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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08 [창작] 발자국의 그림자
  2. 2015.07.13 [창작] 연과 진
  3. 2015.06.16 [창작] 가디건

 공통주제 스터디 '발자국의 그림자'로 참여한 글입니다. 스터디 링크 -> http://get-out-of-duruurung.tistory.com/

 

 

 

 

 

 

(욕과 trigger가 될 수 있는 소재가 나옵니다. 거부감 있으신 분들은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시고 읽어주세요...)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혼자 우산을 쓰고 가정법원에 다녀왔다. 각종 증명서와 등본과 무슨무슨 확인서와 몇 푼 되지 않는 내 친엄마의 재산 목록과 함께. 수 년 전, 우리 제발 연 끊고 살자고 죽일 듯이 노려봤던 사람 하나가 죽었다. 그에겐 빚은 많았고 모아둔 재산은 없었다.

 


 다른 건 서류상으로 처리하고, 그가 살던 방에는 그냥 청소 도우미 몇을 불러 버릴 수 있는 물건은 전부 버려 달라고 했다. 그냥 버릴 수 없는 대형 폐기물 처분한 값까지 거의 내 일주일 치 알바비가 들었지만, 겨우 도망쳐 나온 인간의 삶을, 어떤 형태로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빚쟁이들이 찾아와 집을 뒤집고 간 날이면, 혹은 일터에서 술에 절어 귀가한 밤이면, 그는 나 때문에 본인 인생이 고꾸라졌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나더러 니 애비의 뺀질거리는 면상을 닮았다며 너는 애비한테서도 버림받은 년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내 친아빠는 처음엔 엄마와 결혼할 것처럼 굴다가 결국 도망쳤다. 엄마는 그래서 나를 낳았다고 했다. 그 시팔놈이 착한 척 안 하고 처음부터 개새끼처럼 굴었으면 나를 낳을 필요도 없었을 거라고 했다. 그에게 나는 죽이지 못한 살덩이였다. 본인에게 매달린 혹이었다. 어느날인가 나는 그에게 버림받은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니 인생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시궁창이었다고 소리 질렀다가 호되게 맞았다. 따귀를 맞고 배를 걷어차이고 뺨과 등과 어깨에는 붉게 부푼 손톱자국이 생겼다. 나는 방으로 도망쳐 문을 잠갔다. 문 너머에서 계속 분풀이하는 소리를 안 들으려 베개로 귀를 막았다. 나는 끊임없이 그 여자를 죽이거나 내가 죽는 상상을 했다. 억울했다. 나는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태어나게 해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 지긋지긋한 밤들이 겨우 머나먼 과거로 느껴지던 차였는데, 어렵게 외면한 과거는 너무나 쉽게 되살아났다. 이제 좀 안정이 된 것 같다고 안도할 때 인생은 항상 니 생각대로 흘러가게 둘 줄 알았냐고 조롱하듯이 나를 휘저었다. 얼마 되지 않는 내 평생 계속 저주해온 사람이었다. 죽었다는 소식에 당연히 후련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도 이름표를 붙이지 못할 감정들에 시달렸다.

 


 괴로운 기억밖에는 남기지 않은 사람이 죽었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는 도망쳤지만 항상 내 발뒤꿈치를 물 수 있는 곳에 도사린 것 같았던 사람이, 영원히 사라졌다. 법원에 한정승인인지 상속한정인지 하는 서류도 냈으니, 빚쟁이들이 내게 찾아와도 나는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다, 라고, 내가 비싼 돈 주고 자문을 구한 변호사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제게 잘 찾아오신 겁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시달리실 필요 없습니다.”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서류를 작성하고, 증빙 서류 몇 개를 떼고, 그 와중에 간단하게 장례식을 치루고, 분도 당도 없이 흔적도 없이 내 인생의 가장 큰 그늘을 벗어버렸다. 하지만 내 기분은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 울고 싶지도 슬프지도 않았지만 기분이 좋지도 않았다. 그렇게 증오하던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됐는데도 나는 여전히 화가 났다.

 


 나는 갈 곳 잃은 분노를 안고 지하철을 탔다. 머리가 아팠다.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뒤집어졌다. 엄마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계속 이랬다.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속이 거북해서 일부러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탄 거였는데, 사람이 많은 2호선으로 갈아타자 울렁거림은 더 심해졌다. 내릴 때까지 어금니를 꾹 물고 침을 삼키며 토기를 겨우 참았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웠다. 그러고 나니 좀 진정됐지만 버스는 도저히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집까지는 오르막길을 20분이나 걸어야 한다. 나는 좀 뜸을 들이다 결국 아까보다 더 퍼붓는 빗속을 걸었다. 우산을 때리는 비가 무겁게 느껴졌다. 걷기만 하는데도 입에 신 침이 고여 몇 번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담배도 한 번 더 피웠다. 혹시 몰라 올라가는 길에 약국에서 소화제와 두통약을 샀다.

