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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진단 키워드? 주제로 나온 '미래의 추억'

봄이 가기 전에 다 쓰려고 했는데,, 일단 앞부분을 올려두면 뒤쪽도 쓰겠지 싶어서 올립니다






 









 여기가 어딜까. 멍하게 답이 나오지 않을 자문을 해본다. 낯선 곳. 하지만 익숙한 느낌. 낯선데 익숙하다니 이상한 말이다. 와봤었나? 언제? 햇살이 따뜻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다. 여기가 어디든 내가 지금 이런 곳에 있다는 게 가장 이상하다. 나는 내 방 내 침대에서 잠들었었는데. 일단 이곳은 야외고, 우리 동네도 아니고, 어... 내 방? 어떤 내 방? 내 방에 침대가 있었나? 아 광장에 사람이 많다. 벚꽃이 피었다. 벌써 아이스크림을 파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왜 왔더라?





 세진은 십몇 년 전의 나고야에 있었다. 그곳엔 십몇 년 전의 이경도 있었다. 세진은 혼란스럽고 배고픈 상태로, 반은 알아듣겠고 반은 모르겠는 일본어 사이를 무작정 걷다가 어린 이경과 부딪쳤다.



 “아야! 죄송, 아니 스미마센. 어?”



 세진은 이경을 알아봤다. 세진이 아는 서이경보다 약간 어려 보였고, 더 캐주얼한 옷을 입었고, 머리는 덜 정돈됐고, 표정에는 훨씬 불만이 가득했지만 분명 이경이었다. “대표님?”하며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세진을, 이경은 한번 흘겨보기만 하고 지나가려 했다. 세진이 이경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서이경! ......대표님 맞죠? 아 다행이다. 저 지금 여기가 어딘가 하고 엄청...”



 세진의 안도 섞인 호들갑이 이어지는 동안 이경은 미간을 구기고 그냥 지나갈지 뭔가 대꾸를 할지 고민했다. 이번엔 또 어디의 누가 보낸 수작일까, 짐작 가는 곳은 많지만 이런 젊은- 게다가 한국말을 쓰는 여자를 보낼만한 곳은 짚이지가 않았다. 이경은 짜증에 짜증을 더하며 삐딱하게 세진을 돌아봤다.



 “어디서 보냈어?”


 “네?”


 “어쩌다 걸린 심부름꾼 같은데, 어디서 보낸 건지만 말하고 돌아가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대표님. 근데 저 지금 너무 배고픈데...”



 주머니엔 지갑도 없고 여긴 어딘지도 모르겠고, 세진이 계속 종알대며 다가왔다. 이경은 주춤대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경이 물러난 만큼 세진은 더 걸어왔다. 이경은 빨리 끝낼 심산으로 세진의 팔을 등 뒤로 꺾었다. 세진은 맥없이 끌려 이경에게 붙잡혔다.



 “아, 아야, 아파요! 아파요 대표님.”



 이경은 세진이 자신을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거슬렸다. 한국말을 어설프게 배운 사기꾼이거나 사람을 잘못 봤거나. 하지만 다른 사람과 헷갈렸다기에 세진은 이경의 이름을 너무 정확히 알고 있었다.



 “피차 바쁠 텐데 빨리 끝내지. 어디서 보냈는지만 말해.”


 “아무데서도 안 보냈어요!”



 세진이 소리를 지른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 몇이 이경과 세진을 힐끔거렸다. 이경은 오늘 기분이 언짢은 채로 집을 나섰고, 평소보다 훨씬 참을성이 없었다. 이경이 세진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줬다. 세진이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대표님이 알려주셨으니까 알죠! 대표님 왜 그러세요?!”


 “너 누구 밑에서 일해?”


 “대표님이요!”


 “당신 대표가 누군데?”


 “서이경!”


 “수작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대표님 진짜 왜 그러시냐구요! 저 세진이에요!”



 실랑이가 길어지자 지나가다 걸음을 멈추는 사람이 생겼다. 이경은 결국 세진을 던지듯이 놓아주고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사람 잘못 본 거면 이렇게까지 했으니 알아서 도망갈 것이고, 원하는 게 있으면 다시 따라 붙을 것이었다. 또 따라오면 이번엔 으슥한 곳에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이경의 예상대로 세진은 아픈 팔을 문지르면서도 이경을 따라왔다. 반걸음 정도 뒤에서 이경의 눈치를 보며 걷던 세진이 다시 이경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용건만 말해. 계속 헛소리 할 거면 꺼지고.”


 “저 진짜 모르세요?”



 세진이 고개를 갸웃대며 이경의 얼굴 앞에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경은 반사적으로 세진을 쳐낼 뻔 했다가 멈칫하고 심호흡했다.



 “내가 그쪽을 알아야하나?”


 “네? 그야 당연히...”


 “우리가 무슨 사인데?”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쳐다보는 이경의 물음에 세진의 말문이 막혔다. 아 저 그러니까 저희가 무슨 사이냐면요... 우물대는 세진을 보던 이경에게 갑자기 다른 가능성이 떠올랐다.




 오늘 이경이 짜증난 채로 집을 나선 이유는 아버지에게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경이 일한금융에서 맡고 있는 일은 수금이었다. 이경 혼자 맡은 일은 아니었으나 이경은 혼자 움직이는 게 편했다. 그리고 혼자서도 여러 명의 몫을 해냈다. 그랬는데, 얼마 전 다른 구역 애들이랑 충돌이 좀 있었다. 따지자면 그건 이경이 맡은 업무는 아니었다. 그쪽에서 시비를 걸어와서 대응해준 것뿐이고 그것도 역시 ‘혼자서’ 잘 처리했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 성엔 별로 안 찼던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 뜬금없이 사람을 붙여줄 테니 같이 일해보라는 얘기를 꺼냈다. 그건 꼭 경호원을 붙여주겠단 소리로 들려서 이경은 기분이 나빴다.




 일한금융에 이런 직원도 있었던가. 이경은 세진을 찬찬히 뜯어봤다. 어쩌면 이 여자가 아버지가 붙여주겠다던 사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경호원이라기엔 너무 비리비리하고, 방금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경보다도 약했다.



 세진을 관찰하던 이경과 눈이 마주치자 세진이 헤헤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이경은 미간을 구겼다. 단지 미소일 뿐이라 해도,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세진은 온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있거나 이경에게 특히 잘 보이고 싶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이런 직원은 죽었다 깨나도 안 쓸 것 같았는데. 심각한 얼굴의 이경의 눈치를 보던 세진은 갑자기 날짜를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에요?”


 “뭐?”


 “오늘 날짜요.”


 “4월 9일.”


 “헉, 내 생일이네. 아, 아니 그, 연도는 몇 년도에요?”



 이경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아버지가 정말로 이런 직원을 돈 주고 쓰고 있다고? 그 서봉수가? 이경은 미심쩍은 티를 팍팍 냈지만 세진이 물은 것을 알려주긴 알려줬다. 날짜를 듣고 세진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좀 둘러보다 비로소 이경이 조금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았다.



 “제가 대표...아니 서이경씨... 부하는 아직 아닌데 제가 미래에 부하가 될 예정이거든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뭐냐... 그... 우리가 친구... 비슷한 것도 될 예정이고...”



 ......내 회사에선 절대 이런 직원은 쓰지 말아야지. 엉망진창인 세진의 말을 들으며 이경이 생각했다. 한국어 발음은 유창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이경은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아들었다. 몇 달 전 조이사님이 아버지에게 또래 친구 어쩌고 하던 대화를 주워들은 적 있다. 친구가 필요 하네 마네 그런 얘기는 김작가와 조이사가 심심하면 던지는 화두였고 서봉수는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말도 그냥 흘려보낼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이 터지자마자 사람을 붙인 걸 보면 어쩌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친구 필요 없는데.”


 “있어본 적은 있으시구요?”



 이경이 세진을 노려봤다. 세진은 딴청을 피우며 필요해서 친구가 되는 게 친구냐고 꿍얼댔다. 언제 봤다고 능청스럽게 구는 세진 때문에 이경은 헛웃음이 났다.



 “말만 많은 부하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고 이경은 휙 돌아서 가야할 길을 갔다. 돌아야할 곳은 많은데 세진 때문에 지체된 시간이 짧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는 이경 뒤를 세진이 도도도도 소리가 나게 따라왔다. 이경이 신경질적으로 휙 돌아보자 세진이 또 활짝 웃었다.



 “말 많이 안 할 게요. 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조용히 있을 수 있어요.”



 걸음 소리마저 시끄러운 주제에 말은 잘했다. 전혀, 아주 조금도 설득력 없는 말이었지만 이경은 세진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기로 했다.



 “방해되면 바로 버리고 갈 줄 알아.”


 “넵.”



 아버지가 시킨 거라면 이 여자와 여기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거니와, 이런 타입을 상대하는 건 성가셨다. 이것저것을 설명하고, 돌아가도록 설득하고, 아버지에게 전언을 전하게 만들 시간도 인내심도 없었다. 따돌리려면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것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다 이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오늘 일을 빨리 마친 뒤 아버지와 담판 짓는 편이 손해가 적다는 게 이경의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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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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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2-1

불야성 / 2017. 2. 19. 01:47





 “이세진씨가 정말 올까요?”



 이경의 말이 끝났는데도 안 나가고 미적거린다 싶더니, 조이사가 질문인 척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경이 앉은 채로 올려다보기만 하고 대꾸하지 않자 조이사가 말을 이었다.



 “이세진씨만 기다렸다가 만약에 오지 않으면 실행 불가능해지는 계획입니다. 꼭 세진씨가 아니더라도 이번 일을 할 사람은 얼마든지,”


 “올 거예요, 그 아이.”



 이경이 조이사의 말을 잘랐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조이사는 이경의 계획이 불확실한 것에 기반을 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경은 도박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쓸 데 없는 걱정 마시고, 지시한 대로 처리하세요.”



 조이사가 나간 뒤 이경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다 했다. 세진은 그 중 무엇 때문에든 이경을 만나러 올 것이었다.






