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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네요 파판이 업데이트되는 바람에...(피폐) 민나 파판14 하세요 엠펠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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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엠마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페레그린의 방으로 가려고 했으나, 엠마를 아주 좋아하고 걱정해주는 여러 친구들에게 둘러싸이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조금 눈치를 보다가 밀라드를 앞세워 엠마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그건 엠마가 약 4주간 본 퀴즈 시험지 뭉치였다. 밀라드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엠마, 엄마처럼 굴고 싶진 않지만 너 벌써 3과목에서 위험해. 우리가 같이 듣는 과목 중에서 말이야. 같이 듣는 게 3과목뿐이지만.”

 “훔쳐보려던 건 아닌데 조교님이 네가 안 찾아갔다면서 네 퀴즈 시험지를 우리한테 줬어. 그걸 본 다른 조교님도 네 시험지를 줬고. 원랜 우리가 받아오면 안 되는 거지만...”

 “교수들이 한번 널 불성실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턴 니가 아무리 공부해도 좋은 점수 못 받을 걸. 니가 그런 걸 신경 쓰긴 한다면 말이야.”



 올리브는 조심스럽게 시험지를 어디서 났는지 밝혔고, 에녹은 올리브 말을 자르고 겁부터 줬다. 엠마는 성적에 대해서는 전혀 겁먹지 않았지만. 페레그린이 자신을 불성실하다고 생각하는 건 싫었다.



 “성실하게 보이는 건 어떻게 하는 건데?”



 엠마가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필기 노트와 요약정리 복사본이 튀어나왔다. 각자 맡은 과목과 파트가 있는 것 같았다. 엠마 품에 산더미 같은 종이뭉치들이 쌓이고, 마지막으로 브로닌이 엠마 손에 종이 쪼가리 하나를 쥐어주었다.



 “성실하게 보이고 싶으면, 성실해져야지.”

 “그건 우리 스터디 시간표야. 다음주 필기 담당들은 이미 정해졌고, 너는 다다음주부터 끼워 넣었어. 페레그린 교수님 수업부터 시작하면 돼.”

 “이번 학기엔 우리 중 누구도, 제발 추가 시험도 추가 레포트도 없었으면 좋겠어. 물론 유급도 없었으면 좋겠고.”

 “그 누구는 바로 엠마를 말하는 거야, 엠마, 너도 알겠지만.”

 “친구에게 굳이 빈정거려줘서 고마워, 에녹. 너도 보충 레포트 썼으면서 왜 새삼 꼰대처럼 굴어?”

 “한 과목이었잖아! 얘는 모든 과목이었고.”

 “엠마한테 너무 그러지 마. 지금 정신이 좀 없나본데.”

 “엠마, 우리 얘기 듣고 있어?”



 엠마는 페레그린의 이름을 들은 뒤부터는 친구들 얘기를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내가 페레그린한테 뭘 하면 된다고?”

 “페레그린 교수님한테 뭘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수업 때 필기만 하면 돼. 다음다음주에.”

 “그리고 그 다음주에 필기할 수업은 나중에 알려줄 거야.”

 “너희 정말 ‘그 페레그린’ 수업 필기를 얘한테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해?”

 “엠마, 너는 관심 없는 거 같아서 우리끼리만 스터디 하고 있던 거 미안해. 강요하는 건 아닌데, 니가 혼자 공부하는 게 힘들면 혼자 할 필요 없어. 필기 꼼꼼히 하는 게 힘들 거 같으면 첫 주는 내가 좀 도와줄게. 아니면 녹음기를 써도 되고, 페레그린 교수님은 질문도 잘 받아 주시니까 메일을 보내봐도 되고, 아니면... 정 힘들면 다음부턴 조류학 수업 필기에선 빼줄게.”

 “아냐! 나 페레그린 조... 크흠, 페레그린 교수님 수업 좋아.”

 “어.. 그거 다행이네. 우린 이제 수업 전까지 복습할 거야. 오늘 바론 교수님이 퀴즈 본다고 한 건 알지?”

 “뭐...?”



 친구들은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엠마를 양쪽에서 붙들고 끌고 갔다. 덕분에 수업 전에 페레그린의 번호를 따오려던(페레그린과 얘기가 길어졌으면 그대로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을 테지만) 엠마의 원대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엠마가 점심시간 외에는 와본 적 없는 식당에서는 이미 몇 무리가 모여 공부하고 있었다. 엠마는 어쩔 수 없이 친구들과 함께 퀴즈 준비를 하고,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붙잡혀 또 복습을 하고, 스터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이 스터디를 처음 제안한 호레이스가 모임이 기본적으로 굴러가는 방식과, 그들이 다함께 듣는 세 과목과 각 과목 교수님들이 점수를 주는 방법에 대한 브리핑과(페레그린 교수 얘기가 나올 때는 엠마도 집중할 수 있었다.) 매주 보는 퀴즈는 어떻게 대비하는지, 스터디 모임 시간은 언젠지 등등을 말하는 동안 엠마는 일곱 번쯤 일어났다가 다른 애들의 손에 붙잡혀 다시 앉았다.