 


 식은땀에 젖은 채로 도착한 집은 정확히는 내 집은 아니었다. 저번 달부터 신세지는 아는 언니의 원룸이었다. 실은 그냥 아는 언니는 아니고, 나는 우리가 그냥 몇 번 자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언니는 좀 내 여자친구처럼 굴었다. 나도 언니가 싫지는 않아서 그냥 냅뒀다. ....여기서 나가면 당장 살 곳이 없기도 했다. 나는 푸근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흠뻑 젖은 우산을 신발장 옆에 기대놓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돌아왔지만 기왕 못 간다고 말한 거 알바는 그냥 쉬기로 했다. 몸이 따뜻해지자 멀미도 가라앉았다. 나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전기 주전자로 물을 끓이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내가 깬 것은 언니가 돌아온 뒤였다. 밖은 깜깜했고 방 안에는 언니가 사온 치킨 냄새가 가득했다. 언니는 머리를 묶고 싱크대에서 치킨무를 뜯고 있었다. 좁은 신발장 앞에는 언니 우산과 내 우산 두 개가 펼쳐져 있었다. 언니가 내가 깬 것을 보고 치킨 박스를 뜯으라고 했다. 그 말대로 하려고 비닐을 걷는 순간 강한 치킨 냄새에 토기가 올라왔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 변기를 붙잡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너 요즘 계속 그런다.”
 “그냥 체했나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체했다고? 거짓말 할 필요 없는데.”

 


 언니가 비웃듯이 말했다. 나는 가끔 이 언니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언니는 못 들은 척 맥주캔을 뜯었다. 탄산이 토도도도도독 캔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도 속이 울렁거렸다.

 


 “갑자기 뭐냐고?”
 “너, 생리 언제 했냐?”
 “뭐?”

 


 언니는 니가 여기 살고부터 한 번도 생리를 한 적이 없네 어쩌네로 시작해서 갑자기 자기를 좋아하는 건 맞냐고 신경질을 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울컥했다. 왜 자꾸 짜증나게 내 여친인 척 하냐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다. 나는 구역질을 참듯이 그 말을 삼켰다. 그래 우리가 사귀나보다. 시발 나랑 얘랑 사귀는 건가봐. 그렇게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한 건 없어 보였다. 이번 주 내내 언니한테 신경을 못 써주긴 했다.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아무리 연 끊고 살았어도 엄마가 죽었다. 불쌍하게 생각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뜬금없이 생리? 내 성격 지랄맞단 소리를 돌려서 하는 건가? 시발 뭐 어쨌단 거야?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욕이 튀어나왔고 언니는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 계속 내게 따져댔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둘 다 일어서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몰라서 말 안 하는 거 같애?! 존나 괜찮으니까 말하라고.”
 “시발 뭘 말하는 건지 알아야 말을 하든 말든 하지, 혼자 알지 말고 나한테도 좀 알려주지? 뭘 아는데? 시발 뭐가 괜찮다고 지랄인 건데?”
 “너 재희새끼랑 잤다며! 매장에 소문 쫙 났던데!”

 


 나는 말문이 막혔다. 미친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래도 언니 집에 들어오기 전인데? 내가 멈칫하자 언니는 더 기세등등해졌다. 어떻게 했길래 매장 사람들이 다 아냐 존나 그렇게 좋아서 콘돔도 없이 했냐 지금 그새끼 애 배서 입덧하는 거 아니냐 별 개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걸 듣다가 입덧이란 말에 정신이 들었다.

 


 “시발 무슨 입덧이야 이게! 존나 무식한 소리 할래!?”

 


 언니와 나는 다시 왁왁 거렸다. 나는 계속 안 잤다고 우겼다. 하는 말을 들어보니 언니가 뭘 제대로 아는 건 아닌 거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내가 졌다. 언니가 울음을 터트려서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빌어먹게 입 싼 박재희랑 내가 잤든 안 잤든 언니가 진짜 뭘 알든 모르든 어쨌거나 이 집이 언니 집인 이상 내가 숙여야 했다.

 


 “임테기 사 오면 될 거 아냐!! 존나 아니기만 해봐!”

 


 나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눈물범벅이 된 언니를 두고 집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깜깜했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두고 나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서 그냥 야상에 붙은 후드를 뒤집어썼다. 큰소리는 쳤지만 겁이 났다. 몸이 덜덜 떨렸다. 비 때문이었다.

 


 “시팔.”

 


 집에 오는 길에 소화제를 샀던 약국까지 뛰어갔는데 약국은 이미 닫혀있었다. 시발 8시도 안 됐는데. 의약분업인가 뭔가 하고부터는 약국들도 병원처럼 일찍 닫았다. 지들이 병원이야 시발? 밤에는 사람 안 아픈가. 응급실은 존나게 비싸게 받아 처먹으면서. 나는 시발시발 하면서 큰길까지 내려갔다. 이미 약국까지 뛰느라 숨이 차서 거기서부턴 그냥 걸었다. 다행히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비를 맞아서인지 내리막길을 천천히 걷고 있어서인지, 아까보다 속도 많이 가라앉았고 머리도 식었다. 몸은 여전히 떨렸다. 후드에 떨어지는 가는 빗줄기 사이로 언니랑 싸울 땐 들지 않았던 두려움이 내 머리를 두드렸다.

 


 재희새끼가 마지막에 콘돔 없다고 그냥 하기는 했지. 그래도 시발 안전한 날이었는데. 진짜 임신이면 어떡하지? 수술비 얼마지? 아나 씹새끼 돈 안 주려고 지랄할 텐데.

 


 내 머리 속은 걱정과 욕으로 가득 찼다. 머리를 암만 굴려도 알바비를 가불받지 않으면 수술비가 안 나올 것 같았다. 언니는 모아둔 돈이 좀 있을 테지만 이 일로는 절대 한 푼도 빌려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당장 쫓아낼지도 몰랐다. 아.. 아오 시발.

