치켜떠졌지만 몇 번 작게 말다툼을 한 뒤로-세진은 그게 작은 다툼이었다고 기억하지 않았다-이경은 세진과 마리의 우정을 일부분 인정하기로 했다. 조금 더 긴밀한 인맥이 있을 수 있겠지 나하고 건우처럼. 별로 적절한 비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관계를 맺어본 적 없는 이경에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세진이와 마리의 커넥션을 인정하더라도, 돈 한 푼 안 될 유치한 질투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경이 스스로 정말로 변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어떤 감정은 아껴 쓰지 않게 됐다는 것이었다.



 “손마리 것만 샀어?”


 “대표님한테는 더 좋은 거울이 있잖아요.”



 효용가치 없는 감정을 던져 넣어도 언제나 정확하게 받아줄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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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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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1-3

불야성 / 2017. 2. 1. 11:28






 세진에게만 들리는 것 같던 온갖 이상한 소리들이 사라지고, 골목에는 조금씩 느려지는 탁의 숨소리만 들렸다. 세진은 서있기조차 힘들었지만 크게 숨을 몰아쉴 수도, 주저앉을 수도, 가이딩 중인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대로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세진의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1분이 지나고 탁이 대표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대표는 그제야 탁에게서 메모리카드를 건네받았다.



 “수고했어.”



 탁의 만족스러운 얼굴은 10초 만에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서대표가 메모리카드를 받자마자 몸을 돌려 세진에게 자기 명함과 함께 그것을 건네줬기 때문이었다. 세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명함과 메모리카드를 받아들었다. 명함에는 에스건설 서이경 대표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 이게...”


 “다음부턴 파티 주최자 이름이랑 얼굴 정도는 확인하고 와요.”



 오늘 있었던 경매와 그에 딸린 가벼운 연회는 에스건설에서 주최한 것이었다. 세진도 알고는 있었다. 주최와 전혀 상관없는 의뢰라서 자세히는 안 알아봤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하면서 돌아다녔을 당사자를 속이려고 했었다니, 세진은 아까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손에 쥔 명함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서이경. 이름 세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세진의 속이 다시 들끓으려했다. 세진은 억지로 이 감정은 피곤하고 힘들고 아픈 탓이라고 스스로에게 둘러댔다. 그만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이경은 할 말이 더 있는 눈치였다. 세진은 지금 당장 공간이동으로 튀어도 무례하다는 소리 안 들을 만큼 다쳤는데, 그런 상태로도 이경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짜증이 일었다.



 “좋은 옷이 망가져서 어쩌나. 오늘 보수로 옷값은 되겠어요? 일을 할 때는 수지타산을 생각해야죠.”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제 의뢰는 제가 알아서 해요. 돈 받는 만큼 제 책임이 어디까진지도 제가 알아서 하구요.”


 “하지만 능력은 정말 잘 쓰던데요. 탐색도, 은신도.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 여기까지 도망친 것도 대단하고.”


 “처음부터 저를 보고 있었어요?”



 세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경은 대답 없이 탁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탁아,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대표님.”


 “그럼 세진씨 좀 데려다 줘.”


 “네? 얘를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 직원이 그쪽 싸움에 휘말려서 조금 다치긴 했지만 세진씨 혼자 가는 것보다 안전할 거예요.”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엄청 생색내시네요. 그냥 신경 꺼주셨음 좋겠는데.”



 세진은 울컥했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거나, 미행했다거나, 그런 것보다, 저가 몇 배는 더 다쳤는데 탁이 조금 다친 걸 굳이 짚는 이경에게 화가 났다. 하, 자기 센티넬이 다쳤다 이건가? 험악해진 세진의 표정을 보고 이경이 피식 웃었다. 이경의 웃음에 세진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탁아, 임무 수정해야겠다. 이 사람들부터 김작가님한테 보여드려. 조작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 알아서 해주실 거야. 끝나면 작가님이 말하는 곳에 두고 와.”


 “네, 대표님.”



 탁은 이경이 또 명령을 바꾸기 전에 기절한 남자 센티넬과 여자 센티넬을 들쳐 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세진이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을 때 들은 바람소리는 탁이 오는 소리가 맞았던 모양이었다. 이경은 탁이 멀어지자 세진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세진은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가, 반걸음 다시 돌아왔다. 온 몸이 삐그덕대며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말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경 때문에 심란한 것에 비하면 참을만했다.




 세진은 이제 이 소란스러운 마음이 뭔지 알았다. 이경에게 닿고 싶은 거였다. 연회장에서부터 그랬다. 이경을 처음 봤을 때부터 세진은 이경에게 가까워지고 싶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가이딩을 원하는 건 센티넬의 본능이었으니까.



 연회장에서처럼 세진은 이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경도 세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이경에 대한 이-성욕에 가까운-욕구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그게 지금 세진의 상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몸 상태는 최악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이딩을 원하는 센티넬의 욕구는 최고치였다. 세진은 더는 이성적으로 버틸 수 없을 거 같아 이경의 눈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게 만약, 정말 만약에 그 ‘공명’이 맞다면, 공명에 관한 전설 중에 다른 건 몰라도 서로 가까이만 있어도 안정되는 관계라는 부분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세진은 지금 코앞의 이경을 만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세진의 시선이 자꾸 이경의 목과 입술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런 세진을 보면서 슬며시 웃는가 싶더니, 이경은 금세 세진에게 붙어 한 팔로 세진의 등과 허리를 받쳤다.



 “이, 이봐요?”


 “지금 원하는 게 이거 아니에요?”



 세진은 ‘이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세진의 신경은 온통 이경의 손이 닿은 등에 가있었다. 이경은 세진에게로 몸을 숙였다. 