 이경은 타인의 욕망에 기민했다. 믿을 사람은 몇 없겠지만 이경은 타인의 아픔과 감정의 변화에도 예민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알아야 이용할 수 있으니까. 이경의 가장 큰 무기는 그것이었다. 무섭게 정확한 판단력도, 빠른 결단력도, 막대한 자금도, 이경에겐 전부 보조도구쯤이고, 이경이 생각하는 자신의 가장 큰 밑천은 타인의 욕심이었다. 욕심도 결국은 사람의 감정이다.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면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기도 쉬웠다. 소중한 사람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애틋한 마음이나,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 혹은 그냥 쪽팔리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객기, 좀 더 편하게 살고 싶다는 일견 당연한 소망, 제 잘못이 분명한데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는 나약한 마음까지, 모든 것이 이경의 밑천이 됐다.



 자신이 가이드임을 알게 된 날 이경은, 마음속으로 자신이 파악해야할 것 리스트에 센티넬의 안정에 대한 욕구를 추가했다. 이경이 판단한 결과로는 그건 즉각적으로 충족되어야할 욕구에 속했다. 호흡보다는 덜 긴박하지만 허기보다는 훨씬 더 급박해 보였다. 갈증과 비슷하게 사람을 애걸하게 만들지만 갈증처럼 사람 기운을 다 빼놓는 대신 오래 지나면 점점 더 포악해지게 만든다는 점이 달랐다. 가이드가 다가가지도 못할 정도가 되기 전에 안정시키는 게 최선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문제는 그 경계가 어딘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경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센티넬에게 가이딩을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는 센티넬들은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며 그들이 애원할 때까지 내버려둔다고 했지만, 이경의 눈에 그건 비효율적인 악취미였다. 도구는 항상 최상의 상태로 관리해야 한다. 소소한 가이딩에는 힘도 시간도 돈도 안 드는데 굳이 그걸 아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이경의 ‘소소한’ 가이딩에 키스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쓸 만해 보였다. 회장 전체를 스캔하고 있던 김작가님이 아니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자기 능력을 잘 컨트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김작가님이 알려준 두 번째 얘기가 아니었다면 아마 접근은 안 했겠지만.




 몇 년 전부터 아이파이낸셜 쪽에서 금전적이거나 가정사 문제로 훈련기관 입학 시기를 놓친 센티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이경은 그게 쭉 신경 쓰였었다. 다른 기업들도 물론 센티넬 장학금 재단을 운영한다. 기업에 필요한 센티넬을 육성하기 위해서든,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든. 하지만 아이파이낸셜은 이미 센티넬 관련 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에 더해서 굳이 (통상적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은 센티넬들을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는 단순 금융회사에서 센티넬 재단을 두 개나 굴린다는 것부터 이경의 눈엔 다른 내막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심지어 특정 연령대만을, 자기소개서와 면접이라는 명확하지 않은 심사기준으로 선발한다고? 언제나 주시하고 있었지만 가시화 되는 부분이 없었다. 이경의 앞에 그 아이파이낸셜의 장학생이라는 이세진이 나타난 건 그런 때였다.




 조금 취기가 돈 얼굴로 새빨간 오프숄더 드레스 위에 남성용 큰 재킷을 걸치고 새하얀 벽에 기대 선 세진은, 방금까진 어떻게 모를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오늘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도 이경의 호기심을 끌었다.



 이경이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봐서인지 세진도 금방 이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놀라는 품이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보여 걱정했는데, 세진에겐 파티에 잠입한 목적이 더 우선이었던 것 같다. 혹은 다른 원하는 게 있었거나. 그건 이경이 세진의 어깨에 손을 댄 순간 분명해졌다.



 이경이 닿자마자 세진은 눈에 띄게 긴장이 풀어지고 얌전해졌다. 평소에 학교에서 케어를 잘 못 받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키스를 한 건 그래서였다. 이경은 원래 타인의 욕망에 민감하니까, 세진이 원하는 걸 줘야 세진과 가까워지고 계속 이용할 수 있어지니까. 이경이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세진이 이경을 찾아오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움이 될 만한 정보만 빼내면 되니까 그 친구에게 피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세진씨한테도요.”


 “...”


 “그래도 정 마음에 걸린다면,”


 “따불.”


 “예?”


 “따불로 주세요, 이백.”


 “......이세진씨. 5분 일하는 건데 200만원은 너무...”


 “아니 어쨌든 위험한 일은 다 제가 하잖아요. 재수 없으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구.”



 이경은 응접실에서 조이사와 흥정을 하고 있는 세진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세진이 능청스럽게 머리를 흔들 때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사이로 목덜미가 드러났다가 곧 감춰졌다. 어제까진 세진이 오지 않을까봐 걱정하던 조이사님 이마에는 허락이 안 떨어졌어도 다른 사람을 찾아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쓰여 있었다. 깊어지는 조이사의 주름을 보고도 이경은 지금 상황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경이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기 쉽다.



 “삼백으로 하죠.”



 이경의 목소리에 조이사와 세진이 동시에 이경을 돌아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돈이면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되겠어요?”


 “저야 땡큐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일할 땐 수지타산을 생각해야한다고 하셨으면서.”



 그 말이 어지간히도 거슬렸던 건지, 한방 먹였단 표정으로 저가 했던 말을 되돌려주는 세진을 이경은 일부러 스치듯 지나쳤다. 옷깃만 살짝 닿을락 말락 했을 뿐인데 세진의 몸이 자신을 의식하는 게 느껴졌다. 이경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챈 척 세진의 대각선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 계산은 내가 하고, 이세진씨는 맡은 일만 해주면 돼요. 어차피 거절할 입장은 못 될 텐데.”



 마지막 말에 세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경이 세진을 위해 깔아둔 길은 여러 겹이었다. 세진이 정말 올지 묻던 조이사님의 우려에 반드시 온다고 확언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이경은 세진에게 매력적일 돈이란 패도 쥐고 있었지만, 언제라도 세진을 학교에-혹은 센티넬 관리국에 신고할 수 있다는 패도 쥐고 있었다.



 “조이사님, 다른 일정 하러 가보세요.”



 이경은 조이사를 내보냈다. 둘만 남고도 한동안 불퉁한 얼굴로 서있던 세진이 마지못해 앉으며 말했다.



 “가이드들은 원래 다 그렇게 센티넬 괴롭히길 좋아해요?”



 세진의 말에 이경의 눈썹이 들썩였다. 어떤 가이드들처럼 ‘비효율적인 악취미’ 같은 건 없는데. 그런 취향도 아니고.



 “신고할 생각도 없으면서 일부러 협박하시잖아요.”


 “협박?”


 “저를 관리국에 넘기실 거였음 굳이 명함을 줄 필요가 없었죠. 오히려 제가 여기 드나들면 더 곤란해질 텐데. 신고하지 않는 게 더 이득이니까 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신 거예요, 맞죠?”



 세진의 말에 이경은 얼굴에 웃음이 번지게 둘지, 감출지 고민했다. 세진은 이경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쓸 만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용케 찾아왔네요. 원칙까지 어기고 찾아온 거 보면 급한 사정이라도 있나본데.”


 “뒷조사 다 해보신 거 아니에요? 저 같은 사람은 매일매일이 급해요. 대표님은 그런 거 모르시겠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처음 만난 날 이후 이경은 김작가님에게 세진의 모든 것을 알아보라고 지시했었다. 세진은 이모네 집 전세비가 올라 목돈이 필요했지만 졸업심사도 얼마 안 남아서 시급이 낮은-센티넬 능력과 관계없고 세진이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아르바이트에는 시간 할애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경이 세진의 비밀을 쥐고 세진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은근하게 알려주지 않았어도, 혹은 세진이 그 언질을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페이가 두둑한 의뢰를 받으러 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돈이 간절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세진이 틀린 지점은 이경이 갈망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한 부분이었다. 이경 역시 세진만큼이나 매순간이 급했다. 단 한 순간도 멈춰 있을 수 없었다. 그건 절대량을 얼마나 가졌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도 세진씨랑 다르지 않아요. 마음은 절실한데, 필요한 만큼 가지진 못했으니까.”



 이경이 세진을 바라봤다. 세진은 아까부터 이경을 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 두 쌍이 서로를 비췄다. 이경은 세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얇고 길어 상대적으로 마디가 도드라져 보이는 곧은 손이었다. 세진의 시선이 이경의 검은 눈에서 새하얀 손으로 떨어졌다.



 “우리 서로, 원하는 걸 손에 넣어볼까요?”



 이경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세진을 기다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세진의 손이 떨렸다. 악수를 하려던 세진의 손끝이 이경의 손끝에 스치며 허공에서 접혔다. 세진이 다시 이경과 눈을 맞췄다.



 “대신 부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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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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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OST 중 배수정씨의 '나를 위해'라는 노래를 듣다가 그 노래가 20화 이후의 서이경 얘기 같아서 쓰게 된 글인데 쓰고 보니 노래랑은 별 관련이 없게 됐네요... 근데 제목 못 짓는 병에 걸려서 제목은 그냥 나를 위해에요 노래 좋아요 들어보세요()












-



 꽤나 사치스럽게 보관했던 1엔짜리 동전을 던지고 이경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미련, 자책, 후회, 그런 건 하지 않는다. 한국은 떠나왔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생각은 아니었다. 돈이 곧 신이고, 숫자만이 믿을 수 있는 지표라는 생각도 변함없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할 것이란 것도 여전했다. 어떻게 보면 이경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이경이 변했다고 했다.



 바람이 불자 방 안쪽에서 풍경이 울렸다. 사는 사람이 조용하니 이런 거라도 가끔 소리를 내는 게 좋지 않겠냐며 걸어두고 간 거였다. 확실히 더 좋기는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걸 준 사람이 생각난다는 점이.








 충분해 보이지 않았지만 충분히 쉬었다고 말하는 조이사님과 한국에서 일본 일처리도 전부 맡아준 김작가님이 삐진 탁이를 달래 일본으로 들어온 날, 마당까지 나와 인사를 나누던 이경은 집으로 들어서는 네 번째 사람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당혹감보단 반가움이 더 드러났길 바랐지만 그런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진이에게 어떻게 보였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경의 우려와는 달리 아무도 이경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았다. 조이사님이 가장 먼저 아무 말 없이 짐을 들고 방으로 향했고, 김작가님은 지낼 방을 알려주겠다며 탁이를 끌고 들어갔다.