 


 큰길까지 내려갔더니 열린 약국이 있긴 있었다. 임신 테스트기를 사서 나오는데 약국 유리문에 잔뜩 일그러진 내 얼굴이 비쳤다. 다시 목에서 울컥하고 신물이 올라왔다. 짜증이 치밀었다. 약국 앞에 서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별로 진정되지 않았다.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려고 입에 물었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그 행동 때문에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맞든 기든 어차피 지울 건데. 아, 존나 기분 더럽게, 시팔...

 


 나는 끝내 그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 대신 나는 물었던 담배를 손으로 구기고 발로 몇 번이나 짓이겼다. 몇몇 사람이 길바닥에서 쿵쿵거리며 지랄하는 나를 흘겨보고 지나갔다.

 


 이제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시달리실 필요 없습니다. 변호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지랄하네 사기꾼새끼. 나는 전혀 그 어떤 그림자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과거의 망령이 내게 저주를 건 것 같았다. 엄마처럼은 안 살겠다고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쳤는데, 나는 그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고스란히 그가 걸은 발자국 위에 서있었다.

 

 

 


 걸음마다 점점 더 무거워지는 발을 간신히 움직여 집으로 향했다. 걸을 때마다 땅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기분으로 집 앞에 도착해서야 다른 곳에서 확인하고 들어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발 멍청한 새끼. 내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패고 싶었다. 한참동안 눈을 꾹 감고 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맞은편 연립주택 복도에 누군가 나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더 오래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손이 꽝꽝 얼어서 문고리를 몇 번 헛돌렸다.

 


 문을 열자마자 치킨과 치킨무 냄새가 훅 끼쳤다. 언니는 문에서 등을 돌리고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는 또 역해져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나 왔다고 해 봤지만 그래도 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고 비에 젖은 야상을 대충 바닥에 놓고 임신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약국 유리문에 비친 나보다도 더 못 볼 꼬락서니였다. 전혀 춥지 않은데도 덜덜 떨리는 손으로 테스트기 포장을 깠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검사 방법을 몇 번이고 읽었다. 거기엔 3분 이내로 결과가 나온다고 써져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30초 만에 나왔다.

 


 “씨발.”

 


 울고 싶었다. 사실 조금 울었다. 한 줄이었다. 콧물이 나와 훌쩍거리고 있었는데 화장실 앞에 언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나는 물도 안 내리고 대충 바지만 꿰입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문 앞에는 역시 언니가 있었다. 나는 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한 줄이야! 알아? 임신 아니라고 시발! 내가 진짜 잘 할게. 앞으로 진짜 진짜 잘 할게. 사랑해. 언니 정말 사랑해. 나한텐 언니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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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 |

[창작] 연과 진

기타 / 2015. 7. 13. 12:39

공통주제 스터디 '다키마쿠라'로 참여한 글입니다. 스터디 링크-> http://get-out-of-duruurung.tistory.com

 

 

 

 

 

 

 

 

 

 

 

 연과 진은 같은 방에 산다. 그들의 방에는 1인용 치곤 넉넉하지만 2인용이라기엔 좀 빠듯한 크기의 침대가 하나 있다. 둘은 그 침대에서 같이 잔다. 수 년 전부터 진이 연을 품에 안고 같이 자는, 그런 사이였다.

 


 둘 다 땀에 절어 끈적한 몸으로 밭은 숨을 내뱉으면서 서로의 입술이 호흡기라도 되는 양 허겁지겁 찾아 무는 밤들도, 분명 있었다. 그러나 요 근래엔 그런 일이 드물었다. 사실 둘 다 상대가 관계를 요구하는 게 아닐까, 요구할 수야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이토록 피곤한 오늘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이어진지 제법 오래되었다. 진이 연을 끌어안고 자는 습관에 대한 연의 감정이 바뀐 것도 꽤 예전부터였다. 연애 초기엔 그게 좋았다. 자는 동안 진이 연에게 맨몸을 붙여올 때면 연은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문자 그대로 온 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는 답답했다.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게 단지 무게로 느껴졌고,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래도 연과 진은 가끔씩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주로 진이 퇴근길에 연이 좋아하는 가게에서 치즈케이크를 사다 줄 때, 진이 회사 때문에 평일 낮에 처리하기 곤란한 일을 연이 대신 처리해줬을 때, 둘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랑을 얘기했다. 가끔 싸우는 때도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은 대체로 별 탈 없이 굴러갔다. 연과 진의 사이를 아는 사람 중 누구도 그들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연만 빼고.
 어쩌면 진도 빼고.

 

 

 

 연은 어느 날 진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큰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척도 없이 출근하고, 방 밖의 소리만 난잡하게 들려오는 고요한 빈 방에서 연 혼자 눈 떴을 때, 다시 잠들기도, 그렇다고 바로 일어나기도 애매한 기분으로 벽에 비춰진 작은 창 크기의 햇빛을 보았을 뿐이었다. 밖에는 개 짖는 소리와 드릴 소리,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 뉘 집 자식이 치는 건지 모르지만 지루함이 가득 묻어나는 형편없는 피아노 소리, 바람결에 실려 오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가득했으나, 방 안은 너무도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연은 순간 소름이 끼쳤다.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벽에 붙은 일그러진 거울을 보았다. 그 거울은 연이, 아니 진이 이 집에서 살기도 전부터 붙어있었던 것이라 했다. 기묘하게 일그러진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연은 안도감을 느꼈다. 바로 그 순간이 연이 깨달은 순간이었다. 진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것으로 배신감이나 슬픔, 분노, 박탈감 대신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연은 더 이상 스스로 사랑이 식지 않았다고 부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안도감 다음으로 연에게 찾아온 것은 해방감이었다. 그리고 일말의 죄책감과, 마지막에는 위기감이 한여름 욕실의 습기처럼 연을 둘러쌌다. 연은 진과 헤어질 수 없었다.