 이후 필기 교환과 오탈자 수정과 이해가 힘들었던 부분에 대한 짧은 토의가 끝난 뒤 엠마가 겨우 애들과 떨어져 초조하게 페레그린 교수 방으로 달려간 건 6시가 다됐을 때였다. 금요일이었고, 그러니까 다음날과 그 다음날은 토요일 일요일이었고, 점점 짧아지는 해는 이미 주황빛이었다. 며칠만 기다리면 수업시간에 페레그린을 만날 수 있었지만, 엠마는 꼭 지금 만나고 싶었다. 번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락처를 몰라도 처음 만난 술집에 가면 주말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전화번호를 물어볼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것이기 때문에, 그건 이유가 되지 않았다. 엠마가 뛰는 이유는 단지 페레그린이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엠마 스스로도 잘 모르는 것 같지만.



 교수실이 늘어선 복도에 도착했을 때, 엠마는 빛이 쏟아지는 창을 등지고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이 페레그린이라는 걸 엠마는 바로 알아챘다. 너무 활짝 웃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깨물고 웃는 바람에 엠마의 뺨이 오븐에 넣은 빵 반죽처럼 부풀었다. 



 “블룸양? 괜찮아요?”



 페레그린이 본 엠마는 100미터 달리기를 막 끝낸 사람처럼 가슴을 들썩이며 입을 꾹 다물고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엠마는 침을 꼴깍 삼키고 적당히 활짝 웃었다.



 “아안녕하세요! 괜찮아요. 그냥 좀 뛰고 싶어서 뛰어 왔거든요.”

 “운동을 좋아하나 봐요. 바람직한 생활습관이네요.”



 페레그린이 ‘젊음은 좋은 거지’라고 눈빛으로 말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엠마에게 길을 비켜주듯이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엠마는 조금 더 오래 페레그린과 대화하고 싶었다.



 “우, 운동, 좋아하세요?”



 엠마의 질문에, 작별인사를 꺼내려던 페레그린이 멈칫했다. 페레그린은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다가 멋쩍게 웃었다.



 “아뇨, 그냥 집 근처 산책하는 정도만 좋아해요.”

 “그럼 같이... 네? 안 좋아하신다구요?”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해요.”



 운동을 좋아한다고 하면 주말에 같이 공원에라도 가자고 하려했던 엠마의 생각이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노을처럼 뻔히 보였지만 페레그린은 노을을 등지고 서있었다. 엠마는 다른 핑계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제가 공부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오! 질문인가요?”



 엠마는 공부 얘기를 꺼내자마자 반짝이는 페레그린의 눈동자를 보고 황급히 뒷말을 바꿨다. 지금 당장은 뭘 물어보려 해도 아는 새 이름조차 없었다.



 “...생길 거 같아서요. 제가 궁금한 게 생기면 못 참는 타입이거든요. 그, 궁금한 게 생각나면 주말에 연락해도 돼요?”

 “물론이죠.”

 “......”

 “......”



 가벼운 미소를 띠고 기특한 학생을 보는 페레그린과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딴 곳에 시선을 두며 기다리는 엠마의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결국 엠마가 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을 깨려 조심스럽게 페레그린을 불렀다.



 “...교수님?”

 “네, 미스 블룸?”

 “저, 제가 어디로 연락하면 될까요..?”

 “아! 미안해요. 잠시만...”



 엠마가 환기시켜주자 페레그린은 급하게 가방을 뒤적거렸다. 엠마의 시선은 페레그린의 (여전히 까만 네일아트가 되어있는)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단색 정장으로 가려진 팔을 따라 올라갔다. 페레그린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깃털모양의 커프스 버튼과 칼라핀이 조금씩 보였다. 엠마가 페레그린의 귀걸이도 새 모양일까 궁금해져서 고개를 드는 순간 페레그린도 가방에서 명함을 찾아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들었다. 



 “내 명함이에요.”

 “감사합니다. ...어?”



 페레그린이 준 명함에는 학과와 학교와 페레그린의 이름, 지역번호까지 함께 찍힌 교수실 전화번호와 동호수, 학교 계정의 이메일 주소만 적혀있었다. 뭔가 더 있을까싶어서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확인했지만 그게 다였다. 페레그린은 엠마가 당황한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여전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일 오피스아워엔 내 개인실로 전화하면 대부분은 받을 거예요. 난 이메일을 더 선호하긴 해요. 길고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있고 사진 첨부도 할 수 있잖아요. 메일함은 주말에도 자주 확인하니까 편하게 연락 줘요.”



 그리고 페레그린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된 게 불편한 듯 페레그린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고작 3분 21초 지체됐지만 더 늦을수록 시내 정체구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 터였다. 페레그린은 자신이 무의식중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다시 웃으며 엠마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실례할게요. 좋은 주말 보내요, 미스 블룸.”

 “잠시만요! 제가 궁금한 건,”



 엠마가 돌아서는 페레그린을 급하게 잡았다. 페레그린은 반쯤 돌린 몸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엠마를 쳐다봤다. 엠마는 지금이 페레그린에게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기에 전혀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페레그린의 눈썹이 엠마를 재촉하듯 위로 올라갔다.



