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x루트 자공자수 주의*
뉴욕 맨하탄 펄 가에 작은 사무실을 가진 심리상담사 캐롤라인 튜링은 매일 아침저녁 지하철로 출퇴근한다. 더럽고 냄새나고 좁기로 유명한 바로 그 뉴욕 맨하탄의 지하철로. 그곳에서 튜링은 별별 꼴을 다 보았다. 노숙자들이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대낮부터 떨리는 손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다거나, 뉴욕 경찰도 출동을 포기한 좁아터진 통로에서 성추행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거나, 고양이만한 쥐 시체가 선로에 쌓여 잠시 운행이 중단된다거나, 제대로 터지지 않는 휴대전화 때문에 화가 나서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 취객과 같은 칸에 타게 된다거나, 분명 천장 위로 몇 겹의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있을 지하철 플랫폼에 비가 들이친다거나, 고장난지 최소 6개월은 된 것 같은 환풍구에 둥지를 튼 비둘기 떼들이 정차한 열차에 용변폭격을 퍼붓는다거나 하는 일들 말이다. 악명 높은 뉴욕 지하철에는 외계인이 살고 있다는 괴담도 돌아다닐 정도니, 그 지하철을 매일 두 번씩 타는 튜링은 출퇴근길에 무엇을 봐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혹은 놀라지 않은 척 평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겪은 일에 대해서 튜링은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최근 고객 중 하나인 프레드릭슨 씨가 상담 내용이 유출된 것 같다며 예민하게 굴고, 또 다른 고객인 백스터 씨의 검찰 출두로 튜링에게까지 연락이 와서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 잠을 좀 설치긴 했지만, 헛것을 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튜링은 믿기지 않게도 지하철에서 자기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여자를 보았다.
튜링은 여느 때처럼 단정한 옷에 얇은 코트를 걸치고 지하철 문 근처에 서서 사무실에 어떤 차를 새로 들여놓는 게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사케지언 씨가 홍차를 선물로 주시긴 했지만 그걸 사무실에 둬도 괜찮은 걸까? 괜한 오해의 소지가 되는 건 아니겠지. 일상적인 고민을 하던 튜링은 급작스럽게 덜컹이는 지하철 때문에 휘청거리다가 옆의 바를 잡고 몸을 다시 세웠다. 작은 안도의 숨을 쉬며 몸을 바로 하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린 순간, 튜링은 좌석 건너편에서 자신처럼 열차 손잡이를 잡고 자신과 비슷한 오피스룩을 입고 헤어스타일만 약간 다른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 여자도 튜링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헉하고 숨을 들이쉬며 몸을 돌려버린 튜링은 왠지 모를 두려움에 다시 돌아볼 수가 없었다. 마침 튜링이 탄 열차는 그녀가 내려야 하는 풀턴 역에 도착했고, 튜링은 가늘게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전철에서 내렸다.
그녀는 하루 종일 아침의 여자가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스스로에게 집에서의 가벼운 족욕과 평소보다 조금 빠른 퇴근을 처방했다. 안정되지 못한 마음상태로는 내담자들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 뿐 아니라, 어차피 집에 돌아갈 때도 같은 지하철을 타서 아침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면 지하철 밖으로 나왔을 때 조금이라도 더 밝은, 조금이라도 더 이른 시간인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튜링은 저녁 이후 시간으로 잡혀있는 두 명의 내담 예정자들에게 개인적인 일로 오늘 저녁 상담을 미뤄야 할 것 같다고, 이런 것으로 보상이 될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때 무보수로 추가 상담을 해드리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튜링은 자신의 예상대로 지하철에 타자마자 아침에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감각을 뚜렷하게 떠올렸다. 운 나쁘게도 튜링은 사람으로 가득 찬 퇴근 열차에 올랐고, 앞에 선 사람들의 등과 어깨, 핸드백 때문에 시야가 막혀있었기 때문에 불안감이 상승해서 어디선가 아침의 여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고, 튜링은 별 다른 일 없이 지하철에서 내렸다. 튜링은 집에 도착해서 계획을 약간 수정해 족욕 대신 느긋하게 반신욕을 즐겼다. 튜링은 욕조에 기대 마른 체리가 들어간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아침의 일은 그저 자신의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착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튜링은 다음날 출근 전철에서,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앞사람에게 들릴까봐 지하철 문에 바짝 붙어 서있어야 했다. 여느 때처럼 문 근처에 자리 잡고 서서 한 손은 핸드백 위에 살짝 얹고 있었다. 웨스트 포 스트리트 역에서 사람들이 밀려들어와 튜링은 살짝 뒤로 물러났고, 옆 사람과 더 바짝 붙어 서있게 되었다. 다음 역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내렸다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전철에 올라탔고, 이후 덜컹거린 열차 탓에 튜링은 자신이 내리는 역에 도착할 때까진 열리지 않을 이쪽 편 전철 문과, 튜링의 몸 앞을 가로질러 지하철 안전봉을 잡은 옆 사람의 팔 사이에 갇혀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사람이 남자였다면 좀 더 긴장했겠지만, 여자였기 때문에 튜링은 가만히 지하철 문에 등을 대고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옆 사람의 구두가 상당히 자기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음, 굽은 내가 신는 것보다 약간 더 높아 보이지만 저런 펌프스라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하네. 