 

 

 왜? 정 때문에? 혼자되는 게 두려워서? 당장의 생활에 문제가 생기니까? 지금이 편하니까? 연은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들을 헤아려봤다. 전부 다 맞았다. 하나씩 꼽아볼수록 연이 진과 헤어지지 못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연에게 진은 6년 동안 만난 사람이고, 현재 생활의 일부다.

 


 우리가 헤어진다면... 연은 상상해보았다. 진과 헤어진다면, 진 없는 하루가 아주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차차 익숙해질 것이었다. 진과 살면서 진의 돈으로 사와서 진과 공유하는 연의 물건들도, 세심하게 분류해야겠지만 놓치고 가더라도 아쉬울 것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거진 다 공산품이니까. 그러나 연은 우선 이 집을 나서면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이 이유가 제일 컸다. 앞서 생각한 정 때문이니, 부모님도 안 계신 타지에 홀로되는 것이니 하는 것은 사실 부가적인 이유였다. 진과 만나기 전부터 이 도시에 살았는데 다른 친구 하나 없을 리 없지 않은가. 연은 원래 혼자 살았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어렸고, 학교를 다니는 중이었고, 엄청 친하지 않은데도 연이 불러내 아쉬운 소리 한 번 찌르면 하루 이틀 재워줄 동기도 몇 있었다. 재워주진 않더라도 실연의 아픔과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들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나이 들었고, 부모님 용돈도 없고, 친하지 않은 누군가를 갑자기 불러낼 염치도 없다. 아니 염치의 문제가 아니고, 하루든 일주일이든 혹은 저녁 한 끼든, 신세를 부탁할 거면 사정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연은 이 나이에, 알바로 모은 푼돈마저 다 탕진하고 사귀는 사람 집에 빌붙어 딱히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 밥만 축내는 스스로의 한심함을 타인에게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연은 막막해졌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은, 진은 왜 연에게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걸까라는 것이었다. 연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깊은 숨이 가늘게 빠져나갔다. 거짓말처럼 방 안이 소음으로 가득 찼다. 연은 부엌의 작은 창문을 닫아 소음을 줄이고, 싱크대에 기댄 채 차분히 생각했다. 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지는 꽤 됐다. 자신이 진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그쯤 됐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확신하는지 일일이 증거 따위를 들어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것은 이미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상하다. 진은 대체, 왜 연과 헤어지지 않는가?

 

 

 연은 진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라 결론 내렸다. 연 자신도 방금 깨닫지 않았는가. 진의 행동은 그저 몸에 밴 습관 같은 거다. 관계를 가진 밤이든 가지지 않은 밤이든 여전히 진은 연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잔다. 진은 연을 위해 연이 좋아하는 간식을 사온다. 같이 장을 볼 때면 항상 무얼 먹고 싶냐 물어본다. 퇴근하고 피곤할 텐데도 연을 위해 요리를 해줄 때도 있다. 집에서 놀기만 하는 연보다도 매일 출근하는 진이 집안일을 더 능숙하게, 많이 해낸다. 진이 새로 사는 옷은 전부 연의 취향에 맞춘 옷이었고, 연을 만나기 전에 산 옷들 중 연이 싫어하는 것들은 낡았다고 버려지거나, 좀약 냄새가 밸 때까지 옷장에만 처박혀 있었다. 연이 멋대로 사온 다육 식물 화분을 돌보는 것도 거의 진의 몫이었다. 생각할수록 진이 손이 많이 가는 연과 계속 같이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연은 진과 살아야 할 이유가 아주 많았다. 아니 사실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당장 혼자 집구하고 밥 사먹을 돈이 없다. 적어도 방을 구할만한 돈을 마련할 때까지는 진을 속여야 한다.

 


