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세진] 미래의 추억 -上
언젠가 진단 키워드? 주제로 나온 '미래의 추억'
봄이 가기 전에 다 쓰려고 했는데,, 일단 앞부분을 올려두면 뒤쪽도 쓰겠지 싶어서 올립니다
여기가 어딜까. 멍하게 답이 나오지 않을 자문을 해본다. 낯선 곳. 하지만 익숙한 느낌. 낯선데 익숙하다니 이상한 말이다. 와봤었나? 언제? 햇살이 따뜻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여기가 어디든 내가 지금 이런 곳에 있다는 게 가장 이상하다. 나는 내 방 내 침대에서 잠들었었는데. 일단 이곳은 야외고, 우리 동네도 아니고, 어... 내 방? 어떤 내 방? 내 방에 침대가 있었나? 아 광장에 사람이 많다. 벚꽃이 피었다. 벌써 아이스크림을 파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세진은 십몇 년 전의 나고야에 있었다. 그곳엔 십몇 년 전의 이경도 있었다. 세진은 혼란스럽고 배고픈 상태로, 반은 알아듣겠고 반은 모르겠는 일본어 사이를 무작정 걷다가 어린 이경과 부딪쳤다.
“아야! 죄송, 아니 스미마센. 어?”
세진은 이경을 알아봤다. 세진이 아는 서이경보다 약간 어려 보였고, 더 캐주얼한 옷을 입었고, 머리는 덜 정돈됐고, 표정에는 훨씬 불만이 가득했지만 분명 이경이었다. “대표님?”하며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세진을, 이경은 한번 흘겨보기만 하고 지나가려 했다. 세진이 이경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서이경! ......대표님 맞죠? 아 다행이다. 저 지금 여기가 어딘가 하고 엄청...”
세진의 안도 섞인 호들갑이 이어지는 동안 이경은 미간을 구기고 그냥 지나갈지 뭔가 대꾸를 할지 고민했다. 이번엔 또 어디의 누가 보낸 수작일까, 짐작 가는 곳은 많지만 이런 젊은- 게다가 한국말을 쓰는 여자를 보낼만한 곳은 짚이지가 않았다. 이경은 짜증에 짜증을 더하며 삐딱하게 세진을 돌아봤다.
“어디서 보냈어?”
“네?”
“어쩌다 걸린 심부름꾼 같은데, 어디서 보낸 건지만 말하고 돌아가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 근데 저 지금 너무 배고픈데...”
주머니엔 지갑도 없고 여긴 어딘지도 모르겠고, 세진이 계속 종알대며 다가왔다. 이경은 주춤대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경이 물러난 만큼 세진은 더 걸어왔다. 이경은 빨리 끝낼 심산으로 세진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세진은 맥없이 끌려 이경에게 붙잡혔다.
“아, 아야, 아파요! 아파요 대표님.”
이경은 세진이 자신을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렸다. 한국말을 어설프게 배운 사기꾼이거나 사람을 잘못 봤거나. 하지만 다른 사람과 헷갈렸다기에 세진은 이경의 이름을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다.
“피차 바쁠 텐데 빨리 끝내지. 어디서 보냈는지만 말해.”
“아무데서도 안 보냈어요!”
세진이 소리를 지른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 몇이 이경과 세진을 힐끔거렸다. 이경은 오늘 기분이 언짢은 채로 집을 나섰고, 평소보다 훨씬 참을성이 없었다. 이경이 세진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줬다. 세진이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대표님이 알려주셨으니까 알죠! 대표님 왜 그러세요?!”
“너 누구 밑에서 일해?”
“대표님이요!”
“당신 대표가 누군데?”
“서이경!”
“수작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대표님 진짜 왜 그러시냐구요! 저 세진이에요!”
실랑이가 길어지자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는 사람이 생겼다. 이경은 결국 세진을 던지듯이 놓아주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사람 잘못 본 거면 이렇게까지 했으니 알아서 도망갈 것이고, 원하는 게 있으면 다시 따라 붙을 것이었다. 또 따라오면 이번엔 으슥한 곳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경의 예상대로 세진은 아픈 팔을 문지르면서도 이경을 따라왔다. 반걸음 정도 뒤에서 이경의 눈치를 보며 걷던 세진이 다시 이경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용건만 말해. 계속 헛소리 할 거면 꺼지고.”
“저 진짜 모르세요?”
세진이 고개를 갸웃대며 이경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경은 반사적으로 세진을 쳐낼 뻔 했다가 멈칫하고 심호흡했다.