 “궁금한 게 뭐죠?”

 “저, 그러니깐...”



 그러고보니 페레그린 교수는 지각에도, 과제 제출을 늦게 하는 것에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엠마의 귀에 틱톡틱톡 바쁘게 움직이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엠마의 혀가 바짝 마른 입술을 한번 훑었다. 내면의 엠마가 엠마를 질책했다. 엠마 블룸 멍청아 일부러 찾아와서 교수님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 어떡해?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해도 모자랄 판에, 교수님이 좋아하는...



 “성실한 사람! ...을 좋아하시나요?”



 엠마는 말을 뱉자마자 도를 아시냐고 물었어도 이것보다는 뜬금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인정했다. 페레그린 역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엠마의 질문에 잠시 입을 벌린 채 눈동자를 크게 굴렸다.



 “어... 물론이죠. 성실한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어요?”

 “취향이 조금 다르실 수도 있으니까.”

 “음, 그게 궁금했나요?”

 “네.”

 “그래요, 그럼...”

 “좋은 주말 되세요.”



 페레그린은 가볍게 머리를 움직여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빠져나갔다. 엠마는 한동안 복도에 서서 얼굴을 감싸 쥐고 부끄러운 짓을 한 자신을 살해하고 싶어 하는 내면의 다른 엠마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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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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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ㅎ... 엠펠 교수AU 2편....이에요 이런 엠마와 이런 페레그린에 대해 대화해주신 담님 언제나 감사하구..ㅋㅋㅋㅋ

엠마가 힘냇스면 좋겠네요 화이팅<














영화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팬픽

[엠마 블룸/알마 페레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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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엠마는 당연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페레그린이 같은 학교 교수라거나 엠마보다 16살이나 많다는-엠마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구글과 학교 홈페이지를 뒤져 페레그린의 프로필을 검색했다- 사실이 엠마를 갈등하게 했다. 엠마 친구 중 가장 독설가인 밀라드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단칼에 “그건 그냥 립서비스잖아.”라고 해줬을 테지만 엠마는 친구들과 자기 연애사업을 자세히 공유하는 편은 아니었다.



 같은 시각, 진심이든 아니었든 엠마에게 눈이 예쁘다고 말한 페레그린은, 엠마에게 말한 대로 다음날 아침 수업을 위해 숙면하고 있었다.



 칭찬 하나로 이미 페레그린과 비밀연애 계획까지 세운 엠마는 아침이 밝자마자 잘 잤냐고 모닝콜을 할 뻔 했지만, 아쉽게도 또는 다행히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페레그린의 전화번호를 몰랐다. 엠마는 자기 옷장에서 가장 꾸미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예쁜 옷인 빨간 체크무늬 남방을 꺼내 입으며 페레그린의 교수실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엠마가 오전 수업 없는 날 학교에 이렇게 일찍(이라고 해봤자 11시였지만) 나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엠마의 상냥한 친구들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친구들의 진심어린 걱정에 엠마는 사랑이 자기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대답했고 친구들은 이럴 땐 엠마에게 아무 것도 더 묻지 않고 내버려두는 게 가장 낫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엠마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속으로 행운을 빌어주며 엠마를 두고 강의실과 도서관으로 흩어졌다. 그들 중 가장 마음 여린 올리브만 한번 뒤를 돌아보며 엠마에게 “이번에는 음.. ‘잘’해봐.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사람한테 천천히 시간을 좀 주면서...”라고 충고 비슷한 말을 남겼다. 엠마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론이지!”라고 했고 올리브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브로닌이 간 방향으로 사라졌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엠마는 곧장 페레그린의 방으로 갔다. 페레그린이 오전수업이 있다고 했고, 수업은 최소 3시간 이상이었으므로 페레그린의 방은 당연히 비어있었다. 엠마는 역시 페레그린한테 번호부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복도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교수들의 개인 방이 주르륵 늘어선 복도는 형광등 몇 개가 빠져 어둑했고, 아주 조용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엠마가 들은 거라곤 문을 반쯤 열어둔 교수가 뭘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누군가가 타자를 치는 소리, 닫힌 문틈으로 작게 들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 정도였다. 긴 복도에는 중간을 가로지르는 복도가 있었다. 그 복도를 기준으로 한쪽은 캠퍼스 중심을 향해 있었고 한쪽은 훨씬 한가한 쪽으로 뻗어있었다. 페레그린의 방은 교정 바깥쪽을 향한 복도 끝이었다. 엠마는 그 복도를 두 번쯤 어슬렁거리다 페레그린 방 앞에 서서 창밖을 구경했다. 복도 반대쪽 창과 달리 이쪽엔 지나다니는 사람도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실은 길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이 없었다. 하지만 꽤 넓은 잔디밭이 있었고 군데군데 나무도 있었다. 창이 꼭 닫혀서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바람이 불면 낙엽지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쏟아질 것처럼 흔들렸다. 꽤 예쁜 풍경을 보며 엠마는 언젠가 페레그린에게 저곳이 당신을 닮았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조용하고,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고, 길도 없지만 나는 이곳이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됐다고.