 연은 조심스러워지기로 했다. 연이 진을 사랑하는 척하는 것은 쉽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연은 진이 계속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연은 진을 아직 사랑하는 척 하되, 진에게 너무 넘치는 사랑을 부으면 안 되었다. 진이 기울어진 관계를 눈치 채는 순간 연은 짐을 싸야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진은 착하니까, 연이 방을 구할 때까지 기다려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내 미래에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나 구차하지 않나? 연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비겁하고 구차하다. 이르든 늦든 연은 어쨌거나 스스로 돈을 벌어 이 집에서 나가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연은 우선 설거지를 했다. 음식쓰레기는 골목 앞 수거함에 내놨지만 분리수거는 하지 않았다. 퇴근한 진은 깨끗한 싱크대를 보고 별 말이 없었다.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면서 깨끗하게 비어있는 음식쓰레기통을 봤을 때도 별 말이 없었다. 하지만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는 진의 손엔 연이 좋아하는 녹차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그 다음 날부터 연의 하루는 이전보다는 바빠졌다. 연은 화분에 물은 줬지만 화장실 청소는 진이 말을 꺼낼 때까지 하지 않았다. 가끔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했지만 분리수거는 끝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은 공모전을 뒤져 과거에 해놨던 작업물과 주제가 아주 안 맞지만 않으면 다 제출했다. 뭐든 하나만 걸리라는 심정이었다. 알바도 알아봤다. 처음에는 초등, 중등 과외 쪽을 알아봤는데, 그쪽은 현재 대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휴학한 애들을 선호했고, 그런 애들은 차고 넘쳤다. 고등학생 과외는 자신이 없었다. 학원 보조 강사 자리는 전화 걸어보면 이미 구했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다음으로는 번역이나 타이핑 알바 같은 걸 알아봤다. 출퇴근 할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닌 규모의 일감 같은데 영어 점수 800이니 900이니, 컴퓨터 자격증이니 하는 것들을 요구했다. 결국 연은 편의점과 카페, 피씨방 알바들을 뒤져 겨우겨우 패스트푸드점 오전 알바 자리를 구했다. 말이 오전이지, 연은 첫차시간부터 점심 할인 때문에 손님이 넘치는 오후 2시까지 일했다. 오전에 강남까지 영어 학원을 갔다가 점심 먹으며 스터디를 하고 바로 매장으로 튀어 오는 거라고 주장하는,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알바생이 교대를 부탁할 때는 가끔 저녁 근무로 바꿔주기도 했지만, 연은 기본적으로 저녁에는 집에서 진을 기다렸다. 저녁으로 먹을, 계란말이나 소시지구이 같은 간단한 반찬을 해놓고 기다릴 때도 있었고 근처 마트에서 타임세일 하는 도시락을 사놓고 기다릴 때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릴 때가 더 많았다. 월급 형태로 알바 수당을 받으면 진에게 자신이 살테니 외식하자고 조르기도 했다. 진은 그때마다 밋밋하게 집에서 치킨이나 시켜먹자고 했다.

 

 

 진은 아마 몰랐겠지만, 연은 숨죽이고 진을 살폈다. 연이 진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조차 진이 눈치 못 채도록 눈치를 보았다. 이제 연은 밤마다 진이 아직 자신을 끌어안고 자는 것에 안도한다. 그것은 연에게 있어서, 아직 진은 모르고 있다는 지표와 같다. 진은 그들 사이에 남은 게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

 

 

 

 연이 햄버거 알바로 몸에서 사리 쌓으며 월급을 세 번 받을 동안, 그 어떤 공모전에서도 당선 됐다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 생활비를 진이 거의 부담했으므로, 연은 세 달 간 그냥저냥 돈을 모았다. 이대로 나가 방을 구하면 햄버거 알바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들테니 알바를 하나 더 구하거나, 가능하다면 제대로 된 직장에 취직을 해야겠지만, 어쨌거나 이제 더 이상 진을 속여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전까진 구차해도 나가서 굶어죽을 순 없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연은 왜 지금에 와서도 진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지 못하는 건지, 스스로 알 수 없어졌다. 돈이 없다는 것은 핑계였다. 아주 속물 같고,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보이고 그럴싸한 핑계.


 연은 돈을 조금만 더 모으자고 생각했다. 이대로 나가서 알바를 늘려 뺑뺑이만 도느니, 염치없지만 몇 달 더 진의 집에 살면서 돈을 더 모으고, 어디든 알바 말고 진짜 직장을 구하자고 생각했다. 연은 공모전에 디자인을 보내는 것을 관뒀다. 하지만 취직 활동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포트폴리오도 거의 진척이 없었다. 연은 자신이 정확히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도통 모르겠는 상태가 되었다. 이런 기분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진로를 선택할 때도, 대학 졸업을 앞뒀을 때도, 부모님 지원이 끊기고 진의 집에 처음 들어올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날마다 9시간 가까이 서서 햄버거를 팔아 버는 돈이 한 번 더 입금되었다.

 

 

 

 

 그날 진은 회사 워크샵 때문에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온다고 했다. 그리고 연은 그날 저녁 오랜만에 만나는 대학 동기와 약속이 있었다. 동기와 연은 만나자 마자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동기와 연은 둘 다 주절주절 자기 신세를 늘어놓았다. 동기는 회사 다니느라 힘들었고, 연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힘들었다. 연이 보기에 동기는 배부른 투정 중이었고, 동기가 보기에 연은 최선의 노력도 다 하지 않으면서 빌빌대는 루저였다. 일찍부터 술을 마셔서인지, 동기는 늦지 않은 시간에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해버렸다. 연은 정신을 못 차리는 동기에게 겨우겨우 집을 물어 동기가 혼자 사는 집까지 끌고 갔다. 그 방의 첫인상은, 작은 침대 위에 침대만한 큰 쿠션이 있다는 것이었다. 연이 동기를 침대 위에 던져놓자마자 동기는 그걸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연이 숨을 몰아쉬며 세상 편해보이네 하고 혼잣말을 하자, 뭉개진 발음으로 이건 다키마쿠라가 아니고 그냥 베개가 큰 거고 어쩌고 하는 중얼거림이 돌아왔다. 다키마쿠라 얘기가 아니었다는 말은 그냥 삼키고 연은 동기에게서 몸을 돌려 작은 방을 둘러봤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물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연은 이미 잠든 것 같은 동기에게 본인이 나간 뒤 문을 잠그라고 말하고 그 집에서 나왔다.