 “이세진의 왕국 건설이 이렇게까지 오래 안 걸릴 줄은 몰랐는데. 아님 벌써 포기한 건가?”


 “일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그럼?”


 “칭찬해드리려고요.”



 꽤나 당돌한 말을 하는 그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다. 이경의 눈썹이 들썩였지만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다음 말을 이어가는 세진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다들 그러던데요, 대표님이 일본 가시더니 기대했던 것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맞는 말이었다. 일본에 온 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보름 간 이경이 한 건 아버지 봉수가 하던 일 중 아직 굴릴만한 것과 아닌 것을 분류하고, 가끔 필요한 곳에 연락을 넣고, 그밖에는 없었다. 서봉수의 자리는 채우고 있었지만 서이경의 계획은 하나도 시작하지 않았다. 일한금융 일을 적당적당히 처리하고 있다는 것만도 별로 서이경답지는 않았다. 그게 어째서 칭찬할 일이 되는 지 의구심이 떠오르는 이경의 얼굴을 보며 세진이 이미 웃는 얼굴로 웃음을 참았다.



 “대신 끼니도 대충 안 때우고 잠도 잘 자고 주말에는 쉬시고, 그러신 거 같아서.”


 “그래서?”


 “잘 하고 계시다구요.”


 “내가 밥 잘 먹고 잘 자는데 왜 세진이 니가 좋아해?”


 “네? 그게...”



 부러 싸늘하게 말하는 투에 웃음을 지우고 당황하는 세진이를 보며 이경은 비로소 편하게 웃었다. 자신을 놀렸는데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정말 우리 대표님 맞냐고 재차 묻기에 시끄럽게 할 거면 가라고 했더니, 지불은 다음에 할 테니 하루만 먹여주고 재워달라고 뻔뻔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대로 보낼 생각도 물론 없었지만, 돌려보냈으면 삼박사일은 김작가님 아쉬운 소리를 들었겠지만, 이경은 괜히 져주는 척 세진이를 집으로 들였다. 어떤 싸움에서는 굳이 이길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다섯이 둘러앉아 떠들고, 먹고, 가끔 건배를 했다. 누군가를 해고하는 일 빼곤 언젠가의 파티와 비슷한 저녁을 보내고, 각자의 방으로 뿔뿔이 흩어질 시간이 왔다. 김작가님이 나서기 전에 이경이 먼저 세진의 방 안내를 자처했다.



 “대부분 요를 깔고 자긴 하는데, 침대가 있는 손님방이 딱 하나 있어. 넌 침대가 편하지?”



 큰 짐 없이 손가방 하나만 덜렁 든 세진이 비틀거리며 빠르게 걷는 이경의 뒤를 따랐다. 와인을 꽤나 마시고도 흐트러짐 없던 이경의 걸음이 어떤 방 앞에서 멈췄다. 이경은 미닫이문에 손을 얹고 생각할 게 남았다는 듯 머뭇거렸다. 그런데 세진아.



 “꼭, 침대에서 자야 되니?”



 세진이 취하긴 했어도 이경의 말뜻을 파악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목울대가 마른 침을 한 번 삼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경이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저 아무데서나 잘 자요.”



 세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경이 아까부터 잡고 있던 방문을 밀어 열었다. 침대는 없고 한쪽 벽에 두툼한 이불만 깔려있는, 별다른 가구도 많지 않은 단출한 방이었다. 세진이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계속 거기 서있을 거야?”



 이경은 이미 웃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세진이 이경의 방에 어울릴 것 같다며 가져온 게 저 풍경이었다. 



 세진이는 계속 갖가지 핑계를 대며 이경을 찾아왔다. 세진이 자고 갈 때마다 이경의 방에 예쁜 것, 예쁘지만 쓸모없는 것, 쓸모는 없지만 마침 장식장이 허전했는데 잘된 것, 조금은 쓸모가 있는 것, 아무리 봐주려 해도 정신 사나워서 한구석에 밀어둔 것들이 하나둘 쌓여갔다.





 일본과 한국 시장을 중계하는 코디네이터 일을 한다며, 주근거지는 오사카면서 나고야까지 이렇게 자주 놀러 와도 되는 건지. 세진이가 자신에게 쓰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을 줄인 게 아니라 세진이 응당 가져야할 휴식시간을 줄인 것이란 것을 알기 때문에 이경은 세진이 걱정됐다. 일은 세진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었다. 다만 한국에서의 자신이 자꾸 지금의 세진이에게 겹쳐 보였다. 위로 올라가는 것만 생각하던 날들이었다. 지금도 언제나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같다. 이경은 멈춘 채로는 절대 살 수 없으니까. 단지 자신을 깎아가면서 나아갈 길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 막 배운 참이었다. 그걸 알게 해준 당사자가 속 썩이고 있다는 게 지금 상황의 모순이었지만.



 세진이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아도 무리하는 거겠지. 이경과 한 약속 때문이든, 사업 특성상 현시점에서는 들어오는 일들을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든, 세진은 아마 지금 하는 게 무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이경도 그랬으니까.





 언제나 쉬엄쉬엄 하라는 말을 듣는 입장이었는데, 지금은 그 말을 하고 싶은 걸 참느라 꽤나 애를 먹고 있다고 하면 세진이가 들어주려나. 새벽 어슴푸레한 빛으로 봐도 피곤해 보이는 동그란 머리통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이경은 저가 이렇게 잔걱정 많은 성격임을 처음 알았다.



 “대표님?”



 가만히 쓸어보기만 한다는 게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잠에서 얕게 깬 세진이가 꾸물거리며 이경의 손을 끌어가더니 손바닥에 코를 박았다.



 “더 자.”


 “왜 깨셨어요? 어디 아프세요? 안 좋은 꿈 꾸셨어요?”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다른 사람 걱정부터 하는 세진이의 말에 이경의 마음이 저릿하면서도 간지러워졌다. 이경은 어디쯤 있는지 모를 제 마음 대신 세진이의 뺨이며 눈가를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너 때문에 걱정돼서 잠을 못자겠어. 네? 너 이렇게 한가하게 바람이나 쐬러 다니고, 내가 살아있을 때 니가 건설한 왕국 보여줄 수 있겠니? ...... 농담이야, 웃어.



 서이경식 서늘한 농담에 세진이 멈칫거리지 않을 수 있게 될 쯤엔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또 웬일이야.”


 “저 오늘은 진짜 그냥 놀러온 거 아니에요. 이 근처에 사업차, 일이 있어서.”


 “그럼 숙소도 알아보고 왔겠네.”


 “...”


 “여기가 공짜 숙박업소인 줄 알아?”


 “공짜...로는 안 묵잖아요.”


 “담보로도 못 쓸 잡동사니는 사양이야. 거래는 상대가 탐낼만한 걸 제시해야 성립된다는 거, 몇 번이나 가르쳐줬던 거 같은데.”



 이전처럼 겁먹진 않았지만 곤란하다는 듯 꾸물거리는 세진이를 보며 이경은 져주는 척 다른 조건을 내비쳤다.



 “나는 이세진의 오늘을 갖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왔으면 바쁘겠네.”


 “아니요! 저, 일, 방금 다 끝내고 왔어요. 이제 내일까진 오프에요.”


 “정말이야?”


 “네.”



 겨우 점심시간 지났는데 벌써 무슨 일을 끝냈다는 건지, 일이 있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면 아예 사업얘기 꺼내기도 전에 퇴짜를 맞았어야 가능한 시간이었다. 세진이 점점 뻔뻔해지고 있었다. 다른 날이었다면 무슨 일이었는지부터 다시 채근했겠지만, 오늘은 솔직하게 밝아지는 얼굴로 충분했다.



 “나한테는 다행이네. 따라와.”






 이경은 세진이에게 편한 신발부터 신기고 시내로 데리고 나갔다. 가끔 단 둘이 가던 레스토랑 같은 곳이 아니라 이경이 일한금융에서 수금할 때 돌아다니던 상점가였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그때와 또 다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이경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이경이 한국에 가기 전까지 주기적으로 돌던 곳이니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상인들의 인사에 일일이 반응하는 건 세진의 몫이었다.



 “대표님 혹시 옛날에 아이돌이나... 그런 비슷한 거라도 하셨어요?”



 그리고 세진이의 뜬금없는 소리에 실소하는 건 이경의 몫이었다.



 “어쩐지 여기 사람들이 다 대표님 알아보는 거 같아서요. 기분 탓이 아닌 거죠?”


 “허리 펴고 고개 들어. 여기서도 사업하고 싶은 거면.”


 “그렇긴 한데요, 이렇게 대표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세진이 걸음을 멈췄다. 이경도 바로 걸음을 멈췄다. 돌아본 세진의 표정은 진지했다. 인맥으로 장사하는 중이면서도 가장 가까운 인맥은 활용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이경은 알고 있었지만, 그럴 거면 제 집에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면 안 됐다. 좋은 이미지로든 나쁜 이미지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세진은 이미 서이경과 엮여있을 것이었다.



 “이게 도움이 되란 법은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적이 아주 많거든.”



 반박하고 싶은데 맞는 말이라 반박을 못하는 세진이의 얼굴은 꽤나 볼만했다. 하지만 이경은 웃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경에게 지금 이 상황은 조금 억울했다. 그냥 자신이 오랜 시간 다닌 곳들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말을 할수록 더 단단히 오해만 하게 만들었다. 이경은 어떻게 세진이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짧지 않은 평생 남이 오해하면 그 오해를 이용하며 살아온 이경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였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길 한복판에 서서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정면만 응시하던 이경과 세진을 움직이게 만든 건 예쁜 옷을 맞춰 입은 한 무리의 유치원생들이었다. 쉴 새 없이 조잘거리며, 가끔 앞을 보고 걸으라는 선생님의 외침을 들으며, 열을 맞춰 걸어가는 아이들을 피해 이경과 세진은 자연스럽게 길 한편에 나란히 섰다.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사원에서 시내까지 행진을 하는 아이들이 가끔 있어. 올해는 토요일이라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이경의 설명에도 세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경은 잠시 이세진처럼 해보기로 했다. 이경이 가진 가장 큰 무기가 욕망이었다면, 세진의 가장 큰 무기는 진심이었다. 그 둘은 아주 다르고,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저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건 내가 서이경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금을 하러 다녔었기 때문이야. 여기는, 내 일터였고.”