“내가 그쪽을 알아야하나?”
“네? 그야 당연히...”
“우리가 무슨 사인데?”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이경의 물음에 세진의 말문이 막혔다. 아 저 그러니까 저희가 무슨 사이냐면요... 우물대는 세진을 보던 이경에게 갑자기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오늘 이경이 짜증난 채로 집을 나선 이유는 아버지에게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경이 일한금융에서 맡고 있는 일은 수금이었다. 이경 혼자 맡은 일은 아니었으나 이경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했다. 그리고 혼자서도 여러 명의 몫을 해냈다. 그랬는데, 얼마 전 다른 구역 애들이랑 충돌이 좀 있었다. 따지자면 그건 이경이 맡은 업무는 아니었다. 그쪽에서 시비를 걸어와서 대응해준 것뿐이고 그것도 역시 ‘혼자서’ 잘 처리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 성엔 별로 안 찼던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 뜬금없이 사람을 붙여줄 테니 같이 일해보라는 얘기를 꺼냈다. 그건 꼭 경호원을 붙여주겠단 소리로 들려서 이경은 기분이 나빴다.
일한금융에 이런 직원도 있었던가. 이경은 세진을 찬찬히 뜯어봤다. 어쩌면 이 여자가 아버지가 붙여주겠다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경호원이라기엔 너무 비리비리하고, 방금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경보다도 약했다.
세진을 관찰하던 이경과 눈이 마주치자 세진이 헤헤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이경은 미간을 구겼다. 단지 미소일 뿐이라 해도,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세진은 온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있거나 이경에게 특히 잘 보이고 싶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직원은 죽었다 깨나도 안 쓸 것 같았는데. 심각한 얼굴의 이경의 눈치를 보던 세진은 갑자기 날짜를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에요?”
“뭐?”
“오늘 날짜요.”
“4월 9일.”
“헉, 내 생일이네. 아, 아니 그, 연도는 몇 년도에요?”
이경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아버지가 정말로 이런 직원을 돈 주고 쓰고 있다고? 그 서봉수가? 이경은 미심쩍은 티를 팍팍 냈지만 세진이 물은 것을 알려주긴 알려줬다. 날짜를 듣고 세진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좀 둘러보다 비로소 이경이 조금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았다.
“제가 대표...아니 서이경씨... 부하는 아직 아닌데 제가 미래에 부하가 될 예정이거든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뭐냐... 그... 우리가 친구... 비슷한 것도 될 예정이고...”
......내 회사에선 절대 이런 직원은 쓰지 말아야지. 엉망진창인 세진의 말을 들으며 이경이 생각했다. 한국어 발음은 유창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경은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아들었다. 몇 달 전 조이사님이 아버지에게 또래 친구 어쩌고 하던 대화를 주워들은 적 있다. 친구가 필요 하네 마네 그런 얘기는 김작가와 조이사가 심심하면 던지는 화두였고 서봉수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말도 그냥 흘려보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이 터지자마자 사람을 붙인 걸 보면 어쩌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친구 필요 없는데.”
“있어본 적은 있으시구요?”
이경이 세진을 노려봤다. 세진은 딴청을 피우며 필요해서 친구가 되는 게 친구냐고 꿍얼댔다. 언제 봤다고 능청스럽게 구는 세진 때문에 이경은 헛웃음이 났다.
“말만 많은 부하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고 이경은 휙 돌아서 가야할 길을 갔다. 돌아야할 곳은 많은데 세진 때문에 지체된 시간이 짧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는 이경 뒤를 세진이 도도도도 소리가 나게 따라왔다. 이경이 신경질적으로 휙 돌아보자 세진이 또 활짝 웃었다.
“말 많이 안 할 게요. 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조용히 있을 수 있어요.”
걸음 소리마저 시끄러운 주제에 말은 잘했다. 전혀, 아주 조금도 설득력 없는 말이었지만 이경은 세진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기로 했다.
“방해되면 바로 버리고 갈 줄 알아.”
“넵.”
아버지가 시킨 거라면 이 여자와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거니와, 이런 타입을 상대하는 건 성가셨다. 이것저것을 설명하고, 돌아가도록 설득하고, 아버지에게 전언을 전하게 만들 시간도 인내심도 없었다. 따돌리려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다 이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오늘 일을 빨리 마친 뒤 아버지와 담판 짓는 편이 손해가 적다는 게 이경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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