 

 

 연은 동기를 데려다 놓느라 적당히 술이 깬 상태로, 반대로 말하자면 적당하게만 취한 상태로 진의 집에 돌아왔다. 방은 어두웠다.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은 물부터 찾아 마시고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워 긴 숨을 뽑았다. 이를 닦았더니 술냄새가 가시는커녕 더 지독하게 났다. 연은 푸푸 숨을 뱉으며 가만히 누워 숨을 쉬었다.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 가늠도 안 될 만큼 잡다했고, 맥락도 없었다. 아마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은 자신이 깨어있는 건지 잠든 건지 몰랐다. 잠들었다면 대체 어느 순간부터 자고 있던 건지도 몰랐다. 꿈결같이 누군가 연을 끌어안았다. 연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연보다 더 고약하게 술냄새를 풍기는 진이 보였다. 연보다도 더 취한 것 같은데 와중에 답답했는지 옷을 벗다 말았다. 연은 진의 겉옷을 벗기려 했다. 진이 웅얼댔다. 연이 진에게 씻고 자야지, 하는데도 진은 그냥 누운 채로 연을 끌어안았다. 연이 진 몸에 깔려있던 겉옷을 빼내 바닥에 던졌다. 옷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진이 웅얼거림을 멈췄다. 웅웅대던 냉장고도 조용해졌다. 진의 방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연이 자신의 심장소리가 들린다고 착각할 정도로.

 


 연은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고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진을 옆으로 밀어 떼어냈다. 진은 입을 오물거렸으나 감은 눈을 뜨지는 않았다. 진을 보며 연은 일그러진 거울을 봤을 때와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진에게 연은 6년간 만난 사람이고, 현재 생활의 일부이자, 다키마쿠라였다. 진은 연에게 헤어지자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진은 아직 연을 버리지 못한다.

 


 연은 진을 흔들어 깨웠다. 진이 제대로 눈도 못 뜨고 다시 연을 끌어안으려 했다. 연은 진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진이 조금 정신을 차렸다. 진은 자신을 보고 있는 연을 쳐다봤다.

 


 “왜 그래, 자기?”
 “진아.”
 “응?”
 “우리 헤어지자.”

 


 그 밤 연은 진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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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가디건

기타 / 2015. 6. 16. 11:09

공통주제 스터디 '가디건'으로 참여한 글입니다. 스터디 링크-> http://get-out-of-duruurung.tistory.com

 

 

 

 

 

 요즘 같은 환절기면 너는 오래된 디자인의 낡은 가디건을 입고 다녔다. 키가 제법 큰 너의 체형에 아주 안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닌 애매한 길이의 적갈색 가디건이었다. 가디건의 전체적인 디자인은 무난한 편이었으나, 학교 교복에나 쓸 것 같은 소재였고, 마찬가지로 애매한 크기의 단추는 옷 색보다도 어두운 갈색이었다. 넥라인 부분의 검은 줄 두 개가 한층 더 교복스러움을 강조하던 그 가디건은 네가 중학생일 때부터 입던 것이니, 어쩌면 교복스러운 게 당연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디건뿐만이 아니라, 너는 뭐 하나를 사면 닳고 닳을 때까지 그것만 썼고, 너무 낡아 원래 쓰던 걸 버리고 나서도, 그게 필수품이 아닌 이상 바로 새 것을 사는 경우가 드물었다. 어떤 사람은 네가 구두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넌 구두쇠는 아니었다. 물건에게 정을 준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너는 무엇에게든 정을 깊게 주는 타입이었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너는 네가 대하는 모든 것을 네 마음속에 차곡차곡, 소중하게 쌓아두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가디건이 10년 가까이 너의 유일한 가디건이라는 것도, 네가 중학생 때 키우던 고양이 동동이가 그 가디건을 좋아했다는 것도, 네가 그 가디건을 입고 소파에 앉으면 동동이가 너의 배 쪽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오래오래 시간을 보냈다는 것도, 네가 그 시간들을 정말 좋아했다는 것도, 그때 이미 성묘였던 동동이가 나이 들어 죽은 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네가 부러 동동이와 비슷한 고양이 사진을 찾아 들여다보긴 하지만 새 고양이를 입양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나는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알고 있으니까 더욱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네게 보풀이 잔뜩 일어나고 군데군데 올도 풀린 가디건은 좀 버리고 새 것을 사라고 했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주머니에 자잘하게 잔뜩 뭘 넣는 버릇을 가진 너에게, 그렇게 하면 주머니가 늘어나 보기 흉해진다는 말만 몇 번 했었다. 그러나 너는 그 말을 듣고도 얇은 주머니 안에 샤프펜슬에서부터 무거운 지갑까지 별 걸 다 넣고, 가끔은 그 주머니에 손도 집어넣고 돌아다녔다. 내가 볼 때 그 가디건 주머니는 덧댄 천이 너무 얇아 그냥 보기 좋으라고 달아놓은 장식용이었다. 하지만 넌 그냥 편한 대로 사용했고, 나는 가끔씩 네 주머니 속 물건들을 끄집어 내 나눠 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별 거 안 해도 구동 소리가 시끄러워 도서관에서는 쓸 수 없는 지경이었던 너의 사용 5년차 노트북에 대해서도, 거짓말 조금 보태 손가락이 보일 정도로 가죽이 얇아진 겨울용 가죽 장갑에 대해서도, 칠이 벗겨진 샤프펜슬이나, 뒤판의 시리얼 번호마저 흐릿해진 손목시계에 대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와 너의 첫사랑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언제까지 첫사랑을 못 잊어할 거냐고, 이제 다른 사람 만날 때도 되지 않았냐 할 때도, 나는 네게 네 주변에도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단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네 첫사랑이 사줬던 가죽장갑은 네가 첫사랑과 헤어지고 몇 년 뒤 어느 겨울, 나와 함께 갔던 전시회장에서 잃어버렸다. 네 아버지가 해외 출장길에 사 오셨던, 시리얼 번호마저 흐릿해진 제법 유명한 브랜드의 손목시계는 더 이상 교체할 부품이 생산되지 않아 네 방 서랍 속에 보관되었다. 어려운 시험 때마다 네게 행운을 불러와 줬다는 낡은 샤프펜슬은, 명절에 네 집에 놀러온 친척 동생들이 서랍을 뒤엎으며 놀다 간 이후로 볼 수 없었다고 했다. 너는 장갑을 끼는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녔고, 매일 차던 손목시계 대신 남들처럼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게 됐으며, 자격증 시험장에는 집에 굴러다니던 다른 샤프를 들고 들어갔다.