 나란히 서있을 땐 상대방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상대가 이쪽에게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하면 더더욱 표정을 알기 힘들었다. 반응은 없지만 세진이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이경은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고 싶었거든. 근데 내가 한 게 일밖에 없더라고. 그래서 여기라도 같이 와볼까 싶었던 건데 실수였네.”



 와글거리던 애들은 한참 전에 다 지나갔지만 이경과 세진은 그대로 서있었다. 서이경의 투박한 진심은 이미 꺼내졌고 그걸 받아들지 말지는 세진의 선택이었다. 이경은 말을 하고 나서도 이게 과연 저울에 올려놓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다른 제안-과거에 같은 사람에게 건넸던 보증금이나 뜻밖의 횡재 같은 류-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세진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과거, 추억, 옛날 얘기, 그런 돈 안 되는 걸 저한테 알려주고 싶으셨다구요? 여기에서?”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한 건 방금 세진이 말하기 전까지 자신이 하려던 일이 그런 일인 줄 이경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진심이세요?”


 “응.”



 세진만큼이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이경이 수긍했다. 세진은 어쩌면 구원투수가 아니라 포수였는지도 몰랐다. 이경 스스로도 못 믿을 투구까지 놓치지 않고 정확히 받아주는.







 풀어진 분위기로 이경과 세진은 상점가를 벗어났다. 오해가 풀렸어도 계속 인사를 받으며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아이들의 행렬을 거스르며 둘은 사원까지 천천히 걸었다. 작은 천을 따라 벚꽃이 피고 있었다. 꽃이 예쁘다고 활짝 웃는 세진을 보며 이경은 네가 더 예쁘다는 말이 떠오른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날 밤 이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12시가 지나고, 키스하던 세진이를 굳이 멈추게 하고,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선물을 건넨 후였다. 비싼 것이든 구하기 어려운 것이든 뭐든 해주고 싶었지만 참고 참아 준비한 건 머리끈이었다. 어느새 길이가 제법 길어 묶고 다닐 때가 더 많다는 단순한 이유로 준 것이었는데, 세진은 다행히, 어쩌면 당연히 좋아했다.



 “대표님이 이걸로 제 머리 묶어주세요.”



 세진이 떨며 내밀었던 팔찌보다도 더 별 거 아닌 선물인데 좋아해주는 게 고마워서, 이경은 세진의 어리광 같은 요구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세진이는 얌전히 이불을 두르고 제게 등을 보이고 앉아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손이 떨려서 이경은 몇 번인가 주먹을 쥐었다 펴야했다. 제 뒤에서 이경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줄은 모르는 세진은 신나서 오늘 정말 좋았다고 날씨도 좋고 재밌었고 애기들도 귀여웠고 꽃도 예쁘고 선물도 고맙다고 그런 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안 그래도 떨리는 손인데 세진이 종알대며 고개를 까딱이는 통에 머리 정리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이경은 흔들거리는 세진의 얼굴을 잡고 키스해버렸다.



 “오늘 내가 본 것 중에 니가 제일 예쁘고 귀여웠으니까 머리 묶을 땐 가만히 좀 있어.”



 세진은 바로 얌전해졌다. 남의 머리는 묶어본 적 없어 어설피 마무리하고 세진을 바로 앉히니 세진은 귀끝까지 시뻘게진 채로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왜 이래?”


 “오늘 제 생일이라 데이트한 거 맞죠?”



 알면서 묻는 심보는 뭘까. 이경은 이마저도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다른 사람들 말처럼 자신이 변하긴 했나보다고 생각했다.



 “맞으면?”


 “제 생일인데 제가 대표님한테 제 시간 드린 게 억울해서요. 제가 받아야하는 거 아니에요?”


 “갖고 싶은 거 있어?”


 “대표님 시간-”


 “그거 말고.”


 “왜요?”



 안 그래도 없는 시간 뺏는 것 같다는 얘긴 삼켰다.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내 시간보단 덜 비싼 걸로 골라봐.”


 “허, 일본도 통째로 살 수 있겠네요.”


 “수학에는 정말 소질 없구나.”



 실없는 소리를 하다 세진과 이경은 다시 입을 맞췄다. 세진이 요구하는 서이경의 시간을 줄 수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이세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서이경의 시간은 이미 계속 이세진에게 지출되는 중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었어?”



 이경의 동그란 어깨 위에서 손장난을 치던 세진이 고개를 들어 이경을 봤다. 자기가 둘러댄 말도 기억 못하는 것 같아서 이경은 표정을 조금 굳혔다.



 “오늘 일 때문에 왔다며. 거짓말이었니?”


 “그게... 여긴 아니고 교토에 잠깐 갔다가 교토까지 온 김에 대표님도 보고 싶고 제 생일이기도 하고...”



 말끝을 흐리며 파고드는 세진에게 순순히 품을 내주며 이경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사카와 나고야 사이에 있긴 하지만 교토도 절대 가깝진 않은데 거리감이 왜 이 모양인지. 수학 뿐 아니라 지리에도 소질이 없어 보였다.



 “화나셨어요?”



 하지만 이경도 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꼭 온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생일을 의식한 건 세진이 혼자가 아니었다. 반쯤 풀린 머리끈을 아예 빼서 옆으로 치워두고 이경은 세진의 머리칼에 손을 넣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교토엔 왜 갔는데?”


 “마리가 이제 진짜 교토 장인이 만든 거울 줄 때도 되지 않았냐고 성화라. 저 저번에 큰 건 하나 했다는 거, 마리 도움 좀 받았었거든요.”



 제 도움은 거절하고 마리 손은 아무렇지도 않게 빌리는 거 같아서 이경의 눈이 절로 치켜떠졌지만 몇 번 작게 말다툼을 한 뒤로-세진은 그게 작은 다툼이었다고 기억하지 않았다-이경은 세진과 마리의 우정을 일부분 인정하기로 했다. 조금 더 긴밀한 인맥이 있을 수 있겠지 나하고 건우처럼. 별로 적절한 비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관계를 맺어본 적 없는 이경에겐 그렇게 생각하는 게 최선이었다. 세진이와 마리의 커넥션을 인정하더라도, 돈 한 푼 안 될 유치한 질투 전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경이 스스로 정말로 변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어떤 감정은 아껴 쓰지 않게 됐다는 것이었다.



 “손마리 것만 샀어?”


 “대표님한테는 더 좋은 거울이 있잖아요.”



 효용가치 없는 감정을 던져 넣어도 언제나 정확하게 받아줄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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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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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1-3

불야성 / 2017. 2. 1. 11:28






 세진에게만 들리는 것 같던 온갖 이상한 소리들이 사라지고, 골목에는 조금씩 느려지는 탁의 숨소리만 들렸다. 세진은 서있기조차 힘들었지만 크게 숨을 몰아쉴 수도, 주저앉을 수도, 가이딩 중인 두 사람에게서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정지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대로 서서 지켜보기만 했다.





 이세진의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1분이 지나고 탁이 대표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대표는 그제야 탁에게서 메모리카드를 건네받았다.



 “수고했어.”



 탁의 만족스러운 얼굴은 10초 만에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서대표가 메모리카드를 받자마자 몸을 돌려 세진에게 자기 명함과 함께 그것을 건네줬기 때문이었다. 세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명함과 메모리카드를 받아들었다. 명함에는 에스건설 서이경 대표라고 쓰여 있었다.



 “지금, 이게...”


 “다음부턴 파티 주최자 이름이랑 얼굴 정도는 확인하고 와요.”



 오늘 있었던 경매와 그에 딸린 가벼운 연회는 에스건설에서 주최한 것이었다. 세진도 알고는 있었다. 주최와 전혀 상관없는 의뢰라서 자세히는 안 알아봤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하면서 돌아다녔을 당사자를 속이려고 했었다니, 세진은 아까의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져서 손에 쥔 명함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서이경. 이름 세 글자를 읽었을 뿐인데 세진의 속이 다시 들끓으려했다. 세진은 억지로 이 감정은 피곤하고 힘들고 아픈 탓이라고 스스로에게 둘러댔다. 그만 돌아가서 쉬고 싶은데 이경은 할 말이 더 있는 눈치였다. 세진은 지금 당장 공간이동으로 튀어도 무례하다는 소리 안 들을 만큼 다쳤는데, 그런 상태로도 이경의 다음 말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게 짜증이 일었다.



 “좋은 옷이 망가져서 어쩌나. 오늘 보수로 옷값은 되겠어요? 일을 할 때는 수지타산을 생각해야죠.”


 “걱정해줘서 고맙긴 한데, 제 의뢰는 제가 알아서 해요. 돈 받는 만큼 제 책임이 어디까진지도 제가 알아서 하구요.”


 “하지만 능력은 정말 잘 쓰던데요. 탐색도, 은신도.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 여기까지 도망친 것도 대단하고.”


 “처음부터 저를 보고 있었어요?”



 세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경은 대답 없이 탁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탁아,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대표님.”


 “그럼 세진씨 좀 데려다 줘.”


 “네? 얘를요? ...네 알겠습니다.”


 “우리 직원이 그쪽 싸움에 휘말려서 조금 다치긴 했지만 세진씨 혼자 가는 것보다 안전할 거예요.”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엄청 생색내시네요. 그냥 신경 꺼주셨음 좋겠는데.”



 세진은 울컥했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거나, 미행했다거나, 그런 것보다, 저가 몇 배는 더 다쳤는데 탁이 조금 다친 걸 굳이 짚는 이경에게 화가 났다. 하, 자기 센티넬이 다쳤다 이건가? 험악해진 세진의 표정을 보고 이경이 피식 웃었다. 이경의 웃음에 세진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탁아, 임무 수정해야겠다. 이 사람들부터 김작가님한테 보여드려. 조작이 조금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 알아서 해주실 거야. 끝나면 작가님이 말하는 곳에 두고 와.”


 “네, 대표님.”



 탁은 이경이 또 명령을 바꾸기 전에 기절한 남자 센티넬과 여자 센티넬을 들쳐 매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세진이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을 때 들은 바람소리는 탁이 오는 소리가 맞았던 모양이었다. 이경은 탁이 멀어지자 세진에게 한걸음 다가왔다. 세진은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가, 반걸음 다시 돌아왔다. 온 몸이 삐그덕대며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말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경 때문에 심란한 것에 비하면 참을만했다.