 “눈 감아요.”



 이상하게 이경의 말에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세진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추측해보기도 전에 세진의 눈은 벌써 감겨있었다.




 이경은 세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맞댔다. 건조하게 닿기만 했다가 멀어지려는 입술에 세진이 잘 안 움직이는 팔을 급하게 둘러 이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경은 아파서 끙끙대며 제 뒤통수를 감싸면서도 눈은 계속 감고 있는 세진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자세만 조금 바꿔 다시 세진에게 입맞췄다. 이경은 처음부터 가볍게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마음 급한 세진이 몇 번씩 이경의 입술을 깨물고 앞니에 부딪쳤지만 이경은 세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가끔씩 입술을 뗐을 때 보이는 이경의 눈은 고요했다. 세진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통상적 의미의 가이딩은 이미 끝났다. 세진의 정신적 능력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좋은 컨디션으로 회복된 상태다. 금 간 갈비뼈나 유리조각에 긁힌 뺨 같은 물리적 상처는 치료가 더 필요했지만 당장 못 견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세진을 안달 나게 하는 건 다른 종류의 충동이었다. 안정과 회복 같은 가이딩에 대한 열망인 척 숨어있던 욕망.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경은 세진이 숨을 고르려 잠시 떨어질 때마다 세진의 눈을 보며 안색을 살폈다. 다정하면서도 아무 열기 없이 차분한 눈빛에 세진은 결국 이경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어깨를 짚고 몸을 떨어트렸다.




 뒤늦게 탁이란 남자가 생각났다. 세진은 자기 센티넬을 먼저 보내고 오늘 처음 본 센티넬에게 키스한 이경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경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이드들이 능력에 따라 센티넬들을 여럿 부린다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가이딩 능력을 말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재력이나 권력 같은 것도 포함한다. 센티넬 고유 능력을 쓰면 정신과 신체가 불안정해지는 센티넬과 달리 가이드는 가이드 고유 능력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았다. 가이딩에 거의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스킨십-방금의 키스 같은 것-때문에 지치는 일은 있어도, 가이딩이 가이드를 지치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이딩 자체는 가이드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경에게도 이 ‘가이딩’은 아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걸로 충분해요?”



 센티넬의 상태가 얼마나 안정됐는지도 가이드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었다. 세진이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다시 키스해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은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키스는 부족했지만.


 ......키스로는 부족했지만.



 “원하는 게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경의 애매한 말에 세진이 뜨끔했다. 방금 키스만으로도 터질 것처럼 빨개진 세진의 얼굴에 한 번 더 열이 올랐다. 이경은 세진이 키스에 열중하느라 떨어트린 명함과 메모리카드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다쳐서 바닥에서 뒹굴면서도 절대 포기 못한다고 버텼으면서 키스 때문에는 너무 쉽게 내동댕이친 것 같아서, 세진은 민망함에 잠시 눈을 굴렸다. 이경은 메모리카드를 좀 살펴보다가 먼지를 털고 세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잠깐 다시 닿는 것만으로도 세진은 목 언저리가 뜨거워졌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긴 숨을 내뱉었다. 세진이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이경은 깨끗한 명함을 새로 꺼내서 세진에게 건넸다.



 “다음 의뢰에 관심 있으면 연락해요. 보수는 두둑하니까.”



 다음 의뢰라는 말에 세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이드에게 아무 영향이 없다고 해도 이유 없이 가이딩을 해준 건 아니었다는 생각과, 의뢰를 맡으면 다시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무슨 일인데요?”


 “아까 그 사람들하고 관계있는 일.”


 “아쉽네요. 한번 의뢰받은 업무는 연장하지 않는 게 제 원칙이라.”


 “그래요 그럼.”


 “저기요!”



 너무 단번에 돌아서는 이경을 불러 세운 건 물론 충동적이었다.



 “어, 저기, 최원재 찾을 때 도와준 건 고마웠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세진씨두요.”



 이경이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곧 자동차에 시동 거는 소리와 엔진이 구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세진은 엉망이 된 바닥을 뒤져 반파된 카메라와 수선 불가능해 보이는 겉옷을 집어 들었다.





 이경의 가이딩 덕분에 학교에 몰래 복귀하는 건 수월했다. 붕붕 날아다니는 몸만큼이나 기분도 계속 붕 떠있었다. 붕 뜬 게 아니라 깊이도 모를 물속에 가라앉는 중인 것 같기도 했다.





 세진은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마리에게 잡혀 상처를 살피고 약을 발랐다. 만난 김에 카메라와 옷의 복구도 부탁하는 세진에게 마리는 눈을 흘겼다.



 “야, 야, 내 능력이 무슨 되감기 버튼인 줄 알아? 이걸 어떻게 되돌려.”



 자기가 새로 사주는 게 낫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마리는 한번 시도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 대가로 야식을 사주며 어디서 또 굴러먹다 왔냐고 잔소리를 잔뜩 들었지만, 세진에겐 그 시간도 다른 날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랬다. 우리 최종심사도 얼마 안 남았어. 몸 좀 아껴."


 "응. 그래야지."


 "하긴 뭐 넌 장학금도 받는데, 심사가 문제겠니. 내가 문제지."


 "너도 잘 하면서 꼭 그러더라."


 "너, 나 가고 또 딴 짓 말고 바로 자. 알겠지?"


 "그래. 너두 딴 데로 새지 말고."


 "헐... 방금 무단 외출하고 오신 이세진씨가 할 말은 아니죠."


 "얼른 들어가."





 계속 걱정하는 마리를 겨우 자기 방으로 돌려보내고 혼자가 된 세진은 침대에 누워 이경의 명함을 만지작대다 깨달았다. 자신은 서이경에게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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