 

 


 초가을 폭우가 쏟아지던 날 저녁, 혼자 자취를 하는 내 방에 네가 무턱대고 고양이를 안고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 많이 놀랐다. 너는 더럽고 꼬질꼬질하며 물에 푹 젖어 추위에 덜덜 떠는 고양이를 너의 낡은 가디건으로 둘둘 말아 품에 안고 들어왔다. 고양이와 똑같이 비에 젖은 네게 수건을 건네자 너는 그것으로 고양이를 닦아주었다. 너는 현관 앞에 앉아 애웅 소리도 못 낼 것처럼 삐쩍 마른 고양이를 수건으로 문질렀고, 나는 그런 너의 옆에 앉아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네 머리를 새 수건으로 말려주었다. 너는 젖은 옷 대신 내 옷을 빌려 입고 부엌에서 고양이에게 줄 흰 죽을 끓였다. 너의 티셔츠와 청바지는 세제 푼 물에 잠겨 대야에 담겨있었고, 가디건은 수건과 함께 고양이 아래 깔려 있었다. 나는 좀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이는 고양이 앞에 엎드려 네 가디건을 빼내려 했지만, 고양이가 겁에 질린 듯 잔뜩 발톱을 세우는 바람에 억지로 빼다간 가디건이 상할 것 같아 그냥 물러났다. 고양이는 네가 가까이 오자 네게만 야옹야옹하며 반겼다. 너는 내게 고양이를 잠시만 맡아줄 수 있겠냐고 했다. 네가 데려가 키우지 그러냐고 하려다, 알겠다고만 했다. 너는 그날 가디건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주말에 우리는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병원에서는 검사를 해보더니 고양이가 좀 오래 굶어서 그렇지, 누군가 키우던 고양이인 것 같다며 추가 접종만 했다. 고양이 미용을 마치고, 고양이 사료와 간식과 화장실까지 사온 너는, 돌아와서 고양이 사진을 이리저리 찍더니 네가 가는 고양이 카페 몇 군데에 글을 올렸다. 이러저러해서 고양이를 임시 보호 중인데 이미 성묘고, 사람에게 호의적이고, 병원에 데려가 검사했더니 주인이 있는 고양이 같다는 말을 들었다며 원주인을 찾았다.


 글을 올리고 연락을 기다리며 너는 저녁마다 퇴근하고 내 자취방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사들고 왔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고양이를 돌보았음에도, 우리는 고양이를 그저 ‘고양이’라고 불렀다. 내 방에 고양이의 물건들이 알음알음 늘어가는 동안 너는 여기저기 좀 큰 사이트에도 주인 찾는 글을 올려봤으나, 한 달 동안 누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너는 결국 처음 글을 올린 카페에서 우리 고양이에게 큰 관심을 보이던 어떤 사람에게 고양이와 함께, 그 사이 사온 고양이 물건들을 보냈다. 네가 보낸 고양이 물건들 속에는 너의 낡은 가디건도 있었다. 예전에 키우던 동동이처럼, 고양이도 네 가디건을 좋아해서 잘 때는 꼭 그 가디건을 배에 깔고 잤다. 너는 그 해 가을을 가디건 없이 지냈다.


 주인을 좀 더 기다리지 못하고 고양이를 서둘러 보낸 건 내가 살던 자취방을 처분하고 외국으로 어학연수 겸 유학을 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새 주인이 될 가족이 내 자취방에 몇 번 와서 고양이와 친해지는 동안 나는 네 표정을 살폈다. 너는 너와 카페에서 연락을 주고받은, 우리보다 한두 살 어린 여대생이 집에서 키울 거라 부모님하고도 익숙해졌으면 싶어서 모시고 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중년 부부가 고양이 이름을 물어보자 임보(임시보호)라 이름을 따로 안 지었다고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었고, 고양이 애교가 많아 보내기 아쉽겠다는 말을 들으며 그러게요 하면서 또 웃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양이를 보내던 날, 너는 이제 방에서 고양이 눈치 없이 치킨을 먹을 수 있겠다며 치킨과 맥주를 사왔다. 맥주를 마시며 너는 조용히 내 짐 싸는 것을 도와주겠다 했고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다음날 너는 내 방에 다시 나타나 함께 짐을 쌌다.

 

 

 나는 며칠 뒤 엄마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며칠 뒤 출국했다. 나는 첫 몇 주는 여행으로, 그 다음 반년은 어학연수로 보내고, 그 후에는 학기가 시작해 대학원을 다녔다. 나는 거의 sns로만 한국 친구들과 연락을 했다. 너와는 가끔씩 고양이 데려가신 분들이 보내주셨다며 네가 내게 고양이 사진을 보내는 정도가 주고받는 연락의 전부였다.