 세진은 이제 이 소란스러운 마음이 뭔지 알았다. 이경에게 닿고 싶은 거였다. 연회장에서부터 그랬다. 이경을 처음 봤을 때부터 세진은 이경에게 가까워지고 싶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가이딩을 원하는 건 센티넬의 본능이었으니까.



 연회장에서처럼 세진은 이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경도 세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봤다. 이경에 대한 이-성욕에 가까운-욕구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서 그게 지금 세진의 상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몸 상태는 최악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이딩을 원하는 센티넬의 욕구는 최고치였다. 세진은 더는 이성적으로 버틸 수 없을 거 같아 이경의 눈에서 시선을 떨어트렸다.




 이게 만약, 정말 만약에 그 ‘공명’이 맞다면, 공명에 관한 전설 중에 다른 건 몰라도 서로 가까이만 있어도 안정되는 관계라는 부분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오히려 세진은 지금 코앞의 이경을 만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세진의 시선이 자꾸 이경의 목과 입술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런 세진을 보면서 슬며시 웃는가 싶더니, 이경은 금세 세진에게 붙어 한 팔로 세진의 등과 허리를 받쳤다.



 “이, 이봐요?”


 “지금 원하는 게 이거 아니에요?”



 세진은 ‘이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세진의 신경은 온통 이경의 손이 닿은 등에 가있었다. 이경은 세진에게로 몸을 숙였다. 



 “눈 감아요.”



 이상하게 이경의 말에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세진이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추측해보기도 전에 세진의 눈은 벌써 감겨있었다.




 이경은 세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짝 맞댔다. 건조하게 닿기만 했다가 멀어지려는 입술에 세진이 잘 안 움직이는 팔을 급하게 둘러 이경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경은 아파서 끙끙대며 제 뒤통수를 감싸면서도 눈은 계속 감고 있는 세진을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자세만 조금 바꿔 다시 세진에게 입맞췄다. 이경은 처음부터 가볍게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마음 급한 세진이 몇 번씩 이경의 입술을 깨물고 앞니에 부딪쳤지만 이경은 세진을 밀어내지 않았다. 가끔씩 입술을 뗐을 때 보이는 이경의 눈은 고요했다. 세진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았다. 통상적 의미의 가이딩은 이미 끝났다. 세진의 정신적 능력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좋은 컨디션으로 회복된 상태다. 금 간 갈비뼈나 유리조각에 긁힌 뺨 같은 물리적 상처는 치료가 더 필요했지만 당장 못 견딜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세진을 안달 나게 하는 건 다른 종류의 충동이었다. 안정과 회복 같은 가이딩에 대한 열망인 척 숨어있던 욕망.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경은 세진이 숨을 고르려 잠시 떨어질 때마다 세진의 눈을 보며 안색을 살폈다. 다정하면서도 아무 열기 없이 차분한 눈빛에 세진은 결국 이경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어 어깨를 짚고 몸을 떨어트렸다.




 뒤늦게 탁이란 남자가 생각났다. 세진은 자기 센티넬을 먼저 보내고 오늘 처음 본 센티넬에게 키스한 이경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경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이드들이 능력에 따라 센티넬들을 여럿 부린다는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가이딩 능력을 말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재력이나 권력 같은 것도 포함한다. 센티넬 고유 능력을 쓰면 정신과 신체가 불안정해지는 센티넬과 달리 가이드는 가이드 고유 능력을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았다. 가이딩에 거의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스킨십-방금의 키스 같은 것-때문에 지치는 일은 있어도, 가이딩이 가이드를 지치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이딩 자체는 가이드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경에게도 이 ‘가이딩’은 아무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걸로 충분해요?”



 센티넬의 상태가 얼마나 안정됐는지도 가이드는 직접적으로 알 수 없었다. 세진이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다시 키스해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은 넘칠 정도로 충분했다. 키스는 부족했지만.


 ......키스로는 부족했지만.



 “원하는 게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경의 애매한 말에 세진이 뜨끔했다. 방금 키스만으로도 터질 것처럼 빨개진 세진의 얼굴에 한 번 더 열이 올랐다. 이경은 세진이 키스에 열중하느라 떨어트린 명함과 메모리카드를 발견하고 그것들을 주워들었다. 다쳐서 바닥에서 뒹굴면서도 절대 포기 못한다고 버텼으면서 키스 때문에는 너무 쉽게 내동댕이친 것 같아서, 세진은 민망함에 잠시 눈을 굴렸다. 이경은 메모리카드를 좀 살펴보다가 먼지를 털고 세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잠깐 다시 닿는 것만으로도 세진은 목 언저리가 뜨거워졌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긴 숨을 내뱉었다. 세진이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이경은 깨끗한 명함을 새로 꺼내서 세진에게 건넸다.



 “다음 의뢰에 관심 있으면 연락해요. 보수는 두둑하니까.”



 다음 의뢰라는 말에 세진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가이드에게 아무 영향이 없다고 해도 이유 없이 가이딩을 해준 건 아니었다는 생각과, 의뢰를 맡으면 다시 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무슨 일인데요?”


 “아까 그 사람들하고 관계있는 일.”


 “아쉽네요. 한번 의뢰받은 업무는 연장하지 않는 게 제 원칙이라.”


 “그래요 그럼.”


 “저기요!”



 너무 단번에 돌아서는 이경을 불러 세운 건 물론 충동적이었다.



 “어, 저기, 최원재 찾을 때 도와준 건 고마웠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세진씨두요.”



 이경이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곧 자동차에 시동 거는 소리와 엔진이 구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세진은 엉망이 된 바닥을 뒤져 반파된 카메라와 수선 불가능해 보이는 겉옷을 집어 들었다.





 이경의 가이딩 덕분에 학교에 몰래 복귀하는 건 수월했다. 붕붕 날아다니는 몸만큼이나 기분도 계속 붕 떠있었다. 붕 뜬 게 아니라 깊이도 모를 물속에 가라앉는 중인 것 같기도 했다.





 세진은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친구 마리에게 잡혀 상처를 살피고 약을 발랐다. 만난 김에 카메라와 옷의 복구도 부탁하는 세진에게 마리는 눈을 흘겼다.



 “야, 야, 내 능력이 무슨 되감기 버튼인 줄 알아? 이걸 어떻게 되돌려.”



 자기가 새로 사주는 게 낫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마리는 한번 시도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 대가로 야식을 사주며 어디서 또 굴러먹다 왔냐고 잔소리를 잔뜩 들었지만, 세진에겐 그 시간도 다른 날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너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랬다. 우리 최종심사도 얼마 안 남았어. 몸 좀 아껴."


 "응. 그래야지."


 "하긴 뭐 넌 장학금도 받는데, 심사가 문제겠니. 내가 문제지."


 "너도 잘 하면서 꼭 그러더라."


 "너, 나 가고 또 딴 짓 말고 바로 자. 알겠지?"


 "그래. 너두 딴 데로 새지 말고."


 "헐... 방금 무단 외출하고 오신 이세진씨가 할 말은 아니죠."


 "얼른 들어가."





 계속 걱정하는 마리를 겨우 자기 방으로 돌려보내고 혼자가 된 세진은 침대에 누워 이경의 명함을 만지작대다 깨달았다. 자신은 서이경에게 이름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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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1-2

불야성 / 2017. 1. 30. 21:31





 경매장에 잠입하기는 연회장에 들어오는 것보다 쉬웠다. 최원재와 최원재의 섹스 상대와 최원재의 센티넬, 딱 세 사람만 속이면 됐다. 평소보다 훨씬 컨디션이 좋아진 세진은 단 한 걸음도 망설이지 않고 경매장에 들어섰다. 최원재는 밖에 세워둔 센티넬을 아주 신뢰하는 것 같았다. 자기 집 안방처럼 아직도 옷을 안 챙겨 입고 히득거리고 있는 걸 보면.




 그 덕에 세진은 대상을 늦게 발견하고도 의뢰를 성공할 수 있게 됐다. 세진은 장비만 있다면 눈으로 본 것을 사진처럼 전사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의뢰인은 사진 같은 것 말고 그냥 사진을 원했다. 본인도 전사능력이 있는 센티넬이면서, 그런 건 못 믿겠다고 했다. 왜 못 믿겠다는 건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사실 굳이 의뢰인을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세진에게 중요한 건 의뢰인의 요구사항이 무엇인가였다.


 의뢰는 그냥 흔한 내용이었다. 최원재가 자신 외에-그리고 법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인 외에- 다른 여자를 만나는지 확인해 달라. 그리고 다른 여자가 있다면 증거 사진을 찍어 와라. 그래서 의뢰와 관련해 세진이 전송받은 사진은 두 장이었다. 최원재와 최원재 부인 사진. 최원재는 확인 됐고. 여자 쪽을 살펴봤다. 부인이 아니었다. 세진은 이것도 우습다고 생각했다. 본인도 내연녀면서 다른 내연녀가 있는지 알아봐달라는 의뢰라니? 하지만 이것도 굳이 세진이 파고들 문제는 아니었다.





 세진은 펄럭거리는 남성용 자켓을 얌전히 입었다. 거추장스럽지 않게 소매를 접고 단추까지 잠그고, 최대한 기척을 지우고 다가가 사진이 잘 나올 각도를 살폈다. 지금 컨디션으론 두 사람 코앞에서 셔터를 눌러도 모를 정도로 은신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찍으려는 이유는 이 사진을 나중에 최원재의 법적 반려자에게 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쪽에 판다면 아마도 법원에 증거물로 쓰일 수도 있고, 법정에 오른다면 누가 봐도 센티넬이 능력을 써서 찍은 사진은 좀 곤란했다. 안 그래도 윤리니 뭐니, 시키는 일만 할 뿐인데 화살은 다 맞고 있는 ‘센티넬에게’ 곤란하다. 사진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충분히 욕먹을만한가 싶긴 하지만 사실 세진에게는 그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세진은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창 옆에서 몸을 낮추고 탁자 너머로 두 남녀를 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보통 사람이면 맞은편 건물에서 대포렌즈로 줌을 당겨 찍겠지만 세진에겐 그런 좋은 렌즈와 좋은 카메라는 없었다. 대신 인간 줌인렌즈 이세진이 왔다. 세진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카메라를 살짝 기울여서 맞은편 건물에서 찍은 것처럼 연출하고 셔터를 누른 순간 최원재에게 살랑거리던 여자가 표정을 바꾸고 세진을 똑바로 쳐다봤다. 렌즈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세진은 미처 방어도 못하고 벽까지 튕겨져 날아갔다. 



