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펠] 페레그린과 이상한 엠마의 수작질 3
많이 늦었네요 파판이 업데이트되는 바람에...(피폐) 민나 파판14 하세요 엠펠도 하세요...
-
다음날 엠마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페레그린의 방으로 가려고 했으나, 엠마를 아주 좋아하고 걱정해주는 여러 친구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조금 눈치를 보다가 밀라드를 앞세워 엠마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그건 엠마가 약 4주간 본 퀴즈 시험지 뭉치였다. 밀라드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엠마, 엄마처럼 굴고 싶진 않지만 너 벌써 3과목에서 위험해. 우리가 같이 듣는 과목 중에서 말이야. 같이 듣는 게 3과목뿐이지만.”
“훔쳐보려던 건 아닌데 조교님이 네가 안 찾아갔다면서 네 퀴즈 시험지를 우리한테 줬어. 그걸 본 다른 조교님도 네 시험지를 줬고. 원랜 우리가 받아오면 안 되는 거지만...”
“교수들이 한번 널 불성실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턴 니가 아무리 공부해도 좋은 점수 못 받을 걸. 니가 그런 걸 신경 쓰긴 한다면 말이야.”
올리브는 조심스럽게 시험지를 어디서 났는지 밝혔고, 에녹은 올리브 말을 자르고 겁부터 줬다. 엠마는 성적에 대해서는 전혀 겁먹지 않았지만. 페레그린이 자신을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건 싫었다.
“성실하게 보이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엠마가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필기 노트와 요약정리 복사본이 튀어나왔다. 각자 맡은 과목과 파트가 있는 것 같았다. 엠마 품에 산더미 같은 종이뭉치들이 쌓이고, 마지막으로 브로닌이 엠마 손에 종이 쪼가리 하나를 쥐어주었다.
“성실하게 보이고 싶으면, 성실해져야지.”
“그건 우리 스터디 시간표야. 다음주 필기 담당들은 이미 정해졌고, 너는 다다음주부터 끼워 넣었어. 페레그린 교수님 수업부터 시작하면 돼.”
“이번 학기엔 우리 중 누구도, 제발 추가 시험도 추가 레포트도 없었으면 좋겠어. 물론 유급도 없었으면 좋겠고.”
“그 누구는 바로 엠마를 말하는 거야, 엠마, 너도 알겠지만.”
“친구에게 굳이 빈정거려줘서 고마워, 에녹. 너도 보충 레포트 썼으면서 왜 새삼 꼰대처럼 굴어?”
“한 과목이었잖아! 얘는 모든 과목이었고.”
“엠마한테 너무 그러지 마. 지금 정신이 좀 없나본데.”
“엠마, 우리 얘기 듣고 있어?”
엠마는 페레그린의 이름을 들은 뒤부터는 친구들 얘기를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내가 페레그린한테 뭘 하면 된다고?”
“페레그린 교수님한테 뭘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수업 때 필기만 하면 돼. 다음다음주에.”
“그리고 그 다음주에 필기할 수업은 나중에 알려줄 거야.”
“너희 정말 ‘그 페레그린’ 수업 필기를 얘한테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해?”
“엠마, 너는 관심 없는 거 같아서 우리끼리만 스터디 하고 있던 거 미안해. 강요하는 건 아닌데, 니가 혼자 공부하는 게 힘들면 혼자 할 필요 없어. 필기 꼼꼼히 하는 게 힘들 거 같으면 첫 주는 내가 좀 도와줄게. 아니면 녹음기를 써도 되고, 페레그린 교수님은 질문도 잘 받아 주시니까 메일을 보내봐도 되고, 아니면... 정 힘들면 다음부턴 조류학 수업 필기에선 빼줄게.”
“아냐! 나 페레그린 조... 크흠, 페레그린 교수님 수업 좋아.”
“어.. 그거 다행이네. 우린 이제 수업 전까지 복습할 거야. 오늘 바론 교수님이 퀴즈 본다고 한 건 알지?”
“뭐...?”
친구들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엠마를 양쪽에서 붙들고 끌고 갔다. 덕분에 수업 전에 페레그린의 번호를 따오려던(페레그린과 얘기가 길어졌으면 그대로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지만) 엠마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엠마가 점심시간 외에는 와본 적 없는 식당에서는 이미 몇 무리가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엠마는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함께 퀴즈 준비를 하고,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붙잡혀 또 복습을 하고, 스터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이 스터디를 처음 제안한 호레이스가 모임이 기본적으로 굴러가는 방식과, 그들이 다함께 듣는 세 과목과 각 과목 교수님들이 점수를 주는 방법에 대한 브리핑과(페레그린 교수 얘기가 나올 때는 엠마도 집중할 수 있었다.) 매주 보는 퀴즈는 어떻게 대비하는지, 스터디 모임 시간은 언젠지 등등을 말하는 동안 엠마는 일곱 번쯤 일어났다가 다른 애들의 손에 붙잡혀 다시 앉았다.
이후 필기 교환과 오탈자 수정과 이해가 힘들었던 부분에 대한 짧은 토의가 끝난 뒤 엠마가 겨우 애들과 떨어져 초조하게 페레그린 교수 방으로 달려간 건 6시가 다됐을 때였다. 금요일이었고, 그러니까 다음날과 그 다음날은 토요일 일요일이었고, 점점 짧아지는 해는 이미 주황빛이었다. 며칠만 기다리면 수업시간에 페레그린을 만날 수 있었지만, 엠마는 꼭 지금 만나고 싶었다. 번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락처를 몰라도 처음 만난 술집에 가면 주말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전화번호를 물어볼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았다. 엠마가 뛰는 이유는 단지 페레그린이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엠마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교수실이 늘어선 복도에 도착했을 때, 엠마는 빛이 쏟아지는 창을 등지고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이 페레그린이라는 걸 엠마는 바로 알아챘다. 너무 활짝 웃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웃는 바람에 엠마의 뺨이 오븐에 넣은 빵 반죽처럼 부풀었다.