 고양이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살도 포동포동 올랐고, 느긋해 보였고, 좀 이상한 말 같지만 행복해 보였다. 너는 그날 이후로 고양이를 직접 보러 간 적은 없다고 했다. 그저 카페 메신저 같은 걸로 그 여대생이 들려준 얘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고양이는 삐롱이라는 요상한 이름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너는 내게 말할 때 계속 고양이라고 불렀고, 나도 그랬다. 다른 고양이들이 그러듯이 우리 고양이도 잘나온 사진 중에는 자는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대부분 네 가디건이 같이 찍혀 있었다. 너도 나도 그것에 대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고양이가 턱을 괴고 자는 갈색 천이 네 가디건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외국에서 대학원까지 졸업 후 공부를 더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취직을 하는 게 좋을지, 공부를 하든 취직을 하든 한국에 돌아오는 게 좋을지 혹은 해외에 계속 있는 게 좋을지 고민이 많았다. 해외에 있는 초반에는 한국이 많이 그리웠는데 외국 학계에 아는 사람도 많이 생기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조금씩 늘어나면서, 못 견딜 정도는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고민이 더 컸다. 가끔씩 외로움이 심해지고 너무 힘이 드는 날이면, 하지만 무리해서 유학까지 보내준 엄마에게 투정부리기는 미안한 날이면, 나는 혼자 우리 고양이가 자는 사진을 봤다. 정확히는 네 가디건을 깔고 자는 고양이를 보았다. 그럼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동동이도 고양이도, 왜 네 가디건을 그렇게 좋아했는지/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결정을 못 내린 채로 졸업을 했고, 비자 문제로 귀국했다. 나는 친구들에게도, sns에도 한국에 돌아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누굴 만나든 예의상 주고받을 게 뻔한 “요새 뭐해?”라는 질문이 두려웠다. 너는 내가 한국에 온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너는 새로 옮긴 직장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어보였고, 그래서 나는 너에게 굳이 만나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아니다. 네가 바빠 보인다는 건 그냥 핑계였다. 같이 밥이나 먹자는 말에 내가 몇 번 말을 돌리자, 그 이후로 너는 억지로 약속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여름에 귀국했는데 벌써 가을도 반 이상 지나가고 있었다. 빨리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이미 분명했으나,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실제로 뭘 해야 하는지는 별개의 것이었다. 12월이 목전이었고, 나는 이미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늘 약속을 잡은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네가 평소처럼 보낸 고양이 사진에 네 가디건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보고 싶다고 해버렸다. 네가 여전한 얼굴로 네 자리에 있음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새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너는 새 가디건을 입고 있다. 나는 너를 발견하고도 너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그러나 결국 나를 발견한 네가 나에게 손을 흔들었고, 나는 이미 마실 것을 시킨 네 앞에 마주앉았다.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뭐든,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너는 가만히 있는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우리 진짜 오랜만이네. 요새 뭐하고 지내? 나는 들어온 지 1분도 안 된 카페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역시 오지 말 걸 그랬다. 그냥 지내. 너는 뭐해? 성의 없는 나의 대답에도 너는 너도 요새 별 거 안 한다며 웃었다. 그리고는 무슨 대화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뭐라도 들어간 것처럼 눈이 간질거렸다. 네가 입은 가디건은 푸른빛이 도는 회색이고, 올이 크고 촘촘하다. 중간중간 다른 색 실로 무늬가 박혀있어서 귀엽고, 길이가 길고 두툼해서 따뜻해 보이는 니트 가디건이다. 그리고 이 가디건은 보풀 일어난 곳도, 올 하나 나간 곳도 없이 깨끗하다.


 나는 연신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겼다.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 중인지도 전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주문한 커피를 받아와 한두 모금 마시다가, 참지 못하고 네게 툭 던지듯이 말했다. 가디건 새로 샀어? 너는 내 말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산 건 아니고... 선물 받았어. 예의상 짓는 웃음이 아닌, 정말로 수줍어서 배시시 웃는 너의 표정을 보며, 내 마음 속에서 뭔가가 쿵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 사라졌다. 유독 왼쪽 가슴이 뻐근한 이유는, 마음이 정말로 거기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심장은 왼쪽에 있다는 학습의 결과일까. 내가 나도 모르게 눈을 꾹 감은 사이, 네가 이어 말했다. 실은 나 사귀는 사람 생겼거든. 그 사람이 사줬어. 나는 커피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잘 어울린다. 잘 골랐네. 나는 너 가디건 다시는 안 입을 줄 알았는데.

 

 나는 아차 싶어서 마지막 말은 하지 않을 걸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너는 대수롭지 않게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예의상 네게 어떤 사람이냐 어디서 만났냐 언제 만났냐 따위를 물었고 너는 차근차근 그냥 회사원이고, 친구 공연 보러 갔다가 아는 사람들 틈에서 우연히 만났고, 만난 지는 일 년쯤 됐다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또 불쑥 말했다. 행복해 보인다, 너. 쑥스러워하면서도 조근조근 말하던 너는 순간 활짝 웃고는, 부끄러웠는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났다.


 네가 일어서자 가디건 끝이 허벅지 아래쯤으로 툭 떨어졌다. 가디건은 네 키와 몸매에 딱 맞는 예쁜 길이였다. 앉아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아래쪽의 주머니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부드럽게 접혔다. 나는 혼자 고개를 숙이고 쿡쿡 웃었다. 카페에 온 지 30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고 편하게 앉았다. 네 가디건 주머니는 자잘한 게 잔뜩 담겨 불룩하게 늘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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