 “컥.”



 벽에 처박힌 건 세진이지만 목이 졸려 끓는 소리를 낸 건 최원재의 여자 쪽이었다. 세진은 얼얼한 등과 뒤통수를 체크할 시간도 없이 여자에게 반격부터하고 창을 깨고 뛰어내렸다. 이 여자도 센티넬일 줄은 몰랐다. 최원재가 또 다른 센티넬을 만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창문으로 떨어지는 세진을 잡으려 허공을 훑는 힘이 느껴졌지만 세진의 힘과 중력의 합산이 더 강했다. 최원재가 경매장 바깥의 남자 센티넬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좋게 착지해보려 했지만 대처할 수 있을 만큼 낙하시간이 길지 않아서 세진은 몸을 둥글게 말고 다시 한 번 등을 희생했다.



 “으윽...”



 세진이 깬 건 분명 유리조각이 흩어지지 않는 안전유리였는데, 날카롭게 조각난 창문 유리들이 세진을 뒤따라 빠르게 떨어졌다. 뒤이어 덩치 큰 남자도 떨어졌다. 세진은 가장 위험한 유리조각 몇 개만 겨우 막을 수 있었다. 잘 깎인 유리조각을 따라 내려온 남자에게 되돌려 날려주고 세진은 벌떡 일어나 달렸다.


 아파 죽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치였다. 남자를 따돌리거나 때려눕히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은지 계산을 마친 세진은 일부러 남자가 아슬아슬하게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만 도망치다가 공사장 주변의 막다른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세진이 골목에 들어서고 얼마 안 돼 곧 남자 센티넬도 따라 들어왔다. 남자는 막힌 골목 담을 뛰어 넘으려는 세진을 보고 급하게 돌진했다. 남자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던 세진에게 직선으로 달려드는 커다란 덩치를 피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세진이 속임수로 좀 더 멀어보이게 만든 벽에 온 힘을 다해 부딪친 남자가 눈의 초점을 잃고 비틀거렸다. 잠시였지만 세진은 그걸 놓치지 않고 다리와 뒤통수를 한 번씩 더 가격해 완전히 기절하게 만들었다.



 “허우... 아저씨 미안.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니셔야죠.”



 세진은 손을 두어번 털고 얼른 재킷을 벗어 살폈다. 이거 정말 비싼 건데. 두 번이나 크게 부딪힌 등보다 엉망이 된 재킷을 보는 속이 더 쓰렸다. 최대한 멀쩡해 보이게 수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세진은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확인했다. 스트랩을 목에 걸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카메라 화면에 1번 메모리카드가 꽉 찼다며 빨간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연사모드로 눌려있는 셔터를 한 번 더 누르고 2번 메모리카드로 설정을 바꾸자 깜박이던 빛이 꺼졌다.



 최원재가 다른 사람들을 더 보내기 전에 도망가기 위해 골목 밖으로 발을 딛...으려던 세진은 섬뜩한 감각에 뒤로 펄쩍 뛰었다. 뛰어오른 세진을 무언가가 묵직하게 내리쳤다. 공중에서 그대로 충격을 받은 세진은 이번엔 머리만 겨우 감싸고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옷과 카메라와 구두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고 세진의 뼈 몇 조각과 정신 약간도 제자리에서 이탈했다. 세진의 머리 바로 위쪽으로 옆 공사장에서 끌어온 것 같은 쇠발판이 쩡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세진을 공격한 건 최원재와 함께 있던 여자였다. 여자는 몸을 말고 컥컥대는 세진을 지나쳐 바닥에 널브러진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너한테 별 악감정은 없는데 이건 좀 곤란해서.”


 “끄으...”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워하며 겨우 눈만 뜬 세진의 귀에 카메라 셔터소리가 계속 들렸다. 어떻게 들으면 우르르 달려오는 발자국 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면 어쩌면 그냥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여자가 메모리카드를 찾으려 이미 반쯤 박살난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세진은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너무 구형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오래 걸릴 뿐이지 여자는 금방 메모리카드를 빼내 가루로 만들 것이고, (아마도 최원재가 시켰을) 그 임무를 완수한 뒤엔 세진 자신까지 가루내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세진은 갈등하고 있었다. 집중하면 한 번 정도는 순간이동 할 수 있었다. 다 망가진 카메라와 비싼 옷과 구두 따위를 포기하면 도망갈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세진이 상처와 고민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이 여자는 혼잣말로 짜증을 내다가 작게 탄성했다. 곧이어 메모리칩 커버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진은 이제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셔터소린지 발자국소린지 바람소린지가 멈췄다. 그리고



 “나도 그쪽한테 별 감정은 없는데, 이게 망가지면 내가 좀 곤란해져서.”



 사진이 든 메모리카드는 방금 멈춘 바람소리의 정체인 것 같은 남자의 손으로 옮겨가 있었다.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주 잠시 서로를 탐색하는 것 같던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맞붙어서 꽝꽝거렸다. 정확히는, 여자 쪽은 힘으로 내려치거나 올려쳐서 안 그래도 먼지구덩이인 이곳에 환상적인 먼지 눈을 내리게 했고, 남자는 아주 빠르게 여자의 공격을 피하며 뭔가 조금씩 반격도 하는 것 같았다. 세진은 지금 그 싸움에 휘말리면 정말로 온 몸이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안 들어 그냥 가만히 누워 있었다. 이마를 타고 내려오는 피와 피에 엉긴 먼지 때문에 눈이 따가웠다.



 아직 메모리카드가 저기 있었다. 이렇게 만신창이가 됐는데 의뢰마저 실패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어느 쪽이든 지친 상태로 결판이 나겠지. 세진의 계산은 그랬다. 그때까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론 회복이 돼야 할 텐데. 







 결과는 스피드의 승리였다. 아무리 세도 벽에 바닥에 그렇게 박아대는데 힘이 남아날 리 없었다. 피가 맺힌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쓰러진 여자는, 가이드가 여기까지 와서 가이딩해주지 않는 이상 아침까진 뻗어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세진의 예상대로 재빠른 남자도 충분히 지쳐 보였다. 세진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아, 그쪽한테도 미안하지만 이거 가져오란 게 우리 대표님 명령이거든.”



 세진은 대꾸 없이 온 힘을 짜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으로 남자의 턱을 날렸다. 갑작스레 들어간 펀치에 남자가 뒤로 넘어지긴 했지만 세진의 생각만큼 공격이 강하게 들어가진 않았다. 그래도 메모리카드를 놓치게 할 정도는 됐다. 세진이 메모리카드를 주워들려는 순간 남자도 이를 악물고 슬라이딩하려 했다.



 “탁아.”



 그 목소리에 남자도, 세진도 행동을 멈추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 세진에게 최원재 행방을 알려준 그 여자였다. 연회장에서도 대표님이라고 불리더니, 이 남자한테 사진을 가져오라고 한 대표님도 이 사람이었던 거다.



 “대표님 오지 마세요. 제가 해결할 수,”


 “괜찮아.”



 대표라는 사람은 높은 힐을 신고도 흔들림 없이 난장판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세진은 붙박인 듯 서서 여자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또 다시 이상한 소리들이 와글거리며 세진을 꼼짝 못하게 했다. 탁은 그 틈에 얼른 메모리카드를 집어 들었다. 세진이 힘겹게 메모리카드가 놓여있던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탁이 세진을 보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뿌듯한 목소리로 자신의 대표님에게 메모리카드를 내밀었다.



 “대표님 여기, 임무 완수했습니다.”


 “왜 다치고 그래.”


 “전투 타입이 그런 건 제가 어쩔 수가 없어요.”



 대표는 탁이 내미는 물건을 받는 대신 질책 같은 걱정을 하며 곧장 탁의 목 뒤로 팔을 뻗었다. 대표가 목덜미를 손바닥 전체로 감싸자 탁은 변명을 멈추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대표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고르는 탁을 보며 세진은 시끄럽게 자신을 채우던 소리들이 끓어오르고, 동시에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여자는 센티넬이 아니라 가이드였고 세진이 여자에게 느낀 건 ‘공명’이라고 부르는 거였다. 기본적으로 모든 센티넬들은 모든 가이드와 공명할 수 있다. 공명이라는 건 가이드가 센티넬을 진정시키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말이지만, 대부분은 공명을 그냥 ‘가이딩’이라고 불렀다. 특별히 ‘공명’이라고 따로 부르는 가이딩은 거의 구전설화처럼 여겨졌다. 세상에는 아주 약간의 접촉만으로도 센티넬을 안정시켜준다는, 그 센티넬 개인에게만 꼭 맞는 가이드가 있다고 한다. 서로에게 완벽하게 맞는 센티넬과 가이드 페어의 공명은 말 그대로 완벽해서, 가이드가 가까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센티넬을 안정시켜줄 뿐만 아니라 더 강해지게 만들어 준다고도 한다.


 세진은 완전한 가이딩을 믿지 않았다. 꿈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존재하더라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나만을 위한 단 한 명.



 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다른 센티넬과 함께. 세진은 두 사람을 방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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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공모 1-1

불야성 / 2017. 1. 30. 13:44

기본 센티넬버스 세계관에서 약간 변형시킨 부분이 있어요 읽다 보시면 아실 수 있을 거에요!













-



 이미 한차례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 인사들의 건배사와 서로간의 인사치레를 주고받은 연회장만큼 어수선한 곳이 또 있을까. 누군가는 이미 자리를 떴고, 누군가는 뒤늦게 헐레벌떡 얼굴을 비추러 나타났으며, 사용인들은 고용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쉬지 않고 회장 안팎을 뛰어다녔다.



 세진이 나타난 건 그런 때였다.