 이 건물에 처음 와보는 엠마는 몰랐다. 다른 때엔 돗자리나 겉옷 깔고 앉아서 도시락 먹거나 일광욕하는 학생들 많지만 지금은 아직 오전이고, 오늘따라 갑자기 날이 추워서 아무도 없을 뿐이라는 것을.






 엠마가 창틀에 기댔다가 쪼그려 앉았다가 복도를 한 번 더 둘러보고 배고파하며 손목시계를 오천 번쯤 봤을 때 페레그린이 나타났다. 엠마가 페레그린을 보고 팔을 크게 흔들었지만 페레그린은 엠마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해서야 페레그린은 창을 등지고 있던 엠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블룸양?”

 “엠마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엠마는 페레그린이 교수실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페레그린은 엠마가 왜 왔는지가 더 궁금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야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죠.”



 페레그린은 잠시 생각했다. 눈치가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 사람이었지만 주변에서 많이 이것저것 말해준 덕에, 어떤 사람들은 인사치레 없이 바로 용건을 말하면 무례해 보인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엠마에게 상냥하게 웃으며 다시 물어봤다.



 “고마워요. 용건은 그게 다인가요?”



 엠마도 잠시 생각했다.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페레그린은 더 근사한 대답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했어야 했는지,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엠마에게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건 시험일지도 몰랐다. 엠마의 마음을 시험해보는 질문. 이제 문제는 어떻게 얘기하는 게 가장 멋있을 지였다. 



 “오늘 제 일정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뿐이에요.”



 엠마의 말에 페레그린이 눈을 굴리며 창밖을 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개인 연구실 열쇠를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였다.



 “일정에 점심 식사도 추가하도록 해요. 밥은 먹어야죠.”



 엠마는 페레그린의 식사 제안이 기쁘면서도 같이 갈 식당을 알아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초조해졌다. 페레그린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 이전 수업 때 쓴 책과 자료 몇 가지를 내려놓고 오후 일정에 필요한 짐을 챙기려 두리번거렸다. 엠마는 눈치를 조금 보며 문 앞에서 페레그린의 작은 방을 둘러봤다. 엠마의 예상보다 훨씬 아기자기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예를 들면 책장에 일렬로 늘어선 까만 점이 몇 개 찍힌... 아마도 어떤 새인 것 같은 흰 털뭉치라던가, 일부러 표지가 보이도록-정확히는 표지의 새가 보이도록- 책장에 세워둔 조류도감들, 무슨 용도가 따로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보기만 하는 건지 모르겠는 여러 가지 모양의 새 장식물들, 확실히 그냥 눈요기용인 예쁜 유리종 안의 새 조각들, 새 사진 또는 그림이 들어있는 액자들, 스탠드에 걸린 알록달록한 깃털 장신구, 새둥지모양 재떨이와 날개를 접은 새 모양 파이프, 새 부리 모양으로 튀어나온 집게 끝에 종이를 끼워서 쓰는 메모꽂이 같은 것들이 있었다.



 엠마가 온갖 새와, 새와, 새를 구경하는 사이 페레그린은 노트북과 유에스비와 비닐에 포장된 샌드위치를 가방에 우겨넣었다. 가방을 다 싼 페레그린이 옷걸이에서 코트와 스카프를 내려 걸치다가 문틀에 기댄 엠마를 발견했다.



 “나한테 더 할 말 있어요?”

 “어... 식사 말인데요.”

 “아, 시내로 나가나요?”



 엠마는 우물우물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자기가 아는 곳은 거기서 거기니까 가는 길에 정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럼 내 차로 데려다줄게요. 괜찮죠?”



 엠마는 당연히 괜찮았다. 페레그린이 안전벨트를 직접 채워주길 기대했으나 그러지 않아서 약간 실망한 순간이 있었지만, 그런 건 주차된 차를 후진으로 빼는 페레그린을 보면서 잊혀졌다. 운전하는 페레그린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엠마는 너무 바보처럼 히죽이지 않으려 영혼의 손가락을 오백 개쯤 깨물었다. 엠마가 계속 힐끔거렸기 때문에 페레그린이 오른쪽 사이드미러를 확인할 때마다 엠마와 눈이 마주쳤고, 페레그린은 그때마다 살짝 웃어주었다.




 엠마의 행복한 15분이 지나고 시내에 거의 도착해서야 엠마는 페레그린을 데려가려는 식당에 주차장이 제대로 있는지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확실히 주차장이 있는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페레그린이 멀티플렉스가 보이는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저 안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이번 주 세미나에서는 내가 첫 번째로 발표를 맡았거든요. 여기서 걸어갈 수 있죠?”

 “네? 세미나요?”

 “네, 조전사(조류 연구에 전념하는 사람들)에서 이번 겨울 학술대회는 좀 크게 하고 싶은가봐요. 갑자기 준비하게 돼서 좀 바쁘긴 하지만 기회가 될 때 열심히 해야죠.”

 “하지만 교수님, 점심은요?”