“블룸양? 괜찮아요?”
페레그린이 본 엠마는 100미터 달리기를 막 끝낸 사람처럼 가슴을 들썩이며 입을 꾹 다물고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엠마는 침을 꼴깍 삼키고 적당히 활짝 웃었다.
“아안녕하세요! 괜찮아요. 그냥 좀 뛰고 싶어서 뛰어 왔거든요.”
“운동을 좋아하나 봐요. 바람직한 생활습관이네요.”
페레그린이 ‘젊음은 좋은 거지’라고 눈빛으로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엠마에게 길을 비켜주듯이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엠마는 조금 더 오래 페레그린과 대화하고 싶었다.
“우, 운동, 좋아하세요?”
엠마의 질문에, 작별인사를 꺼내려던 페레그린이 멈칫했다. 페레그린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멋쩍게 웃었다.
“아뇨, 그냥 집 근처 산책하는 정도만 좋아해요.”
“그럼 같이... 네? 안 좋아하신다구요?”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해요.”
운동을 좋아한다고 하면 주말에 같이 공원에라도 가자고 하려했던 엠마의 생각이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노을처럼 뻔히 보였지만 페레그린은 노을을 등지고 서있었다. 엠마는 다른 핑계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제가 공부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오! 질문인가요?”
엠마는 공부 얘기를 꺼내자마자 반짝이는 페레그린의 눈동자를 보고 황급히 뒷말을 바꿨다. 지금 당장은 뭘 물어보려 해도 아는 새 이름조차 없었다.
“...생길 거 같아서요. 제가 궁금한 게 생기면 못 참는 타입이거든요. 그, 궁금한 게 생각나면 주말에 연락해도 돼요?”
“물론이죠.”
“......”
“......”
가벼운 미소를 띠고 기특한 학생을 보는 페레그린과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딴 곳에 시선을 두며 기다리는 엠마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엠마가 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을 깨려 조심스럽게 페레그린을 불렀다.
“...교수님?”
“네, 미스 블룸?”
“저, 제가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요..?”
“아! 미안해요. 잠시만...”
엠마가 환기시켜주자 페레그린은 급하게 가방을 뒤적거렸다. 엠마의 시선은 페레그린의 (여전히 까만 네일아트가 되어있는)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단색 정장으로 가려진 팔을 따라 올라갔다. 페레그린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깃털모양의 커프스 버튼과 칼라핀이 조금씩 보였다. 엠마가 페레그린의 귀걸이도 새 모양일까 궁금해져서 고개를 드는 순간 페레그린도 가방에서 명함을 찾아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들었다.
“내 명함이에요.”
“감사합니다. ...어?”
페레그린이 준 명함에는 학과와 학교와 페레그린의 이름, 지역번호까지 함께 찍힌 교수실 전화번호와 동호수, 학교 계정의 이메일 주소만 적혀있었다. 뭔가 더 있을까싶어서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확인했지만 그게 다였다. 페레그린은 엠마가 당황한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일 오피스아워엔 내 개인실로 전화하면 대부분은 받을 거예요. 난 이메일을 더 선호하긴 해요. 길고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고 사진 첨부도 할 수 있잖아요. 메일함은 주말에도 자주 확인하니까 편하게 연락 줘요.”
그리고 페레그린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 게 불편한 듯 페레그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고작 3분 21초 지체됐지만 더 늦을수록 시내 정체구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터였다. 페레그린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다시 웃으며 엠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좋은 주말 보내요, 미스 블룸.”
“잠시만요! 제가 궁금한 건,”
엠마가 돌아서는 페레그린을 급하게 잡았다. 페레그린은 반쯤 돌린 몸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엠마를 쳐다봤다. 엠마는 지금이 페레그린에게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기에 전혀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페레그린의 눈썹이 엠마를 재촉하듯 위로 올라갔다.
“궁금한 게 뭐죠?”
“저, 그러니깐...”
그러고보니 페레그린 교수는 지각에도, 과제 제출을 늦게 하는 것에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엠마의 귀에 틱톡틱톡 바쁘게 움직이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엠마의 혀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한번 훑었다. 내면의 엠마가 엠마를 질책했다. 엠마 블룸 멍청아 일부러 찾아와서 교수님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어떡해?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해도 모자랄 판에, 교수님이 좋아하는...
“성실한 사람! ...을 좋아하시나요?”
엠마는 말을 뱉자마자 도를 아시냐고 물었어도 이것보다는 뜬금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인정했다. 페레그린 역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엠마의 질문에 잠시 입을 벌린 채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어... 물론이죠. 성실한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어요?”
“취향이 조금 다르실 수도 있으니까.”
“음, 그게 궁금했나요?”
“네.”
“그래요, 그럼...”
“좋은 주말 되세요.”
페레그린은 가볍게 머리를 움직여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엠마는 한동안 복도에 서서 얼굴을 감싸 쥐고 부끄러운 짓을 한 자신을 살해하고 싶어 하는 내면의 다른 엠마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번: 0rEUinLr (0) | 2017.03.25 |
---|---|
[엘산나] 장갑 (0) | 2017.03.09 |
[엠펠] 페레그린과 이상한 엠마의 수작질 2 (0) | 2016.11.30 |
[엠펠] 페레그린과 이상한 엠마의 수작질 1 (0) | 2016.11.28 |
[엠펠] 감기 (0) | 2016.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