 조금 취기가 돈 얼굴로, 손바닥만 한-문자 그대로 손바닥만 한-가방조차 없이, 새빨간 오프숄더 드레스 위에 남성용 큰 재킷을 걸치고 회장을 향해 걸어오는 세진을 막아서는 경비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전부 허리춤에 ‘센티넬 감지기’를 달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세진에게 써보려 하지 않았다. 개중 가장 잔걱정 많은 요원만이 다가와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경비원의 호의를 가벼운 눈웃음으로 거절한 세진은, 그러나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걸음걸이부터 달라졌다.




 세진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 걸치고 온 남성용 재킷 안주머니에서 얇은 화면을 꺼내 대상의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무진그룹의 이사이자 미개척토지개발기획실 ‘현장정리’팀을 맡고 있는 가이드가 오늘 세진의 일감이었다. 인터넷으로 기사 사진 같은 걸 몇 장 더 찾아보긴 했었지만 면식 없는 사람을 이 복잡한 곳에서 찾아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었다. 워낙 술 좋아하고 과시하고 으스대며 노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라니 벌써 자리를 뜨진 않았을 거였지만, 세진은 일을 확실히 하기 위해 ‘능력’을 써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대부분의 행사장과 마찬가지로 이 연회장에도 센티넬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지만, 가이드가 데려온 센티넬들은 출입할 수 있다. 그러니까 능력이 좀 발현된 것만으로 경보기가 울리진 않을 터였다. 세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가이드로 추정되는 사람이건 센티넬로 추정되는 사람이건, 혹은 그냥 일반인이건, 다들 이미 조금씩 취해 있거나 각자 이곳에 온 목적-대부분은 사업과 인맥-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다. 거나하게 취해 몸도 못 가누고 능력을 흘리고 있는 센티넬을 경비원들이 조용히 데리고 나가는 것도 보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어수선했다.





 세진은 웨이터로부터 샴페인 잔 하나를 건네받고 천천히 회장 안을 거닐며 서있기 적당한 곳을 찾았다. 기둥 뒤로 다섯 발짝 떨어진, 빈 접시가 몇 개 쌓인 테이블 옆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얇은 실처럼 의식을 흩어놓고 세진은 벽에 몸을 기댔다. 일단 이 홀에는 없다. 발코니와 화장실까지 천천히 탐색망을 넓혀봤으나 역시 없었다. 경매가 끝난 경매장에서는 대범한 연인들이 연인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복도 구석에는 아까 끌려 나간 센티넬이 경비 한 무리의 추파를 받고 있었다. 세진은 신물이 난단 표정으로 그쪽에서는 신경을 거뒀다. 다른 층에 있을 가능성도 살펴봤지만 다른 층으로 통하는 문은 연회장 출입구밖엔 없었다. 타겟이 이미 연회장을 떠난 거라면 탐색이 더 막막해진다.



 “아 방 잡은 거면 답 안 나오는데.”



 아예 이 호텔을 벗어난 거면 더 답 안 나오고. 세진은 짜증이 나서 들고 있던 샴페인을 한입에 털어버렸다. 희미하지만 광범위하게 능력을 쓰고 있던 탓인지 도수 낮은 샴페인에도 취기가 확 돌았다. 연회장에 펼쳐놓은 탐색망을 서서히 거두며 세진은 그대로 벽에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다. 흩어져있던 의식이 돌아오면서 세진은 자신에게 붙은 시선 하나를 눈치 챘다. 아무리 탐색에 신경을 쏟더라도 경계를 늦추면 안 되는 거였는데, 뻔뻔하게 센티넬이 아닌 척 해야 할지, 취해서 의식이 멋대로 흩어졌다고 변명해야할지, 상대방이 왜 쳐다보는 건지 모르니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도 결정할 수 없었다. 세진은 그냥 취해서 꼴값 떠는 할아범이면 차라리 해결하기 쉽겠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대수롭지 않게 주변을 둘러보는 척 시선의 주인을 확인하려 했던 세진의 계획은 세진이 눈을 뜨자마자 박살났다. 너무 단번에 세진의 시야에 들어온, 세진을 ‘관찰’하고 있던 여자에게서 세진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진의 모든 세포가 제각기 의지를 가진 것처럼 주장해댔다.



 저기. 맞아. 내가. 있어. 나. 방해하면. 반드시. 저 사람이야, 놓치지 않아. 나는. 찾았어. 당장. 내가. 아니 내가. 다 죽일 거야. 저거야. 전부 다. 나도. 절대로. 원하는 거. 가질 거야. 내가. 나만. 내거야.



 감정인지 생각인지 모를 것들이 순식간에 세진을 가득 채웠다. 여전히 시선은 이어진 채로, 파도에 밀리는 것처럼 세진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 쪽으로 걸어가다가 앞에 있던 테이블에 부딪쳤다.




 빠르게 움직이던 중은 아니어서 테이블은 가볍게 흔들렸을 뿐이지만 그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잔과 접시, 포크 따위가 만들어낸 소음은 생각보다 컸다. 많은 사람들이 돌아볼 정도는 아니었으나 하필 그 때 테이블 위를 치우던 웨이터들이 달려와 세진에게 괜찮으신지, 모셔다 드릴 필요가 있는지 따위를 질문할 정도는 됐다. 세진이 그냥 조금 취한 것 같다며 괜찮다고 하는데도 웨이터들은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릇을 여기에 둬서 죄송하다는 둥(원래 그러려고 외진 곳에 놓아둔 테이블 같았지만), 잠시 쉬실 수 있게 위층 방으로 모시겠다는 둥, (아무것도 튀지 않았는데도) 옷 세탁에 30분이면 된다는 둥 호들갑을 떨었다. 아마도 세진이 걸친 남성용 재킷과 목걸이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좋아보였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비싼 것들이었다. 재계 거물들의 파티장에 잠입하기에 비싼 장신구와 옷만큼 완벽한 위장 수단은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게 오히려 세진을 곤란하게 만들었지만.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배상하겠다고 거의 울먹이며 말하는 직원을 달래다시피 떼어놓는 중에 세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보았다. 웨이터들보다 저쪽이 배는 위험했다. 저 여자는 자신에게 뭔가 했다. 세진을 똑바로 보며 걸어오는 이 순간에도 전혀 센티넬처럼은 안 보이는데, 하지만 분명 뭔가를 했다. 자신처럼 정신계통으로 발달한 센티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진이 아는 센티넬 중 누구도 이런 기술을 쓴 적이 없다. 온 몸을 뭔가가 지배하는데 그게 너무 편하게 느껴져서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그랬다.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잠식하는 그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아주 생소한 감각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비슷한... 이것과 조금 비슷한 뭔가가 있었는데.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했다. 웨이터고 의뢰고 다 팽개치고 그냥 도망가고 싶은 것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저 여자가 나에게 뭘 한 건지, 방금 그것으로 저쪽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이대로 학교로 돌아가도 되는 건지, 세진이 알아내야할 건 끝도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세진은 점점 더 생각하기가 힘들어졌다. 세진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고 웨이터들의 표정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이건 정말 곤란했다. 둘 중 하나라도 사라져줬음 좋겠다. 하나 정돈 그냥 조용히 없애버릴 수... 세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낼 뻔 한 진심을 막으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제스쳐가 웨이터들을 더 경악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제 여자는 세진의 바로 뒤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아까처럼 세포단위로 아우성치는 소리에 잠겨 외부 소리는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세진이 들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당장이라도 여자의 목을 조르고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은 놀랍게도 순식간에 소거되었다. 세진의 속을 시끄럽게 만든 당사자에 의해서.



 “상무님, 여기서 뭐하세요?”



 여자가 힘겹게 서있는 세진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마자 세진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게 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자신과 여자가 선 곳만 다른 공간으로 분리된 것 같았다. 세진이 상무라고 불리자 직원들이 다시금 자세를 바로 고쳤다. 아니면 이 여자가 센티넬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대단한 사람인 거든가.



 “대, 대표님.”


 “내 손님인데, 여기 무슨 문제 있어?”



 대표라니, 두 번째 추측이 맞았다. 직원들이 허둥지둥 설명하는 중에도 대표라고 불린 사람은 세진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세진은 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감각은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지만 왠지 손길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까 올라왔던 술기운이 아직도 남은 건지, 오늘 컨디션에 비해 능력을 너무 과하게 써서 지친 건지, 세진은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하곤 정반대의 충동과 싸워야했다. 여자가 자신을 더 감싸 안게 하고, 여자에게 좀 더 편하게 기대고 그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더 가까이... 세진은 불 꺼진 경매장에서 둘만의 세계에 빠져있던 연인들을 떠올렸다. 아까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 같던데 아직도 하고 있으려나? 세진의 의식이 그쪽으로 뻗었다. 그 사람들은...



 “그래, 이 친구는 이제 나랑 있을 거니까 괜찮아. 할 일들 해.”



 여자의 손이 어깨에서 떨어지고 나서 세진은 자신이 눈을 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무의식중에 여자의 품을 파고들었다거나 몸에 손을 댔다거나 하진 않았다. 세진은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하며 이번 의뢰는 정말로 포기하고 이쯤에서 철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우선 이 여자에게서 벗어나야했다.



 “허락 없이 손대서 미안해요.”


 “아 아뇨,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하, 하하, 직원 분들이 많이 친절하시네요.”


 “벌써 돌아가게요?”



 아는 사이처럼 말을 붙여오는 여자를 보며 세진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고 무탈하게 돌아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나는 그쪽이 뭔가 찾는 중인 줄 알았는데.”



 세진이 뭘 해보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패 한 장을 깠다. 세진에겐 다행이었다. 센티넬이 완전 출입불가능한 곳도 아니니, 학생인 것만 들키지 않게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그, 죄송해요. 같이 온 분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조용히 찾고 싶어서, 근데 먼저 돌아가셨나 봐요. 저도 이제,”


 “그 동행인은 물론 가이드겠죠?”


 “...그럼요.”



 세진은 학교 밖에서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피가 식는 기분에 빨리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육 마치고 정식 등록되면 앞으로 수천만번은 더 겪을 일이었다. 같은 센티넬이면서 가혹하게 구는 상대에게 조금 짜증도 났다. 적당히 가이드 이름만 대면되겠지, 이 여자가 여기 온 사람들 동행인까지 다 아는 것도 아닐 테고.