그리고 연한 갈색의 H형 스커트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스커트와 같은 색의 재킷도, 재킷 안에 입은 은은한 와인색 셔츠도 주름이 예쁘게 잡혀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여자의 아래에서부터 위로 시선을 옮기던 튜링은, 셔츠 깃의 작은 브로치마저도 귀엽고 갖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상대방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지만, 무례하게 여성의 몸을 훑어본 꼴이라는 걸 깨달은 튜링은 얼른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고 옷 스타일이 정말 좋아서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라고 하려고 했다. 눈이 마주친 상대가 어제 본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튜링은 자신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객차가 다시 한 번 덜컹이며 튜링과 여자의 간격이 좁아졌다. 튜링은 여자에게 자신의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하철 문에 바짝 붙어 섰다. 여자는 튜링을 계속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고, 사과의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친 튜링은 그저 그대로 그녀의 시선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열차가 가볍게 흔들릴 때마다 안전봉을 잡은 여자의 손과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고, 여자에게서는 희미하게 샴푸 냄새가 났다. 그녀가 자신이 만들어 낸 환영이나, 괴담 속의 도플갱어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자신과 좀 많이 닮았을 뿐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튜링은 어제만큼 이 여자가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튜링을 빤히 쳐다보는 여자의 눈빛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최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방황하던 튜링의 눈에, 숨 쉴 때마다 차분하게 오르내리는 여자의 가슴팍이 보였다.
“이런 거 좋아하나 봐요.”
“아, 아니에요. 이건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튜링은 여자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여자의 가슴팍에서 시선을 거두고 변명을 주워섬기려다 여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제 브로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무슨 ‘다른 뜻’이요?”
여자는 튜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몸을 살짝 틀었다. 그 덕에 튜링은 몸을 조금 곧추세워야 했고, 이제 튜링은 여자에게 반쯤 안긴 자세로 서있었다.
“그, 그쪽이 입은 스타일이 제 취향이어서 그런 거긴 한데,”
“그래요?”
여자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넘기는 시늉을 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있어서 더운 모양인지, 그저 머리카락이 거슬렸을 뿐인지는 모르지만, 튜링의 눈에는 그 몸짓이 나른하고 우아해 보였다. 튜링이 여자에게서 시선을 못 떼는 사이 여자가 혀를 작게 내어 입술을 축였다.
“그렇게 쳐다볼 정도로 당신 취향이에요?”
튜링은 자신과 비슷하지만 더 나른하고, 은근한 목소리에 홀리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 순간 여자가 튜링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품에 안는 바람에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튜링을 품에서 놔주며 여자가 작게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기대고 서있는 문이 열려서.”
튜링은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얼굴을 멍하게 쳐다보다가, 그곳이 풀턴 역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뛰어 내렸다. 그리고 튜링은 그날도 전날처럼 내담자들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튜링은 오늘도 지하철의 여자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어제와는 다른 의미로. 튜링은 여자와 다시 마주친다면 이름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을 먹은 뒤 튜링은 진지하게, 오늘은 저녁 상담이 없으니 오후 상담도 취소하고 집에 가서 마음을 다스려야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하필 오후의 마지막 내담자는 어제 저녁에 일방적으로 상담 취소 통보를 받은 그 사람이었고, 튜링은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명성과 내담자에 대한 신의-이미 약간 금이 갔을 지도 모르는-를 지키기 위해 오후까지만 상담을 계속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내담자들은 예민하고 섬세한 상태로 튜링의 앞에 앉고, 자신이 그녀 앞에서 편해져도 되는 것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튜링은 그들의 그러한-일반적인 속성을 알고 있었고, 평소에는 그게 거슬리지 않았다. 오늘이라고 해서 그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튜링은 오늘따라 내담자들의 편집증적인 의심과 신경질적인 말투를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두세 명의 내담자들이 왔다가고, 튜링은 목을 살짝 긁고 등을 쭉 펴며 잠깐 스트레칭을 했다. 피곤하니까 페퍼민트티라도 마셔볼까 하고 걸어가는 튜링의 구두소리 위로 다음 내담자의 노크가 묵직하게 울렸다. 튜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잠시 입을 크게 벌려 턱과 입을 푼 뒤 미소를 띠고 “들어오세요!”하고 외쳤다. 그리고 곧 튜링의 얼굴에 진짜 미소가 퍼졌다.