 엠마는 페레그린이 왜 ‘데려다주겠다’고 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차로 같이 가자는 게 아니고 정말 엠마를 시내에 내려놓기만 하겠단 소리였던 거다. 엠마의 충격 받은 표정을 오해한 페레그린이 감동받았단 표정을 지었다.



 “오 블룸양, 내 걱정 해주는 거예요? 고마워요. 하지만 세미나는 어차피 매주 있는 거고... 내 점심은 샌드위치면 되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페레그린은 자기 가방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아까 다른 짐들과 함께 가방에 쑤셔 넣은 샌드위치를 꺼내 보였다. 그리곤 조금 민망한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페레그린이 웃는 게 얼마나 예뻤는지, 그때까지 이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엠마도 살짝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엠마는 결국 차에서 내려, 경쾌하게 손을 흔들고 떠나는 페레그린을 배웅했다.




 엠마는 페레그린을 생각하며 혼자 샌드위치를 사먹었다. 아까는 학교에 있더니 왜 수업엔 늦냐는 밀라드와 브로닌의 문자를 애써 무시하며. 엠마는 다이어리에 ‘매주 세미나,’ ‘조전사??’ 같은 것들을 적었다. 펜 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 엠마는 다시 다이어리 아래쪽에 ‘전화 번호 물어보기’라고 쓴 뒤 왕별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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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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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채담님과 얘기했던 페레그린 교수AU에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 ㅋ 이번 편은 좀 짧지만 재밌게.. 읽어주세요......











영화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팬픽

[엠마 블룸/알마 페레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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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골목에 위치한 작은 바에서 엠마와 페레그린이 마주친 것은, 어떻게 보면 그렇게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페레그린은 혼자 술집에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인이었고, 엠마도 세달 반 전부터 성인이 됐으니까. 하지만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성인 여자 두 사람이라고 해도 시내의 많고 많은 술집 중 구석에 위치한 술집에서, 그것도 평일 밤에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엠마가 페레그린을 발견하고 놀란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엠마가 놀란 이유는 페레그린이 이번 학기에 듣는 교양 수업의 교수이기 때문이었고, 그들이 마주친 곳은 주로 여자를 만나고 싶은 여자가 오는 술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나란히 바에 앉아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게 될 줄은 몰랐는데.’

 



 교수는 단 한 명이지만 수강생은 거의 200명에 가까운 수업이었고, 엠마는 그렇게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거나 질문을 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게다가 학기가 시작한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으므로, 엠마는 당연히 자신 혼자만 페레그린을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물론 혹시나 페레그린이 엠마를 알아봤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반갑게 인사하며 합석을 권할 거라고는 아무도, 감이 좋다고 여겨지는 같은 과 친구 호레이스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엠마의 모든 예상을 깨고 페레그린은 단번에 엠마를 알아봤고 심지어 엠마의 이름을 크게 외치기까지 했다. 정확히는 “블룸양!”이라고. 엠마는 화들짝 놀라 거의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날아서 페레그린 옆에 바짝 붙었다. 엠마는 손으로 페레그린의 입을 막아버리거나 옆구리를 세게 찔러서 잠시라도 말을 멈추게 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해맑게 웃으며 옆자리를 권하는(한잔 하려고 온 거면 제가 사도 될까요, 블룸양? 물론 블룸양이 괜찮다면요.) 페레그린에게 엠마는 이를 악물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안녕하세요, 페레그린씨, 이런 우연도 있네요. 교수님을 봬서 저도 무척 반갑지만, 제가 이런 곳에서 주립대학 조류학과 교수 페레그린을 만났다고 고래고래 광고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저를 엠마라고 불러주시는 게 어때요?”



 페레그린은 엠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시던 술잔을 비웠다. 페레그린을 본 순간부터 충분히 당황스러웠던 엠마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억지로 이해해봤다. 페레그린은 이곳이 그저 (혼자 온 여자에게 집적거리는)남자 손님이 적고 다른 곳보다 조용한 술집인 줄 알고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냥 모르는 척 해도 될 엠마에게 굳이 합석하자고 한 것을 보면 페레그린은 어떤 종류든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고 온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엠마는 아니었다. 이곳은 운이 좋다면 가질 수 있을 ‘가벼운 만남’을 위해 엠마가 가끔 들르는 곳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지만, 바에 도착한지 5분도 안 돼서 맥이 빠진 엠마는 본래 목적을 포기하고 페레그린이 권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쨌거나 술집에서 만나면 보통 자기 이름을 다 까진 않잖아- 내가 블룸이라고 불러달라고 한 적도 없고- 하지만 우린 이미 아는 사이니까 미스 페레그린은 상관없다고 생각했을지도- 우리가 아는 사이야? 언제부터?- 이 여자가 헤테로라면 애초에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 여긴 어쩌다 들어온- 우리가 정말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나?- 몇 백 명이 수강하는 수업에서 질문 한 번 한 적 없는데 나한테 술은 왜 산다고- 설마 술집에서 모르는 척 하면 내가 학교에서 따지기라도 할 줄- 그냥 얘기 상대가 필요했을 지도- 그럼 더더욱 수강생을 앉혀놓지는 않을- 아냐 나는 교수가 아니니까 모르지 교수들은 원래 다 조금씩 이상하고- 미스 페레그린이 설마 혹시 평소부터 나를- 엠마가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페레그린은 자연스럽게 엠마 몫의 술까지 추가로 주문했다.