 “무진건설 최원재 이사님하고 같이 왔어요. 그냥 옆에 서있기만 하면 된대서 제가 등록증은 따로 챙겨 오질 않았는데...”


 “최이사님 동행인은 남자였는데. 아직 여기서 나가지도 않았고.”


 “뭔가 잘못, 아셨나 봐요.”



 웃으며 가볍게 말했지만 세진은 등줄기부터 서늘해졌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일단 튀자. 우선 빠져나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지도,



 “경매는 아까 다 끝났는데 경매장이 소란스럽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지 그랬어요. 아직 저런 건 부끄러울 나인가?”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세진의 시선과 모든 신경이 경매장으로 쏠렸다. 방금까지 능력을 많이 써서 지쳤던 게 거짓말처럼 세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흔적 없이 빠르게, 그리고 선명하게 벽 너머를 볼 수 있었다. 어두운 경매장 구석 소파에서 좋다고 끙끙대고 있는 남자가 최원재였다. 이제보니 경매장 문 앞을 어떤 남자-아마도 눈앞의 여자가 말한 최원재의 남자 동행인-가 티 안 나게 지키고 있었다. 왜 아까는 몰랐던 건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모든 상황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엇.”



 정신을 차린 세진이 다시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이미 멀어지는 중이었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은 것인지, 세진이 고개를 돌린 그 순간에 여자도 세진 쪽으로 고개를 반쯤 돌리고 작게 한번 끄덕였다. 그게 허락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세진은 조용히 경매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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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계단  (0) 2017.01.06
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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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세진] 계단

불야성 / 2017. 1. 6. 03:17

불야성 이경세진이경 판엠-얼음-정언 합작(...?)의 두번째타자 얼음입니다! 

릴레이 글은 아니고 그냥 돌아가면서 처음 사람이 주제를 제시하면 다음 사람이 대사 하나를 제시하고 마지막으로 받은 사람이 한 장면을 썼어요. 제 글은 정언님 주제의 판엠님 대사로 쓴 장면입니당


14화 이전에 스토리(?) 짜놨는데 14화가 넘 개쩐 나머지 혼파망 되어서... 이것저것 수정하고 추가하고 했더니 생각보다 길어졋네요...


이런 결말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글이고, 다른 건 모르셔도 읽는 데 큰 지장 없지만 "와 저 불빛 다른 것보다 훨씬 밝아. 꼭 우리 대표님 같아, 그치."라고 이세진이 (취해서) 서이경 없는 곳에서 말한 적 있다는 건 알고 읽어주세요. 14화까지 보시고 보시면 좀 더 재미...있을지두














-



당신은 위에서 기다리고, 나는 당신이 부르기를 기다린다.

나는 당신을 만나러 계단을 오르고, 내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간다.

당신은 가끔씩 당신에게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계단을 내려왔다가, 이기고 돌아와 계단을 오른다.







갤러리에스 건물 옥상에서 서이경이 팔짱을 낀 채 야경을 보고 있다. 서이경 뒤로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옥상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도 들린다. 서이경은 눈동자만 살짝 굴려 손님이 누군지 확인한다.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지만.



"왔니?"

"네."

"축하해."



이세진은 무슨 말이든 하려 입을 반쯤 벌렸다가 하얀 입김만 내뱉고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내린다. 팔짱 낀 서이경의 팔꿈치 아래로 새빨개진 손끝이 보인다. 서이경의 어깨도 조금 떨리는 것 같다. 여기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건지 걱정스럽게 고개를 드는 이세진과, 한참 대꾸 없는 이세진에게로 몸을 돌리던 서이경의 눈이 마주친다. 울 것 같은 눈과 옥상에 부는 칼바람만큼 차가운 눈이 서로를 바라본다.



"네가 바라던 대로 됐는데, 별로 기뻐보이질 않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요."

"날 추월하겠다고 했잖아."

"그건,"

"니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궁금하지도 않고. 중요한 건 네가 뭘 해냈냐는 거야."



이세진은 변명하기를 관둔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이 내준 숙제를 하고, 당신 대신 재계 인사들을 만나고, 그리고 어떤 감정으로 당신을 대했는지, 당신은 설명해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해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기껏해야 어리광부리지 말라고 하겠지. 이세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파리한 서이경의 입술에 닿았다가, 다시 올라와 서이경이 보고 있던 먼 불빛들로 이동한다.



서이경은 이세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뭘 보고 있는지 살피고 입꼬리를 약간 올려 웃는다.



"그래서 어때? 세상 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선 기분은?"



이세진은 서이경이 자신의 시선을 잘못 이해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는다. 서이경 말마따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별로에요. 제 적성에 안 맞나 봐요."

"안 됐네. 이제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을 텐데."



서이경의 눈썹 끝이 내려간다. 마치 진심으로 안타까운 것처럼. 어쩌면 정말로 안타까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추운 곳에 오래 있어서인지 서이경의 눈가가 새빨갛다. 잔 숨까지 새하얗게 티나는 이세진과 다르게 서이경의 날숨은 아주 희미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서이경이 이세진을 향해 한 발짝 다가온다. 이세진은 이것과 비슷한 상황을 예전에도 겪은 적 있다. 보고 싶지 않은데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려 서이경을 바라보게 된다. 먼 곳을 보다 갑작스레 가까운 곳으로 초점이 옮겨진 눈동자가 시리다. 서이경이 가까워질수록 이세진은 한기를 느낀다. 피까지 얼어붙은 사람 같다는 말이, 지금의 대표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을 없을 거라는 실없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공중에서 얽히는 입김이 누구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곳까지 고개를 숙인 서이경이 작지만 또렷하게 말한다.



"네가 멈추려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널 갈기갈기 찢으려 달려들 거야."



이세진은 정확히 이런 상황을 겪은 적 있다. 이제는 이게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안다. 서이경은 이세진을 협박하지 않는다. 이세진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줄 뿐이다. 이세진은 가까스로 서이경에게서 눈을 떼고 아무것도 없는 건물 난간을 노려본다. 조금 목이 멘다.



"대표님 지금 추우시죠, 핏기가 하나도 없어요. 빨리 들어가셔야 할 거 같은데."


"세진아."



서이경의 다정한 목소리에 이세진이 소리 없이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가, 상처받은 눈으로 서이경을 올려다본다. 어떤 사람에겐 다정함도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서이경은 모른다. 알아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상처 줄 사람이지만.



"올려다볼 땐 뭐든 근사해보여. 아래에서 보면 꼭대기, 그 자리 바닥에 고여서 썩은 검은 피는 안 보이는 법이거든."

"근사해 보여서 갖고 싶다고 했던 거 아니에요."



결국 이세진은 참지 못한다. 내 진심을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지만 복잡하지도 않다고, 단지 대표님만 모를 뿐이라고.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은 눈에 고인다. 다행히 서이경은 그 눈빛을 외면하지 않지만, 말없이 입술 끝을 당겨 웃는다. 이세진은 저 표정을 안다. 거짓말 하지 말라는 뜻이다.



"세진이 너 거짓말이 습관 됐구나."

"대표님 저는,"



이세진은 입술을 안으로 꾹 감쳐물고 침을 한 번 삼킨다. 이전에도 많이 부딪혔지만 다시 한 번 더 부딪히기로 한다. 정말로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제가 가지고 싶었던 건 모든 불빛이 아니에요. 모든 불빛까진 저한테 필요 없어요."

"가르쳐 봤자 다 헛일이네. 그 정도로 만족하지 마. 넌 똑똑하니까, 더 높고 더 커질 수 있어."



이세진은 작게 고개를 젓는다. 이세진이 서이경을 똑바로 바라본다. 서이경의 얼굴에 약간의 의문이 떠오른다. 서이경에게 이세진은 복잡한 아이다.



"저는 다른 것보다 훨씬 크고 밝은 빛, 그거 하나만 원했어요."



이세진의 말에 서이경의 눈빛이 차갑게-더 이상 차가워질 수 있나 싶은 눈빛에서 더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것을 보고 이세진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하지만 슬픈 눈으로 웃는다.



"다 가졌는데, 제가 처음부터 갖고 싶어 했던 것만 못 가졌네요."



높은 건물들 사이로 부는 바람은 차갑고, 서이경의 코끝처럼 이세진의 코끝도 빨개진다.



"그리고 앞으로도 못 가질 것 같아요. 원하는 것도 놓치고, 제가 지금까지 뭘 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서이경의 눈썹에 작은 움직임이 생겼다 사라진다. 둘 다 입을 열지도, 눈을 돌리지도 않는 시간이 얼마간 흐른다. 이세진은 서이경과 평생이라도 그렇게 마주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다 점점 파래져가는 서이경의 입술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이세진은 서이경을 빨리 따뜻한 곳에서 씻기고 재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분명 이 며칠 잠도 밥도 제대로 안 챙겼으리라고, 하지만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서이경이 자기와 함께 건물로 들어가지도, 자기를 여기 놔두고 들어가지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세진은 먼저 등을 돌리기로 한다.



"이제 가볼게요. 버스타고 가면 한참 걸려서. ...계속 춥게 계시진 마세요."



서이경은 대답이 없다. 이세진은 괜히 한 번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숄더백을 고쳐 매고, 천천히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한다.



"세진아."



언제나처럼 서이경의 부름에 이세진은 발을 멈춘다. 이세진은 돌아보고 싶은 것을 참으며 언제나처럼 대답한다.



"네 대표님."

"내가 방금도 그 정도로 만족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네?"



무의식적으로 돌아선 이세진은 자신을 보고 있는 서이경을 본다.



"거기서 쉽게 내려오는 방법은 없어. 곤두박질치고 싶지 않으면 이미 잡은 걸 놓을 생각 하지 마. 관두네 마네 그런 약해빠진 소리도 하지 말고."

"대표님 제가 한 말은, 제가 대표님을,"

"네가 거기 있어야, 내가 널 계속 원하게 될 테니까."



말을 끝낸 서이경이 팔짱을 풀고 이세진 곁을 지나가며 세진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놓는다.



"나는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어. 그때까지 잘 버텨봐."



혼란스러운 표정의 이세진 뒤로 울리는 서이경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경쾌하다.















정언님의 주제 - 계단

판엠님의 대사 - "올려다볼 땐 뭐든 근사해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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