“오.. 안녕하세요, 튜링 선생님. 당신일 줄은 몰랐네요.”
“저도 몰랐어요, 어..”
“아, 미스 메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미스 메이.”
“이거 참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튜링의 마지막 내담자는 지하철에서 본 튜링을 닮은 그 여자였고, 튜링은 어제부터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일하는 곳도, 심지어 그녀의 상사 이름도 알고 있었다. 튜링은 내담자의 뒤를 캐는 타입의 상담사는 아니었으나, 이번 내담자의 상사는 정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름을 알만한 국내의 장관이었고, 내담자는 그의 수석비서였다. 튜링은 갑자기 강한 갈증을 느끼고, 자신이 차를 마시려던 중임을 깨달았다.
“지금 차를 내릴까 했는데, 혹시 선호하시는 차 있으세요? 홍차도 몇 종류 있고, 허브티는 카모마일이랑 자스민, 라벤더랑, 또..”
“선생님.”
“네?”
약간 허둥대는 느낌으로 상담실에 비치된 차 종류를 읊던 튜링의 말을 메이가 끊었다. 문 앞에 서있는 메이를 보고 튜링은 아-하고 작게 탄식했다.
“제 정신 좀 봐, 들어와서 앉으시라고도 안 하고. 여기,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튜링은 메이에게 자리를 권하며 손바닥을 교차시켜 마주 대고 비비듯이 눌렀다. 튜링의 손바닥은 땀이 나서 약간 축축했다.
“아뇨 그게 아니고, 어제 상담 취소하신 것 말이에요.”
“아, 아 그.. 어제 제가 정신없는 일이 있었거든요. 정말 죄송해요. 첫 방문 전이시라 개인 번호도 몰라서 메일만 보냈는데, 그게 정말... 정말 죄송해요.”
메이의 의문은 정당했다. 튜링은 마음이 졸았다. 그렇다고 “그건 당신 때문이었어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튜링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메이는 그런 튜링을 보고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음, 말로 하는 사과보다, 제게 주시기로 한 스페어 상담 시간에 대해.. 제가 약간의 추가 요구를 해도 괜찮을까요?”
“어떤 요구요?”
“우리가 상담실이 아닌 곳에서 만난다거나..?”
메이가 아침의 지하철에서처럼 몸을 살짝 틀며 고개를 우아하게 옆으로 기울였다. 아침에는 머리카락을 치우기 위한 동작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냥 습관인 모양이었다. 메이 본인의 예쁜 목을 돋보이게 하는 습관. 튜링이 말없이 메이의 목 언저리만 바라보자 메이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요. 여기서 세 블럭 쯤 떨어진 클리프가에 적당한 식당이 있거든요.”
메이의 말에 튜링이 불현듯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상담자는 내담자와 사적인 만남을 가져선 안 돼요. 특히 아직 상담을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경우에는..”
“저도 그건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맞아요. 우린 아직 상담을 시작하지 않았죠.”
“네, 그러니까 메이씨 제안은 감사하지만,”
“그러니까 제 제안은 상담 대신 데이트를 하자는 거였는데.”
“예?”
“클리프가에, 라이언 맥과이어라는 사람의 가겐데, 너무 비싸지도 않고, 채식 메뉴도 있고, 가볍게 술도 한 잔 할 수 있어서 첫 데이트에 ‘적당한’ 식당이 있어요.”
튜링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메이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사실 나도 당신 스타일이 취향이거든요.”
메이가 웃었고, 튜링은 자신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날 튜링의 마지막 상담은 결국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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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나 뚫어지게 쳐다봤던 거,”
“응?”
“지하철에서요.”
“아아.”
“그거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거예요?”
“아니요? 그냥 나랑 똑 닮은 사람이 있는 게 신기해서.”
“아.. 아 그렇구나...”
“거짓말이에요.”
“예?”
“예뻐서 쳐다본 거 맞아요. 그래서 상담실에서 보자마자 데이트 신청했던 거고.”
“메이...”
“앗 혹시 지금 감동했어요?”
“그 말 엄청 나르시즘처럼 들린다구요.”
“튜링 선생님.”
“네?”
“저는 선생님이 상담사처럼 굴 때가 두 번째로 섹시해 보여요.”
메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
“물론 첫 번째는 침대 위에 있을 때. 바로 지금처럼.”
튜링이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마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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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엠님 리퀘, 메이튜링 만원철에서 같이 낑기는데 메이가 튜링 뚫어져라 쳐다봐서 튜링이 겁먹는거..입니다.
ㅇ..어쩌다 이렇게 길어졌죠...?
제 안의 메이는 싸이코가 아니라서.. 메이튜링이 막 훈훈하고.. 급달달해진...
헿....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