 “그냥 내가 마시던 술로 주문했는데. 브랜디 괜찮아요? 블ㄹ, ...엠마?”



 엠마는 적당히 달달한 칵테일 한 잔 시키고 괜찮은 여자가 있으면 꼬실 예정이었으므로 그런 구닥다리 같은 술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말은 삼키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레그린이 엠마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예상치 못하게 달콤하게 들려서는 아니었다. 한번만 더 블룸양이라고 부르면 교수고 뭐고 그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된 거 술값이나 굳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엠마의 예상은 또 한 번 틀렸다. 페레그린과의 술자리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즐거웠다. 엠마는 페레그린과 한 대화의 반의 반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페레그린은 엠마가 아는 교수들 중에 가장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기억나진 않지만 아무튼 재미있는 얘기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 평소 여자를 꼬시기 위해 하던 말의 반의 반도 안 했는데 페레그린은 이미 엠마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고, 엠마는 그게 자신의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엠마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담배냄새조차 페레그린이 피우는 건 캠프파이어의 장작냄새만큼 엠마를 설레게 했다. 얼마나 즐거웠는지 엠마는 페레그린이 자기 교수인 것도 까먹고 페레그린의 손톱까지 슬쩍 확인했다.



 새까만 메니큐어로 빈틈없이 채워진 페러그린의 긴 손톱은 그 즉시 엠마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그건 길거리에 500명을 붙들고 ‘이 손이 게이같아요, 헤테로 같아요?’하고 물어보면 499명은 헤테로라고 대답하고 단 한 명만 “헤테로 같긴 하지만 온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할 만한 손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세 번째로 놀랍게도 500명 중에 한 명이 맞았다. ...고 엠마는 생각했다.




 그날 별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대화 몇 마디만 빼면. 페레그린은 엠마 생각보다 술이 셌고 골초였다. 엠마는 평소보다 많이 마신 독한 술과 끊이지 않는 담배 연기에 반쯤 정신을 놓고 페레그린이 숨만 쉬어도 맞장구치며 웃고 있었다. 그렇게 웃다가 어느 순간 둘이 동시에 술로 목을 축이고 잔을 내려놓는 조용한 순간이 찾아왔고, 엠마의 혀는 잠깐의 정적을 참지 못하고 버릇대로 움직였다.



 “오늘 우리 만남은 운명이 아닐까요?”



 엠마의 혀는 이미 완벽하게 플러팅 모드였다. 지금까지 엠마가 가끔씩 여자를 꼬실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엠마의 얼굴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지금처럼 취한 엠마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었지만, 그건 술에 취하지 않은 엠마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페레그린은 자기 젊었을 적에도 안 먹혔을 수작질을 듣고도 별 반응 없이 눈썹만 한 번 까딱했다. 엠마는 어눌한 발음으로 계속 말했다.



 “이 넓은 우주에서 같은 행성에 태어나 같은 도시에 살고 같은 술집 옆자리에 앉아있는 거 말이에요. 우리는 서로에게 우주의 먼지보다도 아무 의미 없는 사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2주 전에는 이 멘트를 들은 상대방이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며 나갔었지만 엠마는 실패를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다행히 페레그린은 아직 급한 일이 생길 예정이 없어보였다. 페레그린이 술을 꼴깍꼴깍 마시는 사이 엠마는 연극 톤으로 우주와 먼지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대로 뒀으면 시간을 아우르는 운명 얘기까지 끄집어냈을 엠마와 페레그린의 눈이 마주쳤다. 페레그린은 별로 지루해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엠마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턱에 손을 괴고 엠마를 바라보던 페레그린은 엠마가 의아한 목소리로 “마담?”이라고 부르자 현실로 돌아왔다. 페레그린은 멋쩍게 웃으며 자기 목소리를 엠마에게만 들려주고 싶은 것처럼 속삭였다.



 “미안해요 엠마. 당신 눈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엠마가 눈을 깜박이며 이게 자기가 생각하는 뜻이 맞는 건지 파악하는 사이 페레그린은 내일 아침 수업이 있다며 계산을 마치고 사라졌다.












Posted by 얼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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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펠] 감기

기타 / 2016. 11. 15. 00:20

*영화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팬픽이지만 원작 소설 설정을 좀 빌렸습니다 원작에서는 엠마가 손에서 불을 뿜고 엠마가 내뱉는 숨도 따뜻하다는 설정이에요 영화의 올리브와 비슷한 능력인데 고무장갑 같은 건 안 끼고 그냥 다닙니당 










[엠마 블룸/알마 페러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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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뭘까? 여러가지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진다면 이상한 아이들과 임브린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일이 뭘까?



와이트와 할로우의 습격 같은 긴박한 상황을 제외하면 아마 임브린의 건강 상태가 최우선 해결과제가 될 것이다. 루프를 운영하는 임브린은 매일 루프를 점검해야 했다. 루프는 딱 24시간이고, 재설정 시각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단 몇 초만에도 무너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임브린은 단 하루도 앓아누울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에 점처럼 흩어져있는 루프들이 주로 햇볕 따사로운 봄이나 여름으로 설정된 것은, 그 곳에서 평생을 살아야하는 아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임브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돌발 상황은 생기는 법이고 임브린도 사람이므로 가끔은 감기기운 같은 것을 느꼈다. 1970년에서 73년 사이 어떤 날의 페러그린처럼.






페러그린은 아침부터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엠마에게 부탁해 따뜻하게 데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서 페러그린은 그 어지러움이 사소한 저혈압 증상이거나 혹은 그냥 잠에서 덜 깨서 그렇게 느껴진 것이었다고 결론내렸다. 



루프는 평소처럼 덥고 해가 쨍쨍했으며, 아이들은 점심을 먹고 바닷가로 우르르 몰려가 수영을 하고 제대로 몸을 말리지 않은 채 돌아와 번갈아가며 재채기를 했다. 휴가 재채기를 할 때는 벌들이 방 끝까지 튀어나갔다가 갑작스러운 추방에 화난듯이 붕붕거리며 아이들 머리 위를 날아다녔으므로, 그는 담요에 말린 채 집 바깥의 해가 잘 드는 곳으로 쫓겨났다. 젖은 옷만 겨우 갈아입은 피오나가 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페러그린은 우선 작은 아이들부터 닦아주고 새 옷을 입힌 뒤 머리 물기를 털고 있는 엠마를 불러 세웠다.



"미스 블룸."

"오늘은 제가 수영하자고 꼬신 거 아니에요. 맹세해요."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엠마는 억울하다는 듯이 수건을 휘두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페러그린은 한 손을 들어 엠마의 말을 막았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미스 엘레판타가 많이 추운 거 같으니 좀 안아주렴. 그리고 '꼬시다' 같은 말은 쓰지 말라고 했잖니."



엠마가 부루퉁하게 올리브의 등을 따뜻한 손으로 만져주는 사이 페러그린은 그새 벌떼 사이에 갇힌 것처럼 보이는 휴와 피오나에게 줄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엠마가 페러그린이 아프다는 것을 느낀 건 저녁식사 전이었다. 아이들 대부분이 기침을 했고, 오늘 저녁 당번인 휴와 올리브가 가장 심하게 아팠기 때문에 아이들 중에 가장 쌩쌩한 엠마가 페러그린을 도와 환자식 비슷한 걸쭉한 스튜를 끓이고 있을 때였다. 엠마는 페러그린이 숄을 두르고 재료를 꺼내러 부엌을 서성이다 가끔씩 멈춰 서는 것을 보았다.



"원장님? 어디 불편하세요?"



엠마의 질문에 페러그린이 뭐라고 대답하려다 얼굴을 찡그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엠마가 깜짝 놀라 스튜를 젓던 주걱을 내팽개치고 페러그린에게 다가갔다.



"머리가 아프세요? 추우세요? 혹시 휴한테 감기가 옮은 건..."



페러그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손을 내려 엠마를 진정시키고 엠마가 내던진 주걱을 주워 싱크대에 넣었다.



"조금 춥긴 하지만 아직 감기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구나. 스튜가 다 됐으면 저녁 다 됐다고 애들을 불러줄래?"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엠마가 부엌을 나가며 힐끔 돌아봤을 때 페러그린은 숄에 목을 거의 파묻고 식기를 꺼내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후식으로 따뜻한 차를 마실 때도 엠마는 숄을 꼭 쥐고 눈을 감고 있는 페러그린이 신경쓰였다. 루프를 재설정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도 엠마의 눈은 계속 페러그린을 따라다녔다. 페러그린이 휘청이는 것 같을 때마다 엠마는 반사적으로 페러그린에게 한발짝 다가갔지만, 페러그린은 원래 그렇게 움직이려고 했다는 듯이 태연하게 굴었다. 페러그린이 괜찮은 척 할수록 엠마의 걱정과 불만은 커졌다. 아프지 않은 척 하는 건 아프지 않는 데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




자려고 누워서도 엠마는 애들 몰래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삼키던 페러그린이 생각났다. 결국 엠마는 침대에서 일어나 올리브와 클로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는 브로닌 뒤를 몰래(왜 굳이 몰래 움직였는지는 엠마도 알지 못했다) 지나쳐 페러그린의 방 앞에 섰다. 아주 어릴 때 말고는 한밤중에 페러그린의 침실에 찾아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엠마는 잠시 문 앞에서 갈등했다.


'그냥 혼나고 내 방으로 쫓겨날 것 같은데, 어쩌지? 벌써 주무실지도 모르고... 지금 돌아가면 아무도 모를텐데...'


엠마의 짧은 갈등은 방 안에서 들리는 페러그린의 요란한 기침소리에 묻혀버렸고, 엠마의 손은 엠마도 모르게 노크하고 있었다.



"원장님, 저에요, 엠마."



기침소리가 잦아들고 잠시 뒤 문이 열렸다. 좁게 열린 문 사이로 페러그린의 얼굴만 간신히 보였다. 페러그린은 아까보다 훨씬 더 움푹 들어간 눈으로 엠마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미스 블룸? 잘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무슨 일은 제가 아니라 원장님에게 있는 거 같아서요."



엠마는 페러그린이 문을 닫을까봐 문 사이로 발을 집어 넣었다. 페러그린이 이제 두 장으로 늘어난 숄을 고쳐매며 엠마의 눈을 피했다.



"네가 걱정할 일은 아니란다."

"걱정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게다가 지금 원장님 안색으로 그런 말을 하셔도 전혀 설득력 없다구요."

"....걱정시켜서 미안하구나. 그래, 내가 좀 아픈 것 같다. 네 감정은 충분히 알겠으니 이제 방으로 돌아가렴."



빨리 엠마를 돌아가게만 하려는 페러그린의 태도에 엠마는 조금 짜증이 났다.



"원장님 저는,"

"미스 블룸, 네가 방금 상기시켜줬다시피 나는 환자고, 환자에겐 휴식이 필요해."



휴식하는 데에 뭐가 방해가 되고 있다고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페러그린의 눈빛으로 엠마는 페러그린이 자신을 지금 방해꾼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엠마는 고개를 흔들며 방 문 틈으로 몸을 더 밀어넣었다.



"그냥 휴식이 아니라 '따뜻한 휴식'이 필요하시겠죠. 원장님이 가진 침구는 별로 두껍지 않다는 거 알아요."



엠마가 가까워지자 페러그린이 한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엠마는 페러그린의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엠마는 자신의 온기가 더 잘 느껴지도록 문에 몸을 바짝 붙이고 페러그린을 올려다보며 착한 아이의 표정을 지었다.



"애들도 대부분 아픈데 원장님까지 아프시면 우리 루프 어딘가가 정말 틀어져버릴 지도 모르잖아요."

"절대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미스 블룸."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그럼에도 페러그린은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프지 않기 위해선 엠마와 함께 자는 게 가장 효율적인데 그랬다가 엠마에게 감기가 옮을까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원장님 제발 고집부리지 마세요."



엠마가 충분히 무례하게 말했지만 페러그린은 이번만큼은 무례함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았다. 대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집이라고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도 내가 돌보는 아이야. 나 때문에 네가 아프기라도 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니."



페러그린의 말에 엠마가 작게 몸을 떨었다. 페러그린이 아프면 루프 전체가 불안정해진다. 그럼에도 페러그린은 지금 그보다 엠마의 건강을 더 염려하고 있었다. 엠마의 몸이 약간 더 뜨거워졌다.



"저는 걱정마세요. 그렇게 걱정되시면, 음, 원장님이 저를 안는 건 어때요? 우리 둘 모두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엠마가 몸이 달아 입에서 나오는대로 제안한 것이었는데, 페러그린은 그마저도 고려해보는듯 눈을 지긋이 감았다가 떴다. 엠마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페레그린은 괜찮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아픈 사람 특유의 가늘게 떨리는 몸짓으로 문을 열어 엠마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엠마가 베게라도 챙겨올 걸 그랬나 후회하는 사이 페러그린은 본래 혼자 자던 침대에 쿠션 몇개를 추가해 두사람분의 이부자리를 만들었다.




페러그린이 방의 덧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는 동안 이불 안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엠마가 먼저 침대에 누웠다. 마지막으로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등불을 끄고 침대에 들어온 페러그린은 온 몸에 퍼지는 온기에 자신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엠마의 몸이 살짝 굳었다. 그를 눈치채지 못한 페러그린은 내친김에 엠마쪽으로 몸을 돌리고 엠마에게 팔 한쪽을 내밀었다.



"내가 너를 안고 자는 게 좋을 거 같구나. 너를 돌보는 사람으로서 조금 부끄럽지만 오늘 밤엔 네가 나를 도와줄래?"



엠마는 대답없이 뻣뻣하게 굳은 몸을 페러그린 품으로 미끄러트렸다. 페러그린의 몸은, 루프 안에서 경험한지 오래된 겨울처럼 차가웠고, 엠마의 따뜻한 숨결이 닿을 때마다 조금씩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페러그린의 근육이 이완되는 게 느껴지자 엠마의 긴장도 풀어졌다. 가끔씩 엠마의 머리 위로 페러그린이 길게 내뱉는 숨이 느껴졌다. 페러그린의 심장은 엠마의 평소 심장박동보다 조금 빨랐다. 페러그린이 긴장했거나 흥분했기 때문에 심장이 빨리 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엠마는 살짝 고개를 들어서 페러그린의 얼굴을 올려봤다. 그는 이미 잠들어있었다. 늘 조금은 힘이 들어가있던 미간도 완전히 펴져있었다.


'원장님은 새의 심장을 가졌기 때문에 심장이 빨리 뛰시는 걸까?'


평소보다 더 어려보이기도, 혹은 더 지쳐보이기도 하는 페러그린의 얼굴을 보다가 엠마는 다시 페러그린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콩닥댔다. 그러다 깨달았다. 그건 엠마 자신의 심장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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